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회보](2005.12)에 실린 글. 같은 글을 [맘울림](2005)에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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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 교회는 있는가
고통의 문화정치학과 선교
회사원 K씨는 내년에 45세가 된다. 또래에 비해 다소 앞서간 성공적인 이력 덕분에 다른 이들보다 조금 일찍 중견간부가 됐고, 그 탓에 적지 않은 견제를 받기도 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잘 버텨왔다. 그가 회사의 내밀한 정보에도 다소 밝은 편인 것과 그의 성공적인 이력은 상호 교환적이다. 그런데 최근 알게 된 회사의 기밀 정보에 따르면 그는 내년에 실직하게 될 가능성이 꽤나 높다. 하여 그는 ‘사오정’(‘45세 정년’을 뜻하는 셀러리맨의 자괴적인 속어)의 예감된 공포 속에 연말을 보내고 있다.
외동딸이 내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아들을 외국에 조기유학 보냈다는 동창 친구의 ‘세계화 시대의 생존전략’ 운운하는 말이 어느 때보다 실감 있게 들린다. 아내는 재작년에 수술한 후유증에 아직 시달리고 있다. 아내의 거동을 배려하느라 작년에 이사 온 아파트의 대출금이 아직 많이 남았다. 대학교 이후 도움 받은 것은 거의 없지만, 농사짓는 고향의 노부모께도 불규칙적이나마 부조를 해야 한다. 처가 쪽으로도 목돈을 지출해야 할 몇 건이 떠오른다. 가장이라는 자의식이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가족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그의 이러한 정체성은 실직의 예감을 더욱 공포스럽게 한다. 이제 그의 행동전략은 이 불길한 예감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놓인다. 시간 활용, 대인 관계에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이 재설정되고, 일상은 삶의 질보다 투자가치를 중심으로 재조직된다. 자신과 가족이 살아남는 것만이 최우선이며,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그의 생존전략과 배치된다는 강박에 둘러싸인다.
최근 한국사회의 자살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자살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지난 2005년에는 10만 명 중 26.1명이 자살을 선택했다. 24.1명으로 다소 감소한 2007년 통계에서도 여전히 OECD 최고인데, 최하 그리스(2.9명)와 비교하면 8배를 넘는다. 그런데 자살을 포함한, 40,50대 남성 사망률이 동세대 여성 사망률보다 거의 세 배나 높다는 점이 주목된다(다른 나라들은 거의 엇비슷한 수준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가족주의의 강화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내가 보기엔 이 견해는 좀 더 섬세하게 논구돼야 한다.
한국 사회는 근대화 과정에서 줄곧 강한 가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고도 성장사회의 불안정성을 해소해왔기 때문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과, 그의 조력자인 아내, 그리고 부모에게서 역할에 따른 책임감과 근면함을 배우는 자녀들, 이런 모범형을 따라 가족은 구축되었고, 고도성장을 질주하던 한국의 산업화는 그로 인한 불안정성을 완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단순한 가족주의의 강화라는 말로 최근 40,50대 남성 사망률의 특징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가족로망스’가 한국 사회의 남성의 무의식적 자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로망스란, 정신분석학의 태두인 프로이트의 용어로, 현실의 아버지를 거부하고 보다 강한 이상의 아버지를 욕망하는 신경증을 가리키는 것인데, 한국사회의 급속한 산업사회화와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가 서로 친화적으로 작동했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종종 활용된다.
산업화가 사회관계 전반에 걸친 변화를 야기한다는 관점에서 그러한 사회 제도 전반의 산업적 재구성 과정을 ‘산업사회화’라고 말한다. 그런데 산업사회화는 전통적인 강한 가족주의를 해체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호령하는 전통적 아버지’는 해체되고, ‘다정한 근대적 아버지’가 탄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산업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든 경우에 가족주의를 재강화한다. 그것은 ‘남자’보다 ‘아버지’가 노동생산성이 높고 사회 변화에 대해 소극적이며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해서 ‘아버지’라는 역할은 여전히 강화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다정한 근대적 아버지’상은 가족과 보다 대화적일지언정 보다 존경스러운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는 여전히 존경스러운 아버지상을 강조하지만, 집에서 마주치는 아버지는 다정하기는 하나 존경스럽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산업적 질주가 요청되는 사회는 현실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아버지, 강한 카리스마의 아버지를 열렬히 욕망하게 된다. 바로 권위주의 체제의 탄생은 이런 맥락과 관련된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대두한 군부 권위주의 체제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한국사회에서 가족주의와 국가체제 사이의 내적인 강한 상호 영향관계를 가리켜 어떤 비평가는 ‘가국(家國) 체제’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민주화’와 세계화, 특히 소비사회화는 사회 전반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철회’시켰다. ‘이상의 아버지’든 ‘현실의 아버지’든 예외 없이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버지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의 가족 부양의무는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소비사회로 발전하면서 지출 규모는 급속히 켜졌다. 시장은 주로 여성층과 자녀 계층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다양한 유혹의 손길을 건넨다. 하여 여성과 아동, 청(소)년에게 자기만의 취향을 개발하도록, 왕성한 소비의 포식자가 되라고 속삭인다.
이제 이들은 가부장사회의 하위주체가 아니다. 감성의 전문가가 되었으며, 감성 표현은 자아의 특권이 되었다. 반면 20대에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30대를 거쳐 40, 50대의 연령이 된 남자들은 1년에 영화 한 편 볼 줄 모르고, 동료들과 술자리를 하지 않으면 딱히 갈 곳이 없는 자가 되어버렸다. 공적인 노동 현장에선 협상의 전문가이지만, 사적인 취향의 공간에선 무능력한 존재가 된 것이다. 문제는 소비사회는 감성의 전문가를 우대하는 반면, 취향의 표현에 둔한 센스 없는 존재를 조롱하는 가치를 확산시킨다는 데 있다. 하여 오늘 한국사회에서 가장인 중년남성은 더 이상 ‘권위 있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 자리는 스포츠스타와 스크린스타로 대치되었다. 존경하는 ‘아버지’는 거세되고, 사랑스런 ‘오빠’가 들어섰다.
게다가 소비사회를 동반한 세계화의 광풍은 노동시장에 잔인한 회오리 폭풍을 일으켰다. 이미 퇴출된 이거나 비정규직으로 밀려난 이들 뿐만 아니라 위의 K씨처럼 비교적 성공적인 셀러리맨도 ‘잉여인간’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소비사회의 폭식가들로 발전한 가족을 위해서 아버지가 되어야 하고, 무한경쟁의 세계 속에서 경쟁력 있는 자녀를 만들기 위해 또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철회된 공간에서 재강화된 가족주의는 여전히 ‘아버지의 귀환’을 외친다. 대안적 아버지상은 없는데, 아버지는 다시 소환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40,50대 남성이 처한 위기의 양상이다. 강화된 가족주의 담론의 충실한 순응자인 그들은 그 담론이 요구하는 이상적인 아버지가 되기 위해 질주한다. 하지만 아무리해도 성공할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아버지다워야 한다’는 자의식은 과거의 아버지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나,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소비사회의 가치에서나 민주화의 가치에서나 그들은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권위 있는 자리를 배정받을 수 없으며, 그것을 부정할 내적인 자의식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런 딜레마는 그들을 소외감에 빠뜨린다. 세계화 시대 한국사회의 가족주의의 강화는 그러한 담론의 핵심 추동세력인 40,50대 남성 자신을 소외감에 빠지게 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사망률은 급상승한 것이다.
세계화 시대 한국사회는 고통이 넘쳐난다. 실패자는 물론이고, 아직 실패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이들도 고통스럽다. 이런 고통은 또 다른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중에서 내가 이 글에서 주목한 가족에서의 ‘아버지’ 역할에 대한 혼란도 가족 간의 심각한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더 이상 현모양처로만 자기를 주체화할 수 없는 아내들은 인정투쟁에 돌입했다. 또 어른들에 의해 규정된 ‘착한 아이’이기를 거부한 자녀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감성 표현이 풍부한 이들에 비해 둔한 감성의 소유자인 아버지는 대화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종종 가정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사람들의 일상과 만나고 있다. 세계화의 거센 풍랑을 교회가 마주치는 주된 지점은 바로 가족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다. 한데 과연 교회는 그들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급속한 산업화의 주된 동맹세력으로 신앙이 제도화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에 문제를 느낀다.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듯이, 한국교회는 발전주의를 제도화시켰다. 성공을 욕망하며, 성장률 10%대의 변화를 일상처럼 체감하는, 우리사회의 마지막 제도로 남아있다. 이런 준거에서 ‘성장의 정체’는 퇴보이며, 신앙의 위기로 느낀다. 또한 이런 준거에서 실직은 불신앙의 대가이며, 사회적 성공은 신앙제도에서도 보상을 받는 조건이 된다.
물론 교회의 성장주의는 ‘권위 있는 큰 아버지’에 대한 욕구와 맞물려 있다. 이른바 위에서 말한 가족로망스라는 집단신경증세가 마치 교회의 정상적인 신앙인 듯이 받아들여진다. 강한 카리스마의 목사는 이상적 아버지상의 모사체다. 그리고 장로들과 목회자로 구성된 교회의 엘리트 집단은 그러한 보수적 아버지상의 수호자처럼 신앙을 조직하고자 하는 이들처럼 비춰진다. 개개인의 품성과는 관계없을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사회에서 교회는 아직도 거세된 아버지가 없는 사회를 지탱하는 집단처럼 존재한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아직 현실이 아니며, 민주적 대화공동체는 불신앙의 징후처럼 여겨진다. 벌써 민주주의에 대한 민감성이 높은 사람들은 이런 반민주적 공간에서의 철수를 시작했다. 점점 교회는 보수주의의 아성처럼 되어가는 듯이 보인다.
나는 세계화로 인한 고통의 시대에 대항하는 교회의 행보에서, 권위 있는 아버지상의 철거가 우선적이라고 확신한다. 군림하는 신앙적 장치들을 절대시하며, 마치 그것이 신앙의 본질인양 떠벌리는 것은 예수님과는 다른 길을 간 결과라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 자신은 군림하는 신의 자살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앙제도 속의 가족로망스적 욕구를 스스로 치유해야 한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권력에 집착하는 집단적 질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남성들에게 ‘강한 아버지’보다는 가족과의 ‘친밀한 대화의 파트너’가 되라고 권고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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