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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상처로부터 출발하는 기억의 신앙사 - 성서는 역사의 기억에 관해 무어라고 말하는가

[성서와 함께](2005 01)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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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로부터 출발하는 기억의 신앙사

성서는 역사의 기억에 관해 무어라고 말하는가

 

 

 


성전 깊은 곳에서 오래된 법전이 발견되었다. 왕명에 따라 성전 정비 사업에 여념이 없던 대사제 힐기야는 즉각 왕의 최측근인 서기관 사반에게 보고한다. 당연히 그것은 왕에게 전달되었다. 왕은 그 문건 내용에 접하자 옷을 찢는다. 왕이 자신의 어의를 찢는다는 것은 국가적인 비상사태가 벌어진다는 신호다. 왕실과 예루살렘, 그리고 전국 곳곳에 왕명이 전달된다.



바야흐로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시작되었다. 불순한 것을 척결하여 야훼 앞에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지방 성소들을 훼파하였고, 제관들을 처형하거나 축출하였다. 이렇게 지방의 제의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왕실 이외의 세력에게 독자적인 정당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종교 이데올로기적 자원을 몰수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농민 대중은 신앙적으로 지방 성소보다는 예루살렘의 중앙 성소에 귀속되게 될 것이 기대되었다.

이 정풍운동의 다른 차원은 일련의 사회적인 조치들을 통해서 시행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된 법전을 확대하여 법률을 반포한다. 이 조치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한 가문의 재산이 보다 강한 다른 가문에게 복속되는 것을 억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몰락하거나 몰락 위기에 있는 가문을 보호하는 복지적 체계를 강화한 것이다. 농민 대중의 왕실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고, 대지주들의 경제적인 기반을 약화하려는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역사 편찬 작업이 활발히 전개된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른바 토라묶음이 편찬되고, 판관기〉 〈사무엘기상〉 〈사무엘기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학자들이 신명기적 역사서라고 부르는 일련의 역사서 묶음의 최초 버전이 구성된다. 창조 때부터 왕조사에 이르는 일련의 파노라마적 선민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1성서(=구약성서)의 역사틀은 이렇게 구축된다.

이 정풍운동은 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요시야 개혁이라고 불리게 된다. 빈약하나마 고고학적 증거나 문헌적 증거에 의존해 본다면, 그것이 성서가 묘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거나 성공적인 결과를 이룩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매우 강력했고, 몸속 뿌리 깊게 박힌 대중의 습속도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았다.

요시야 왕이 므깃도 요새에서 갑작스레 서거한 이후, 유다 왕국은 급속히 쇠락했고, 이후 30년이 못 돼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하지만 요시야 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운동은 유다 왕국 멸망 이후까지도 계속되어, 1성서에 수록된 토라의 최종 형태에까지 이들의 시선은 깊이 새겨졌다. 신명기적 역사서들의 최종 형태는 거의 이들의 관점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제1성서 위대한 예언자들의 담화집들이 묶인 것도 주로 이 운동의 소산이었다. 이들 신명기적 역사서와 예언집들은 훗날 정전(canon) 형성 과정에서 제1성서의 두 번째 요소인 예언으로 분류된다.

토라도 그렇지만, 특히 예언파트는 야훼신앙의 역사관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이 제1성서 예언의 편찬 정신의 핵심에는 요시야 개혁이 자리잡고 있다.

요시야 개혁이 시작되던 당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성전 깊숙한 곳에서 법전이 발견된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느 과자와 같이, 이 기억의 단자는 깊숙한 곳에 망각된 채 방치돼 있던 과거를 현재의 시공간 속으로 이끌어낸다. 왕은 옷을 찢는다. 아니 망각, 그 변조된 기억으로 직조되어 온 왕조 전통을 찢어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기억을 굴절시키고 변형되게 한 체계를 청산하는 일이다. 요시야 개혁의 주체들은 개혁의 이유를 이렇게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그릇된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그릇된 기억을 처벌해야 한다. 지방 성소들을 불 지르고 그 사제들을 처벌한 것은, 그리하여 지방 성소를 완전히 폐쇄시킨 것은 바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그 기억의 코드를 단절시키려는 것이다. 하나의 기억을 위해서 다른 기억을 망각의 창고 속에 가둬야 한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청산될 역사의 처벌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 요시야의 조부였던 히스기야 왕 시절 만들어졌던 각종의 개혁적 제도들은 친아시리아적인 므낫세 정권 치하에서 불온한 기억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기억 처벌의 대상이 되었고, 이때 개혁 정책의 토대가 됐던 법전이 성전 깊은 곳에 처박혔다. 요시야 왕은 이 처벌된 기억을 다시 망각의 창고에서 꺼내어 개혁의 실마리 기억으로 삼은 것이다.

그때마다 역사를 주도하면서 기억을 관장했던 세력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처벌될 기억을 그릇되고 사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역사 청산은 사악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치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와 같이 기억의 전쟁은 언제나 과거의 진실을 들이댐으로써 현재적 존재의 부당성 혹은 정당성을 판별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전쟁은 현재의 권력 투쟁과 맞물린다. 요컨대 과거의 진실이라는 것은, 그때 실제로 그랬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호출한 이들의 시각에서 편집된 기억이다. 다만 기억을 둘러싼 전쟁의 게임의 법칙은 그 과거의 기억을 호출한 이들이 그것이 편집된 것임을 알지 못해야 한다. 기억의 전쟁 당사자는 자신의 기억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가운데 싸움에 임한다.

왕을 포함한 요시야 개혁의 주체 세력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억이 실체적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그것이 개혁 세력의 시각에서 무의식적으로 편집된 기억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야훼신앙의 역사관에 대해 질문하려는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요시야 개혁이 과거의 기억을 호출한 신앙적 기조에 있다.

요시야 개혁의 실마리 기억을 제공해 준 법전은, 앞서 말한 것처럼, 농민 대중의 재산 보호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런데 신명기26장에는 의미심장하게도 회복된 땅(재산)에서 햇곡식을 드리는 제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햇곡식의 봉헌례는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시간에 관한 제의를 함축한다. 물론 그것은 낡은 시간들에 속하는 제의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전제된다. 새로운 기억은 낡은 기억을 배제한다.

그런데 문맥에서 보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된 땅에 돌아와 불하받은 토지에서 얻은 소출에 관한 것이지만, 요시야 개혁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대지주들에 의해 몰수당한 땅을 개혁 사업을 통해 회복하게 되는 상황을 암시한다. 아마도 개혁 주체 세력은 이 정풍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미래에는 땅을 돌려받게 될 것이라고 농민 대중에게 선포하였을 것이다. 과거에 선조들에 관한 역사적 기억은 농민 대중에게 미래의 꿈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현재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된다. 과거는 미래를 생산하며, 현재를 조직한다.

그런 점에서 햇곡식을 드리며 고백하라는 다음의 역사적 신조는 요시야 개혁이 추구하는 기억의 정치의 핵이 담겨 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주께서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신명기265~9

 

우리의 헌법 전문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이라고 시작하는 데 반해, 요시야 개혁은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로 역사적 신조를 시작한다. 곧 개혁 주체가 선사한 약속은 강대국에의 꿈이 아니라 구원에의 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강력해지면 모든 백성의 구원 소망이 실현되리라는 비전보다는, 모든 백성이 꿈꾸는 구원의 세계가 실현됨으로써 국가는 존재 의의가 확인되고, 그럼으로써 야훼의 후견 아래 놓이게 된다는 주장이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도식화해본다면 전자가 위로부터의 시선에서 본 꿈이라면, 후자는 아래로부터의 꿈이다. 요컨대 요시야 개혁의 종교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아래로부터의 꿈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정치적 자원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성서의 역사관은 바로 이러한 소망의 코드와 연계되어 있다. 곧 대중의 꿈에서 과거와 미래의 기억의 실마리가 추적된다. 위대한 영웅의 뿌리에서 혹은 신의 혈통에서 유래한 선민의식이 아니라, 강자들에 의해 괴롭힘당하고 사정없이 부림당하는 착취의 대상들이 품는 구원의 소망에서 유래한 선민의식이다. 머물 곳도 연명할 것도 없는 약한 자들을 선조로 둔 이들, 그러한 조상에 관한 기억을 역사의식으로 간직한 이들, 그러한 기억 속에 구원에의 꿈을 품으며 사는 우리가 바로 야훼 백성의 자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1성서의 역사관은 식민지 시대를 겪으면서 민족주의에 흡수되어 버린다. 그래서 야훼께서 오신다 / 사막에 길을 내어라 /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 벌판에 큰 길을 내어라.”(이사야서40,3), 바벨론에 유배당한 이들의 귀향에의 꿈을 실은 신탁을 선포한 익명의 예언자의 목소리는, 실제로 귀향한 유대인들의 자폐적 종족주의(민족주의)큰 길신학으로 탈바꿈해 버린다. ‘대로(大路)를 통해 야만적 학대를 받으며 끌려갔던, 거할 곳도 연명할 것도 모두 상실하게 된 이들이, 귀향한 이후 새로 구축한 체제의 비전을 제국의 대로를 모방하여 설계한 것이다. 예언자가 제국의 대로주의를 빗대어 역설적으로 말한, 사막을 뚫고 개설된다는 길, 그 불임의 시공간에 던져진 대중의 고통을 가로지르는 절절한 소망의 길이 제국적 성공을 꿈꾸는 민족주의적 꿈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러한 변질된 꿈에 기반을 두고 그들은 순수 혈통주의를 추구했다. ‘오염된타자를 가려내고, 그들을 마음껏 저주함으로써 자신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물론 배제될 타자에 대한 폭력은 항상 보복할 힘이 없는 약한 자들을 향했다. 그러한 증오를 통한 자기 재생산의 장치로 발전한 것이 바로 율법이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발전한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의 제도는 훌륭한 삶의 지혜를 수없이 많이 담고 있음에도 오염된 것과 정결한 것을 가르려는 혈통주의적이고 종족주의적인 강박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그러한 강박증은 과거의 기억을 편집한다.

약한 자들의 꿈에 토대를 두고 발전한 제1성서의 역사관은 수난당하는 민족의 꿈에 관한 이야기로 변질되고, 떠돌며 사는 조상들에 관한 기억은 영토에 대한 민족주의적 집착으로 해석되었다. 바로 이러한 야훼 신앙의 율법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훼손된 대중의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했고 역사의 집행관들에 의해 처벌당했다. 그와 함께 그런 이들에 관한 기억도 처벌됐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예수에 관한 기억은 살아남았다. 알다시피 제2성서(=신약성서)는 예수를 통한 야훼 신앙의 훼손된 기억의 복원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예수를 통한 기억에서 초점은 대중의 아픔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는 요시야 개혁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예수의 특징은 더 철저하고 더 구체적이라는 데 있다. “너희는 ...라고 들었으나라는 마태복음의 율법 비판의 말은 예수에게서 진정한 말의 권위는 율법의 기억(전통)이 아니라 그 말과 관련된 상황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의 상처에 관한 기억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식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율법이 그렇게 명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들의 고통을 치료하는 하느님의 구원의 사역에 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예수에게서 대중의 아픔보다 더 중요한 기억은 없다. 모든 것은 대중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하느님의 구원의 품에 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율법도 민족도 심지어는 하느님 자신도, 모든 숭고한 기억의 단자들도 상처 입은 이들을 감싸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