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울림] (2004 12)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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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문턱에서 희망을 읽는다
신의 화육과 배려의 신앙
요즘 한국기독교에 대해 진단해보라는 원고 청탁이 잇따른다. 공적 담론에서 기독교가 이렇게 넘치는 관심을 받아본 기억이 생소하다. 내가 인문-사회과학적 잡지 매체에서 활동하면서 겪은 어려움 중의 하나는 한국 지식사회가 기독교에 대해 대단히 ‘냉소적’이라는 것이다. 목사직을 가진 자와 한국 사회의 지식담론을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몹시 낯설어했다. 기독교나 신앙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있었지만, 그들은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 했고, 공적 담론의 일부로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나를 만나면 관계의 서먹함을 매우기 위한 대화술의 소재였을 뿐, 우리 사회에서 극복하거나 의미 있는 담론의 지평으로 참조할 대상으로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내가 주간직을 맡고 있는 잡지에서조차 특집은커녕 좋은 책을 비평하는 지면(紙面)의 마련도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국의 공적 담론에서 기독교는, 나의 경험에 비추어 다소 비약해서 말한다면, 괄호처진 대상이었다. 사적 영역에선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선각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또 기독교적 가족 배경에서 성장한 이력을 많은 이들이 갖고 있음에도, 그들은 마치 공적 담론의 공간에서 기독교를 망각해야 한다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강박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고 싶지 않은 것이겠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서 상황이 사뭇 달라졌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참았던 말을 하려 한다. 공중파 방송뿐 아니라, 많은 온/오프라인 보도매체, 주간・월간・계간 잡지 등이 비판적 기조의 기독교 관련 기획을 했거나 할 계획에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일상적 인식에 영향 받은 것이기도 하고, 또 그러한 인식을 보다 정돈되게 하는 중요한 사회적 장치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최근 기독교는 망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회의 ‘공공의 적’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된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내가 보기엔, 그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해와 올해 수차례에 걸쳐 벌어진 이른바 ‘기독교 시청집회’였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의 지평 속에 기독교가 입장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정치적 행동을 취하게 된 것 그동안 한국기독교는 암묵적으로는 정부에 적극적인 협력을 해왔고 그 대가로 적지 않은 특혜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우리 사회의 수많은 위기에 대해 지속적으로 외면해왔다. 그런데 이제 새삼스레 공공연히 정치 개입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에 대한 반감이 공적인 기독교 비판의 기조에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글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다.
물론 이념적으로 기독교의 보수주의와 입장을 달리하는 많은 이들이 시청집회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서 기독교는 이미 눈총을 받고 있다. 특히 시청집회는, 그 시대착오적인 거친 어투와 행동거지들의 난장이었던 그 바보스러움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문제의 집단이라는 확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치적인 노선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보여준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모습, 그리고 미국의 이해와 자신들의 신앙관을 직결시키려는 종속적 태도 등이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심어준 것이다. 요컨대 그들이 어떤 이념, 어떤 계층을 대변하는지, 그 정치적 주장의 위상이 어떠한지 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표현하는 문화적 양식이 문제였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내가 ‘표면적’이라고 말한 이유가 드러난다. 문화적 양식이란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반복 행동 속에서 서서히 형성된다. 즉 기독교의 일방적인 독선주의나 그 맹목적 친미 성향의 가치관은 시청집회에서 갑자기 드러난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독교의 태도로 인해 사람들은 이미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시청집회를 기화로 이러한 불쾌감이 공공연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기독교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라도 찾고 싶은 이들 사이에선 최근 대안교회나 대안신앙이 요청되고 있다. 물론 이런 진지한 물음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기독교의 문제가 하루 이틀 전의 현상이 아닌 것처럼 그에 대한 비판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바람 역시 오랜 동안 계속되어왔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특정한 정세와 관련해서 대안을 향한 시도는 폭발적이기도 했다. 허나 그간의 노력이 이렇다 할 결실을 보지는 못하였다.
내가 참여하는 교회 역시 폭발적으로 대안이 모색되던 시절 탄생한 하나의 실험적 교회였다. 17년간의 노력이 결코 작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그런 탓에 매년 거의 연례행사처럼 연말이 되면 새로운 모색을 향한 토론이 되풀이 되었다. 물론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다르다면 좀 더 체계적인 고민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일 게다. 아무튼 예배 형식, 신앙 절기, 전례용 의복, 찬송의 양식, 신앙고백의 틀 그리고 교회 조직 등에 대한 관심이 내가 속한 교회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탐색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신앙제도에 대해 비판적이던 이들이 대안적 모색을 제도화하는 데 실패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희망은 꿈꾸어져야 할 뿐 아니라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희망의 제도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희망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 또한 대안적 신앙 혹은 교회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이라고 본다. 내가 보기엔, 희망의 제도화를 향한 그간의 시도들이 성공적이지 못한 데는 제도화의 빈곤보다는 성찰의 빈곤이 더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대안의 모색은 예배 형식의 문제도, 교회 조직의 문제도, 그리고 선포 내용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즉 제도화로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간과해왔다는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교회의 토론회에서 한 교인이 내게 깨우쳐줬던 표현대로 말하면, ‘저편에 계신 하느님을 어떻게 경배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곳 어딘가에 우리에게 낯선 모습으로 일하고 계신 그분을 찾기 위한 신앙적 모색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오랜 동안 예배의 대안적 틀을 찾기 위해 힘써 왔다. 절기를 어떻게 구성하면 좋을지, 예배 형식을 어떻게 할지, 그것들을 어떻게 이름 지을지를 많이 고민했다. 우리만의 찬송집도 만들었고, 그것을 끊임없이 개정함으로써 의미를 상실한 채 멜로디만 되뇌는 매너리즘을 빗겨가려고도 했다. 우리만의 성서 해석과 세계 이해의 기준을 확정하고자 했고, 그것을 신앙고백문의 형태로 구성하기도 했다. 내 후임 목사가 주도한 것이지만, 목사와 장로 임기제, 평신도의 주체적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체계 등을 구성하는 작업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적지 않은 노력이 담긴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대안’적 형식을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실은 그것들은 ‘다른 안(案)’이지 대안은 아니다.
나는 대안적 신앙의 모습을 ‘배려’에서 본다. 배려란 ‘타자’(他者)를 보는 데서 시작한다. 자기가 규정한 타자가 아니다. 그 규정의 담을 끊임없이 월장하는 낯선 모습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배려란 타자를 볼 뿐 아니라 타자를 ‘염려’한다. 그것은 그 ‘보는 것’에서 타자의 ‘아픔’을 읽어낼 때만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그(녀/것)의 아픔을 읽어낼 뿐 아니라, 그 고통에 자신 또한 고통스러워하는 것, 바로 이것이 배려다.
말할 것도 없이 배려라는 대안 신앙적 모습의 원형은 예수다. 하느님이 당신의 규준에 따라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그 자체로 보고, 그 낯선 형상으로 자신을 변화시킨 것, 그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화육’이 아닌가? 하느님은, 아니 예수는 인간을 그 자체로 보았으며, 그 모습에서 아픔을 발견했다. 그것이 화육인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인간 중에서도 가장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담아낸 이가 바로 신의 화육, 곧 예수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찍부터 배려를 상실했다. 낮은 데로 임한 예수보다는 높이 군림한 예수를 숭배했다. 유대교와 로마 당국으로부터 ‘이교도’로 낙인 찍혀 매맞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했던 것처럼, 타인들을 이교집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교회에 귀속시켰다. 타인들의 신음과 고통을 밟고 교회의 선교는 수행됐다.
근대 이후 유럽 이외 지역으로의 선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 땅으로 진입한 기독교 역시 그러했다. 전통문화, 토속적 신앙을 무시했고, 배척했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이 남유럽 지역의 토착 종교의 축제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기독교 신앙은 너무 빨리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전통 문화나 토속 신앙 속에 스며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 언어를 무시한 결과, 기독교는 사람들의 고통을 읽는 데 실패했다. 그보다는 화‘육’이 아닌 화‘신’으로서의 예수의 비가역적인 고통을 전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고통으로 결코 번역되지 않는 고통이다. 절대적이고 유일회적이다. 요컨대 기독교 선교는 타인을 배려하기보다는 무시함으로써, 오직 신의 의지만을 존중함으로써 실행되었다. 배려의 신앙이 아니라, ‘무례함의 신앙’은 이런 기조로 발전해온 것이다.
무례함의 신앙이 포교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힘’이다. 선교의 대상을 압도하는 힘이 전제되어야만, 그 대상의 삶의 틀, 그 고통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녀/것)을 자기의 삶의 틀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한국 기독교교가 그토록 맹목적인 친미주의를 신앙의 내적 언어로 이해하게 된 것도 (선교 종주국인 미국의) ‘힘에 대한 선망’을 신앙으로 오인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나아가 기독교인의 신앙이 세속적 성공에 친화적인 가치관으로 작동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큰 교회’ 중심으로 교회들의 사회가 구성되고, 큰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 중심으로 목사 공동체가 구성되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장로가 되는 데 훨씬 더 유리하다는 것 등은 성공주의, 승리주의가 교회 제도화의 주된 동력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승리주의를 일상 속에서 신앙적 의미로서 체현해 가는 과정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대안신앙이란, 바로 이러한 신앙적 기조를 뼈아프게 성찰하는 과정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본다. 힘에 대해 친화적인 감각을 키우는 신앙이 아니라, 낯선 타자에 대한 배려의 감각을 일깨우는 신앙이라고 보는 것이다. 비천한 타자의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에서 예수를 발견하는 신앙이다. 곧 예수는 높은 하늘 어느 곳에 계신 게 아니라 저 낮은 곳에 저들과 함께, 저들의 얼굴로 계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대안교회는 교인들이 자신과 다른 타인을 보고 그의 아픔을 읽어내는 감각을 연습하는 신앙공동체여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희망의 제도화를 향한 열망은 종종 극복하려 했던 신앙 제도를 제거하기 위해 힘을 숭배했다. 그것이 잘 실현되지 않은 것을 대안 모색의 실패라고 자조했고,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효과적인 힘의 규합을 위한 전략 탐색에 몰두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안교회라고 주장했던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읽고 아픔을 발견하기보다는 자신의 상처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이의 마음을 마구 긁어댔던 것을 수없이 보았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라는 나 자신 또한 무수히 많이 그러했다. 곧 내가 보기엔 대안은, 이것이 자기 반성되지 않는 한, 우리가 그토록 발견하려고 노력했던 특정한 틀의 예배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어떤 형식이나 어떤 말 속에서, 어떤 예전의 양식 속에서 ‘배려’를 연습하지 않는 신앙은 그야말로 전통적인 인습적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의 몸이 교회라는 바울 식의 희망의 제도화 담론은 교회 역사 속에서 성찰을 괄호친 채 화육과 희망에 관한 인습적 신앙을 구성해온 것이다.
지구화라는 거센 태풍들이 밀려오고 있다. 그것들이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한국 사회는 자본에 의해 마구 할퀴어진다. 고통이 넘실거린다. 그리고 어떤 이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내동댕이쳐졌다. 반면 어떤 이는 자신이 입을지도 모를 상처를 피하기 위해 다른 이를 방패삼는다.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계층적 차이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한국의 근대화는 최근 들어서 급속하게 양극화되고 있다.
나아가 양극화된 계층적 사회구조는 삶의 기회를 양극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 행복과 불행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좀처럼 기회를 누릴 수 없는 실패한 이는 자신의 불행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희망 없는 절망’의 나락 속에 내던져진다. ‘무기력’이라는 사회심리학적 개념은 존재로 하여금 위기에서 기회를 맞이하지 못하게 한다. 가령, 이러저러한 이유로 신용불량자가 된 이는 개인 워크아웃제의 수혜자가 되더라도 좀처럼 회생의 기회를 맞지 못한다. 그것은 이러한 개인 회생제도가, 신용불량으로 인한 아픔들의 누적 속에서 자기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상실해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무기력’이라는 상흔을 배려하지 않은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상처를 확산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양상은 서로를 할퀴어대는 난장 속으로 우리 모두를 밀어 넣고 있다. 상처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상처가 심한 곳에 새 살이 돋지 못하게 되는 무기력이 저주처럼 새겨진다. 무기력은 ‘희망의 일식’을 상징한다.
오늘 우리가 대안교회를 얘기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은 이렇게 상처로 난도질되는 상황에 던져진 이들이 급증하는 상황과 맞물려있다. 전통적인 인습으로서의 교회가 오늘 우리 사회의 고통을 읽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을 발견하고 보듬기보다는 자기 말하는 데만 열을 올리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 첨예해지는 정치적 국면에서 위축된 세력을 보전하기 위해 정치게임을 벌이는 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게임에 승리하기 위한 재원 마련에 몰두하느라 박탈된 자들의 결핍을 조장하는 지구화 사회의 풍조에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안신앙은 전통적 교회의 인습적인 신앙에 도전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상처를, 더 큰 상처로 절망하는 이들의 아픔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배려의 신앙’은 그 고통의 타자를 치료하려 애쓰면서 스스로의 아픔으로부터도 구원받는다. 예수라는 신의 화육의 교훈은 희망을 가리는 악마의 그림자를 거둬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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