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학의 미소]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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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眞我)・무(無)의 경지에 접근하는 영적 실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말뜻이 잘 헤아려지지 않는 문구다. 무슨 제목이 이런가, 의아심이 들어 책을 집어들었다. 문학평론가 도정일 선생의 에세이 모음집이었다. 1 평소 그의 글을 흥미롭게 읽어왔던 데다, 제목이 자극하는 호기심 탓에 손에서 떼어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 크지 않은 서점, 두 시간이나 바닥에 주저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자니 서점 주인의 눈치가 사뭇 날카롭다. 하지만 그에게 미안해서라기보다는, 책의 유혹이 너무 강렬해서 참을 수 없는 충동에 구매자가 되고 말았다.
마지막에 실린 글은 책의 제목과 같았다. 자연 가장 먼저 나의 눈길을 붙잡았다. 생태환경에 관한 인류의 비뚤어진 인식에 대해 문학은 그리고 문학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글이다. 그런데 도입부에서 선생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오는 밤 숲에 머물러’라는 시를 인용하고 있다. 눈 오는 밤에 숲과 호수 사잇길을 말을 타고 가다가, 눈꽃을 피운 숲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머무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선생은 이 “아름다운 시는 오늘날 서정적 텍스트로서의 적실성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고 극언한다(349쪽). 이런 폭언의 이유를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산성눈 내리는 지금 이 세계의 어느 숲이 아름다울 것이며 누가 그 숲에 취해 발길을 멈추는가? 시인 자신이 눈을 피하기 위해 여름 해수욕장의 파라솔만큼이나 큰 우산을 쓰고 외출해야 하는 시대에 어느 독자가 맨머리로 눈 내리는 숲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달려가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특별한 조건, ‘제정신 아님’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라고(349쪽). 눈 내리는 숲이 ‘독자’와 ‘시인’을 배제하는데, 어떻게 그곳이 미적 정감을 자극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가,고(350~51쪽). 그럼에도 시인이 거기에서 미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그의 “정서세계에 발생한 감성분열과 상상력의 파탄” 이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350쪽). 또 “비/눈 맞으면 안돼!”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명심하고 있는 아이에게 ‘눈 내리는 숲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문학교육이란 얼마나 역사 착오적인 세계인식의 전수이며, 얼마나 인간 양성의 분열적인 효과를 초래하겠는가고, 이런 모순적 사고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무감각한 우리를 향해 선생은 항변하고 있다(352쪽).
이 글을 읽으면서 문뜩 2년 전 요맘때쯤 읽었던 김윤식 선생의 글이 떠올랐다. 2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두 사람을 비교하며 두 유형의 문학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내용의 글이다. 1968년 수상자인 카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 899~1972)와 1994년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가 그들이다. 김윤식 선생은 일본의 유명한 전통적인 ‘바쇼’ 시의 한 구절인 “가을 깊어라/ 이웃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에 대한 두 대가의 상반된 시각을 추측한 일본의 평론가 야마모토 겐기치(山本健吉, 1907~88)의 해석을 인용하면서 그 두 사람을 비교한다. 카와바다는 그것을 ‘쓸쓸함’의 정서로 읽는다면, 오에는 ‘사람 그리움’으로 읽었으리라는 얘기다(431쪽). 내가 이해한 바로는, 카와바다는 고독한 자기 자신에 몰입해 있고 자신과 관련된 주변 세계에 대한 비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세계는 자신과 관련된 사람/세계에 대해서는 퇴폐적이고 탈속적인 신비주의를 나타내며, 자신과 무관한 사람이나 세계(타자)에 대해선 미적 탐닉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반면 오에의 문학세계는 인간과 주변 세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놓치지 않으려 자신과 투쟁하면서, 단절된 세계, 단절된 타인을 향해 끊임없는 교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정일 선생은 진정한 시인은 숲의 미학에 탐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적인 일본의 문학가 카와바다는 바로 이런 유형의 문학을 대변한다. 세계를 가장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는 미학의 극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생의 폭언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런 문학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그 심미성에 탄복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그러한 미의 극한을 공감하라고 한다. 거기에는 자신에게서 그리고 주변의 인간 세계에서 얻을 수 없는 세계의 위대함, 그 도도한 초월성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것은 선(禪)의 세계, 신비의 세계로 진입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이때 선의 세계란, 인간 사회의 규약이나 가치가 담고 있는 불완전함이나 치졸한 암투로부터 결별한, 아니 이탈한 비현실의 세계다. 카와바다의 유명한 소설 《눈고장》(雪國) 3은, 정복에 집착하며 힘을 숭배했던 군국주의자들의 나라,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참혹하게 파괴된 나라, 미 점령군 통치하의 붕괴된 민족적 가치의 난장, 이 모든 현실에서 벗어나/이탈하여 저자가 꿈꾸는 피안의 세계를 향해, 미를 탐닉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매는 인간이 묘사되고 있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 비로소 미를 탐닉할 수 있는 눈고장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정일 선생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미학의 극치에 감동하며 환호해마지 않는다. 그리고 또, 이런 미학의 주장 또한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깊이를 갖고 있고, 강한 설득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 살면서도 현실 밖에서 미를 추구하는 이런 분열적인 미적 감성을 선호하는 경향은, 비단 문학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심지어 종교적 심성 속에서도 그것은 뿌리 깊은 현상이다. 그것은 어쩌면, 현실 외부에서 현실을 초극하는 계기를 추구하는 미적 감성 자체가 이미 하나의 구원론적 신화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히브리서〉의 비슷한 메시지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13장의 맥락에서 이 문제는 두드러진다. 다음에서 인용된 13장 9절에는 ‘음식의 규정’과 ‘은총’이 대립되어 있다.
음식에 관한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속지 마십시오. 음식에 관한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은총으로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히브리서〉 13,9
즉 음식의 규정을 통해서 강건해지는 방식과, 은총을 통해서 강건해지는 방식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의 대립을 해석하는 것이 본문 이해의 핵이다. 도대체 ‘음식의 규정’이란 무엇일까? 너무 많은 상상을 하지는 말라. 차라리 그 다음 구절을 읽는 게 낫다.
우리에게는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그 제단의 음식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대제관은 죄(사함)을 위하여 짐승들의 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가는데, 그 짐승들의 몸은 영문 밖에서 태워버립니다.
―〈히브리서〉 13,10~11
여기서 음식의 규정이란 성전의 제사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전 제사란 구원을 추구하는 제의 행위를 뜻한다. 이쯤 되면 우리는 서로 대립적으로 표현된 음식의 규정과 은총의 문제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지에 대해 감잡을 수 있다. 예수가 스스로 제물이 되어 자신을 바침으로써 성전 제사는 종식되었으며, 이로써 음식의 규정에 연연하는 성전의 제사가 아니라, ‘은혜’가 구원의 새로운 대안적인 방식으로 대두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까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상식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물음은 바로 여기부터 시작된다. 〈히브리서〉는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 제사가 종식된 지 거의 20년이 지난 뒤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성전 제사 대신에 예수의 은총 운운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뒷북치는 것, 죽은 왕 침뱉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정교하게 읽고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이런 의문은 결코 해명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병무 선생이 부활시킨 12~13절의 폭발성에 다시금 주목해야 한다. 4 “예수가 대중을 위하여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성문 밖으로 나가시오.” 여기서 ‘성문’이라는 표현은 권력을 상징한다. 즉, 성문 밖은 권력을 박탈당한 존재의 공간을 의미한다. 바로 고난의 공간이다, 수탈의 공간이다, 수치스러움의 공간이다, 배제당함의 공간이다. 요컨대 예수의 구원의 은총은 이러한 공간 한가운데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은총의 수혜자들은 마땅히 고난과 대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도정일 선생의 말처럼, 진정한 시인은, 아니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 상처주고 상처받는, 빼앗고 빼앗기는, 죽임을 가하고 죽임당하는 현실에서 아름다움에만 몰입되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과 대면하며 살아야 하는 구원의 공동체됨과는 다른 구원받은 자들의 존재방식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은 ‘음식의 규정’을 통해 구원의 존재방식을 믿는 것이다. 요컨대, 고난과 대면하며 신앙의 존재방식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제사와 같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음식의 규정’ 등을 통해 신앙인의 삶을 논하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제사는 현실의 삶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통해 현실을 성찰하게 하는 종교적 기재다. 제의적 행위는 부재(absence)와 현전(presence)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본질적 자아라고 착각하는 주체의 자기 중심주의를 지양하게 하고, 타자(인간이든 세계든 우주든)와 연루된 자아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종 제의는 현실을 성찰하기보다는 현실을 이탈한 제의의 형식 논리에 몰두하게끔 하는 신심을 부추긴다. 마치 카와바다의 ‘눈고장’과 같은 망각의 공간에서 제의 방식을 구상하고, 찬양의 의의를 논하고, 성서의 의미를 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음식의 규정으로 구원의 존재양식을 떠올리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14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카와바다 식의 피안의 세계를 탐닉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세계의 고난의 현실을 망각하려는, 그럼으로써 도리어 이 땅 위에 자신이 안주할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몽상가를 겨냥한 비난인 것이다.
김윤식 선생이 인용하고 있는 평론가는 ‘카와바다가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을 선택한 것은 이러한 자신의 글쓰기 자세의 한계를 체험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정한다(436쪽). 반면 글쓰기에서 휴머니즘을 간직하려 투쟁했던 오에 겐자부로는 바로 그런 자세로 말미암아 진아(眞我)의 경지, 무(無)의 경지를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438쪽).
이런 점에서 ‘사람 그리움’의 미적 감성,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현실 초극의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읽어내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종교적 체험이다. ‘신앙인다움’이란 바로 이와 같다. 삶 속에 고난의 흔적이 새겨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런 눈으로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하며, 성서를 논하는 것. 바로 그런 얼굴로 타인을, 세상을 대하는 것. 자신의 말과, 행동과 몸짓을 선택할 때, 주변의 사람/것의 시선에서 하는 것. 우리가 우리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할 때, 우리의 기쁨을 생각하기에 앞서, 공동체의 외부자인 타자의 아픔을 먼저 떠올리는 것. 바로 이러한 삶이 그리스도교가 진정 말하는 ‘나눔과 섬김’의 자세요, 진아․무의 경지에 접근하는 영적 실험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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