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학의 미소]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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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니힐리즘적 정치학
찰스 다윈의 기념비적 저술 《종의 기원》은 인류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중대한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존재란, (미리 형성된/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라) ‘진화 과정’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한히 변화하는 외부 환경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 여부에 의해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존재란 끊임없는 변화 과정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며, 그 변화의 계기는 외부 환경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에 관한 해명은 일찍부터 생물학적 관점을 넘어서 사회를 설명하는 시각으로 널리 활용되어 왔다. 사회도 인간 개체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환경 변화에 적응하느냐에 따라서 도태와 선별을 거듭하는 과정으로서 실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이라는 환경 속에서 인간이, 개체적이든 집단적이든 간에, 과연 어떠한 존재로 변화할 때 더욱 생존에 유리할까?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최근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서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20여 분간 계속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재현하는 전투장면은 마치 종군기자의 카메라를 통해 시각화되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자아낸다. 많은 평론가들이 ‘영화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죽음의 현장’을 묘사했다고 말할 정도로 영화는 극도의 ‘사실주의’를 추구한 듯이 보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영화의 줄거리는 지극히 ‘비사실적’이다.
세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어머니에게 유일하게 남은 한 명의 아들인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여덟 명의 미군이 독일군 점령 지역으로 파견된다. 정상적인 명령계통으로는 불가능한 작전이 정상적인 계통에 따라 펼쳐진다. 더구나 그런 비상식적 작전은 성공을 거둔다. 그러므로 적어도 미군과 관련해서 이 영화는 휴머니티가 넘치는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의 야수성을 병적으로 폭발시키는 외적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정상적 명령체계는 살상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동료애는 생존을 위해서 그리 현명한 처신이 아니다. 전쟁에 대한 리얼리즘이란 바로 이러한 논리가 실현되는 냉혹성을 얼마나 생동감 있게 묘사하느냐의 문제다. 인류의 산업문명이 전쟁 수행에 직접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시각매체는 바로 이러한 리얼리즘의 맹아 역할을 해왔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화’는 리얼리즘의 중심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된다.
그런데 ‘정지된 장면’에서 이미지를 담는 사진과 비교할 때, 영화라는 매체는 ‘흐름’을 통해서 리얼리즘을 표현한다. 가령, 티모시 오설리번(Timothy O'Sulliban)의 사진 〈게티스버그, 그 죽음의 수확〉(A Harvest of Death, Gettysburg)은 “빗속에 이틀간 방치되어 불어터져 썩어 가는 시체를 담”음으로써 전쟁의 리얼리즘을 그리고 있지만, 영화는 결코 정적인 대상만으로 줄거리를 구성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필요하다. 1 그런 점에서 영화가 담아내는 리얼리즘은 훨씬 능동적이며 적극적일 수 있다. 한편 영화는 사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막대한 제작비용을 필요로 한다. 이런 현실은, 그 비용 조달자의 욕구와 연관된 리얼리즘을 표현하도록 강제한다. 여기서 영화의 전쟁 리얼리즘은 사실성을 결여한 이상주의와의 결합이 강제되는 것이다. 그것은 산업화된 전쟁을 보다 희망적으로 그리려는 자본의 이해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주인공은 종종 전쟁의 참혹한 리얼리즘에서 예외적 존재가 되곤 한다. 그는 이상주의적 삶을 실천하고도 전쟁의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다. 전쟁이 야기하는 인간적 ‘전형’은 전쟁이라는 상황의 전형이 요구하는 각박한 생존 현실과 관계되어 있지만, 주인공은 그러한 전형을 닮고 있지 않음에도 생존 현실의 냉혹성을 피해가는 행운을 차지한다. 물론 바로 여기에 영화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바로 이런 공식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영화다. 전쟁은 참혹하지만, 그럼에도 주인공들의 이상주의적 행동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전쟁은 낭만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미학화를 발견하게 된다. 즉 전쟁은,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구체적인 행동은 사회의 통념적 진리의 형성에 관여한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라는 명령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은 충분히 명분이 있을 수 있으며, 이것은 미국인들에게 베트남에서의 양민 학살자라는 미군의 이미지를 망각하게 하는 데 훌륭히 기여하고 있다.
이쯤에서 영상 리얼리즘에 의한 또 다른(즉 영화가 아닌) 전쟁의 미학화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지난 1991년 걸프전에서 CNN 방송의 생생한 보도는 전쟁의 미학이 리얼리즘과 결합한 금세기 최고의 장면이라 할 만하다. 50만 대군의 출병에도 불구하고, TV는 첨단무기체계에 의한 기술전의 양상을 극도로 강조했다. 람보 같은 영웅적 군인 대신 컴퓨터에 의해 조종된 첨단 미사일이 적의 군사목표물들에 명중하는 장면들이 전 세계에 방송되었다. 마치 ‘깨끗한 전쟁’, 즉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쟁이 이제 비로소 실현되었다는 듯이. 그리고 바로 미국이 이 ‘깨끗한 전쟁’의 주역이라고 선언하려는 듯이. 그러나 전쟁 이후 밝혀진 것은 미국의 많은 미사일들은 군사목표물이 아닌 이라크의 병원과 아파트를 향하여 돌진했고, 밤하늘을 불꽃놀이 하듯이 비추었던 미국의 폭탄들의 90%가 재래식 무기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쟁은 미국 중심의 평화를 위한 최고의 수단임이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되었고, 냉전이 사라진 이후에도 최첨단무기 개발을 위한 군비의 확장이 여전히 불가피하다는 여론을 확산시켰다. 2
지난 1998년의 8월 21일 기습적으로 감행된 수단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나, 1999년 3월 27일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에 의한 대 유고 공습은 이런 점에서 걸프전의 재판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미국은, 영상 리얼리즘에 힘입어, 명분 있는 전쟁의 수호자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한국의 많은 대중적 영상매체들도 이슬람 테러리즘의 비인간성, 그리고 밀로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족의 인종청소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데 미국의 여느 매체 못지않게 열을 올렸고, 이것은 미국의 테러리즘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한국에서도 지배적 담론으로 확산시키는 셈이 되었다. 즉 영상매체가 만들어내는 리얼리즘에 의한 전쟁의 미학은 한국 같은 이해 당사자가 아닌 나라에서조차 미국 패권주의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전쟁의 미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지난 1998년 9월초 한 편의 국제적인 코미디가 펼쳐졌다. 출연자들이 한결 같이 매우 심각한 표정과 행동을 하는 가운데 일단의 시청자들에겐 냉소의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코미디다. 줄거리는, 북한이 다단계 로켓을 발사했는데, 그것이 인공위성이냐 탄도미사일이냐를 둘러싼 국제적 소요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 대기 위를 배회하는 골프공 하나도 능히 감지할 수 있다는 최첨단 감시망에 수천 킬로를 십 분 가까이나 날아간 거대한 다단계 로켓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집단이라고 광고하며 방공망을 철통같이 방위하던 지역이 아닌가? 이런 로켓의 발사가 흔한 것이라면 모르되, 이렇게 특별히 문제가 될 정도로 이례적인 현상인데 미국도 일본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최첨단 장비에 의한 철통같은 감시체계라는 주장은, UN의 식량원조를 받아야 했던, 결코 강대국일 수 없는, ‘별 볼 일 없는’ 나라가 벌인 한 도발적 행동에 의해 허위로 판명되고 말았다. 이른바 ‘공지전’ 개념 운운하면서, 한국전이나 월남전에서와 같은 무차별포격에 의한 대량살상 전략을 지양하고, 최첨단 무기로 군사목표물만을 파괴하는 ‘깨끗한 전쟁’ 전략을 구축했다는 주장은 아직 희망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 일로 말미암아 여실히 폭로되고 말았던 것이다. 월남전의 불명예를 최첨단 무기를 통해 씻으려 했던, 그래서 명분 있는 세계 평화의 수호자임을 자임하려 했던 미국의 이데올로기는 북한의 도발로 말미암아 한낮 조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언제나처럼 이 기회를 틈타 세계를 냉전적 분위기로 몰아가려 했다. 당시 미국의 군수산업은,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그랬듯이, 활발하게 로비를 벌였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극우 파시스트적 성직자들은 전투적 백인 중심주의를 더욱 맹렬하게 부르짖고 있었다고 한다. 신나치주의자들을 포함한 극우 무장 민병대들은 더욱 활기를 띠며 백색 테러리즘을 기획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냉전주의의 조장은 인종적, 성적, 종교적 폭력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러는 가운데 인간의 야수성은 점점 병적으로 표출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한의 도발은 이러한 ‘전쟁 이전의 전쟁’ 상황(냉전)으로 세계를 몰아가려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한몫하고 만 셈이다.
북한의 도발이 감지될 때마다 남한사회에는 호전론이 확산되곤 한다. 1998년 9월의 사건 때도 그랬다. ‘대포동 1호’ 같은 미사일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는 평화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주장이 제출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은 197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이 독자적인 미사일 개발을 추진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마치 과거 미소가 냉전시대에 경쟁적으로 군비경쟁을 벌인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일까?
전쟁 혹은 냉전의 환경은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만들어낼까? 우리는 이것에 대해 그리 많이 토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 개개인뿐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가학적 요소들은 필시 이러한 외부 환경에 적응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을 극복해야 할 때, 여전히 그것을 막으려는 자들이 세계적으로 존재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기회를 찾아 세계 곳곳을 두리번거린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일련의 국제적 사태들은 저들에게 그런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우리가 그 동안 적응하며 살아왔던 방식대로 판단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각 텍스트들은 로마제국의 두 얼굴을 직시하고 있다. 하나는 패권주의적이고 호전적인 제국주의자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상위의 국제적 거중조정자임을 자임하는 ‘평화의 사도’ 같은 얼굴이다. 3 〈히브리서〉는 이러한 매락에서 로마의 위장된 폭력성을 문제제기하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적 텍스트에 속한다. 특히 13장 14절은 바로 그러한 단적인 예에 속하는 본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곳에 머물 만한 도시를 가지고 있지 않고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ου γαρ εχομεν ωδε μονουσαν πολιν αλλα την μελλουσαν επιζητουμεν)
―〈히브리서〉 13,14
여기서 우리는 언급되는 두 개의 도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장은, 반의적 접속사인 ‘알라’(αλλα)에 의해 이 둘을 대조시킴으로써, 양자의 관계를 긴장 속으로 몰고 간다. 여기서 두 도시는 각각 머물러 살고 있다는 뜻의 ‘메노오’(μενω)와 장차 도래할 것을 뜻하는 ‘멜로오’(μελλω)의 분사형 수식을 받음으로써, 하나는 현존하는 도시며 다른 하나는 미래의 도시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한 도시는 현재 살고 있는 도시며, 다른 한 도시는 앞으로 살 도시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현재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서 화자는 ‘가지고 있지 않다’(ου εχομεν)고 말한다. 즉 현재 살고는 있으나 그것을 자신들이 살아야 할 곳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면 뒤의 도시에 대해 화자는 ‘찾고 있다’(επιζητουμεν)고 한다. 즉 현재는 살고 있지 못하지만, 궁극에는 기어이 그 곳에 살리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결국 이 두 도시는 자연스런 장소 이동을 통해 전유되는 게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긴장의 실체는 무엇인가?
현존하는 도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본문은 ‘도시’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전제하고 있다. 이때 도시란 로마 제국에서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그 가치체계를 구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장소를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도시는 제국의 이상이요, 그 구현체를 뜻한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폭력적 평화의 환경에 적응해야만 생존하기에 유리한 도시적 세계 속에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이상주의적 행동을 하면서도 행복을 구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무수한 폭력 앞에 처참하게 노출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석방을 거부하고 매를 맞았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조롱과 매의 시련을 겪고, 심지어는 결박과 투옥의 시련도 겪었습니다. 그들은 돌에 맞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찔려 죽었으며, 양가죽과 염소가죽을 두르고 돌아다녔으며,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맞지 않아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습니다.
―〈히브리서〉 11,35b~38절
파괴적 리얼리즘의 현실에서 예외일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참혹한 현실을 그는 은폐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외부 환경이 구축해 놓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 말이다. 다만 ‘종의 기원’의 리얼리즘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외부 환경의 폭력성을 은폐한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 되어, 그 속에서 반리얼리즘적 전형이 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도시 주민’의 삶이 있다. 그 속에는 ‘평화’가 있다는 허구의 꿈을.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상은 그러한 허망한 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팍스 로마나가 선포되고 있는 도시에서 그곳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전형성은 로마의 평화를 향유하며 현재의 (도시) 체제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고난을 직면하며 사는 것이다. 13절이 묘사하듯이,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성문 밖으로 나가서 고난을 맞이하자”고. 그리하여 저자는 ‘장차 도래할 도시’를 제시한다. 요컨대 미래의 그 도시를 갈구하면서, 지금의 고난을 피하지 말고 견디어내라는 뜻이리라. 결국 그의 결론적인 말은 그 가치에 동화되지 ‘않는’ 길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도시에 거하나, 이 도시 사람이 아닌 존재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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