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안](2005.09.17)에 실린 글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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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거해도 좋은 대상, 망각해도 좋은 기억
살인제도 존폐 논쟁에 대한 하나의 성찰
지난 8월 19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산하 신학연구위원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이 열렸다고 한다. 원고로만 이 행사를 접한 탓에 그 현장의 생생함을 알아차릴 도리는 없지만, 기조연설과 네 개의 발제 그리고 네 개의 논평으로 구성된, 숨막히게 진행됐을 법한 팍팍한 연구발표회라는 느낌이 든다. 분야별 분류가 상투적이어서(성경신학적, 조직신학적, 교회사적, 실천신학적 관점) 각 원고들 간의 응집력이 다소 기계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내용 기획의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심포지엄의 질이 낮은 것은 아니니만큼 미리 판단할 것은 아니다. 사실은, 하루 일정의 심포지엄에서 9명이나 되는 발표자와 논평자를 둘만큼 주최 측의 적극적인 담론화의 의도가 엿보인다.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 중에서 좋은 인상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어서,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자료집을 검토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최 단체가 한기총이라니, 뭐 별 얘기가 있겠나 하는 선입견을 강하게 갖고서 짜증스런 독서를 시작했다. 거의 200자 원고지 9백매에 달하는 방대한 양에 빼앗길 시간을 환산해가며 읽으려니 켜켜이 쌓인 다른 과제들이 갑자기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듯했다. 황금 같은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을 소비했다. 밀도 있는 두어 편의 글들의 위로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이들 두어 편의 글은, 비록 견해는 꽤나 다르지만,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내게 흥미로운 대화를 걸고 있었다.
이 심포지엄의 제목은 ‘사형제도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이다. 주제만 보면 뭘 말하려는지 글을 안 봐도 알만한 것이겠다. 한기총이 준비한 것이니 말이다. 자료집의 서두에 실린 심포지엄 배경에 관한 글에도 약간 언급돼 있듯이, 올 2월에 유인태 의원 등 175명의 국회의원이 발의한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이 6월 이후 심의되기 시작했고, 4월에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에 제출한 ‘사형제 폐지 권고안’이 국회의 법안 심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교회의 반대견해를 표명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바로 이 심포지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이 심포지엄이 있은 지 한 주 후인 8월 26일에 한기총은 성명서를 통해 사형제도 존치를 교회의 공식입장으로 선언하게 된다. 물론 심포지엄에서 발표됐던 글들 중 일부에서 엿보인 신중한 태도 같은 건 별로 없는, 단순 논리로 점철됐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즈음에 대법관, 헌법재판소 위원, 대법원장, 검찰총장, 법무부 등등이 줄줄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고, 제야법조인 단체들, 시민단체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도 의견을 제시하였으니, 사형제 폐지를 둘러싼 논쟁은 2005년 한국사회의 주요 화두의 하나임에 틀림없고, 가장 규모가 큰 한국교회 연합 기구가 이에 대한 의견을 표명한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기독교 내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덕분에 소식에 늦은 내게도 알려졌고, 벌써 잠잠해진 느낌이지만 뒷북치듯 한 마디 할 기회가 찾아왔다. 물론 논쟁들을 검토해보니 이미 중요한 논점들이 많이 오갔다. 서로 간에 이어지는 더 많은 대화가 없고, 대화를 피드벡하는 소통의 제도화가 마련되지 않은 탓에 논의는 지극히 평면적이었지만, 논쟁을 따라가며 생각의 깊이를 점검해보는 이들로서는 평면적이라 하더라도 논쟁 기록을 검토하는 것만으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이기도 한 이 글에서 나는 내가 들은 것들 속에 특히 간과되고 있다고 보이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평소의 나의 지론이기도 해서 그것만 보였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기왕의 논쟁들 속에 결핍된 것으로 보이는 문제를 얘기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제거해도 좋은 대상, 망각해도 좋은 기억’이라고 이름 붙였다.
치명적인 죄를 저지른 이를 사회는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우리의 신앙은 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요청하고 있을까? 한기총의 공식 견해는 그들을 사형으로 처벌하는 것은 성서나 교회의 전통에 따라 정당하다고 주장하지만,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폐지 반대론 가운데 잘 준비된 견해들은 성서나 교회의 전통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다. 즉 성서나 교회의 전통은 간명한 합의의 선례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 ‘성서적 전거’를 들먹이며 논쟁을 하는 것은 그다지 쓸 만한 토론이 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유의 논의는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성서 구절들을 임의로 선택한 결과에 지나지 않다.
‘하느님의 정의’를 택할 것인가(사형제 존치론) ‘하느님의 사랑’을 택할 것인가(사형제 폐지론)의 문제는 성서 텍스트 내부에서는 자명하게 답을 얻어낼 수 없다. ‘정의 대 사랑’이라는 시각에서 성서의 중심점 문제를 사고하는 것은 지나친 자의적 이해를 개입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문제설정인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존치론자들은, 심지어 보다 비평적인 성서 독법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다수의 폐지론자들조차도, 성서를 언급할 때는 이상하게도 단순한 사고에 압도되는 듯이 보인다. 성서는 이 두 주제를 하나로 엮는 명쾌한 해답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정의와 사랑이라는 가치는 상대개념을 위기에 빠뜨리지 않고서는 좀처럼 자신을 정립시킬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결과다. 하나를 결정적 위치에 놓고 다른 하나를 그것에 부가되는 요소로 편입시킴으로써만 양자의 공존은 가능한데, 이 경우 부수적 위치로 전락한 가치는 실상 그 본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무혐의한 이들만 사랑을 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면 하느님의 정의는 공의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한데 문자주의적으로 성서를 보지 않고, 그 역사적, 문맥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살필 경우 더욱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정의냐 사랑이냐는 이분법이 성서 독법으로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라고 해도, 지배자적의 시선에서 보는 정의가 있을 수 있고, 고난당하는 이의 시선에서 제기되는 정의가 있을 수 있다. 나그네였던 족장들은 지역의 왕들 앞에선 고난당하는 이의 시선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갈망하지만, 자신들의 아내나 자식, 나아가 종 앞에선 지배자적 시선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들먹인다. 물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문자주의자들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성서에는 정의냐 사랑이냐 식의 이분법으로 그 의미를 단순화시킬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맥락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터무니없이 문자주의적 태도로 ‘성서 말씀’ 운운하는 것은 사형제 폐지나 존치 주장의 타당성 있는 논거가 될 수 없다. 아니 실은 이런 식의 성서 읽기는 어떤 신앙적 근거도 끌어댈 수 없다.
한편 존치론을 지지하는 한 신학자는 ‘범죄자의 시각’에서 볼 것인가 ‘희생자의 시각’에서 볼 것인가를 묻는다. 이 주장은 폐지론자들이 종종 인권 중심의 시각이냐 질서 중심의 시각이냐를 물으면서 존치론을 비판하는 것을 고려한 발언으로 보인다. 요컨대 폐지론자는 ‘범죄자의 인권’만 주목한 나머지 그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의 인권을 망각한 것이라는 얘기다.
한데 이런 식의 관점은, 사회는 범죄자와 희생자 사이의 불행한 사건의 발생원인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전제한다. 달리 말하면 범죄는 죄를 지은 가해자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이겠다. 이것은 범죄에 대한 사회적 대책에 대해 범죄자 개인의 처벌 이상을 생각할 수 없게 한다. 마찬가지로 범죄 사건을 다루는 사회적 담론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자나 범죄자 가족들의 고통 문제를 범죄자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의 소산이라고만 이해하게 한다. 범죄자의 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에 사회가 연루되어 있다는, 이미 더 이상 논거를 끌어대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 사형제도가 범죄 예방 효과가 있는지의 문제, 그리고 사형제도로 인한 무고한 희생의 문제도 존치와 폐지 논의의 중요한 논점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논의들 역시 관점에 따라 제각기 자기들의 주장에 유리한 정보들을 편파적으로 활용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물론 사형제 폐지론과 존치론을 둘러싼 현행의 논쟁이 무가치하다는 얘기를 하고자 했던 건 아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이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좀 더 세공될 필요가 있었다는 나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교회도 의당 이 주제에 개입해서 사회적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 또 아직은 소통 메커니즘의 부재로 인해 대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논의 과정에서 성찰적 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한기총 심포지엄에 실린 글에서 내가 받은 나쁘지 않은 인상은 그러한 글들 두세 편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내가 이 글에서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논쟁의 ‘밖’을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에 있다. 이 논쟁 내부에서 논평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논쟁 과정에서 잊고 있는 것을 또한 발견해야 한다는 얘기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른 이와 그 희생자의 문제로만 사형제도를 환원시켜 생각하는 습관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범죄 속에 담긴 고통들은―범죄자의 고통이든 희생자의 고통이든 혹은 제3자의 고통이든―원인이나 그 담론화 과정에서 범죄의 직간접적인 당사자를 넘어서 보다 폭넓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특히 사형제도 찬반 논쟁을 우리는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사형제 논쟁 자체보다는 그 담론화에 얽힌 대중의 소비 양식, 특히 그 정신 구조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영철을 떠올려 보자. 무려 21명의 부녀자를 살해한 자다. 그런데 그의 진술들이나 그가 남긴 글들을 통해 익히 알려진 사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그는 세상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다. 왜냐면 세상이 자신을 너무나 괴롭히고 있다고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에게 암초였고, 번번이 그를 수렁 속에 밀어 넣었다. 문제는 이 증오가 그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고통의 원흉인 세상 자체를 향해 표현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가해자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특정한 이가 해코지한 결과라기보다는 세상의 구조 속에서 그는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응징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그의 복수심은 한계에 달했다. 그는 자신을 억제할 내적 수단을 상실했다.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사회는 그의 복수심을 통제할 동기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선택했고, 자기가 판정한 그들의 잘못을 응징했다. 이때 그는 가해자의 자리에서 희생자를 보고 있다. 그에게 닥친 고통을 볼 땐 희생자의 시선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그의 응징은 사형이었다. 가해자의 시선에서 그런 판정을 내릴 때 그다지 망설이거나 가슴 아파하지 않은 것처럼, 그 또한 이 되돌이킬 수 없는 응징 방법을 쉽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에게 이들 희생자들은 ‘제거해도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즉 죽어 마땅한 자들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세상을 향한 자신의 분노를 맘껏 해소한다. 그러나 분노는 해소되지 않는다. 왜냐면 그를 괴롭히는 세상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고, 그럴수록 그는 거듭되는 응징을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유영철의 심판 행위는 우리의 시민사회의 그것과 너무나 닮았다. 사형제도를 둘러싼 담론 소비 방식의 관점에서 유영철은 우리 사회의 은유인 셈이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고통스러워한다. 산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수없이 쓰러져간 주변 사람을 바라보며 대중은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저주의 칼날을 예감하며 공포 속에 산다. 그 예고 없는 칼날을 피하려고 쉴 새 없이 달린다. 이럴 경우 대중은 흔히 지배층을 떠올린다. 자신들이 예감하는 그 공포의 원인이 바로 저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대중은 저들을 향해 분노한다. 물론 저들이 대중의 고통에 관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지배층에 대한 이러한 분노는 고통의 인과관계에 대한 성찰의 결과라기보다는 현재 누리고 있는 특권의 차이로 인한 상실감에 대한 단순한 분노에 지나지 않다. 이럴 때 대중은 어떻게 복수를 실행에 옮길까.
‘희생양 이론’은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 무력한 자가 희생양으로 선정되고 그들에게 상징적인 복수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보신욕망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자신의 고통을 몸이 훼손됐다는 생각과 동일시하면서,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보신음식을 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보신음식의 대상이 무의식적으로 소비자의 복수의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토록 그 희생물을 가학적으로 조리해서 먹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희생양을 소비하는 방식 중에 특정한 것을 ‘악마화’하여 복수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가령 한국전쟁 이후 기독교는 수많은 이단들을 낳았다. 교회간 분열 양상이 병적으로 퍼져나간 것도 바로 전후 한국 사회의 상황에서였다. 상상할 수 없는 저 고통을 기억하기엔 너무 벅찼기에 사람들은 분석보다는 증오를 선택했다. 한데 그들이 쏟아 부어야할 분노가 분단된 저 편의 ‘악마들’을 향할 수는 없다. 그러기엔 너무 멀다. 다른 누군가가 필요했다. 이때 교회는 이단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삶의 수단으로 선택한 사람의 수는 소수다. 교회의 신앙은 또 삶의 전체를 대변하기에는 너무 국한된 영역만을 관장하고 있었다. 해서 사람들은 다른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 체제는 그들에게 악마적 희생양을 선별해 주었다. 그들이 바로 공산주의자였다. 사회는 그들을 향해 분노를 폭발적으로 쏟아 부어야만 그 처절한 고통을 망각할 수 있었다. 이 망각은 성찰을 빼어갔다. 대신 체제가 선사해준 ‘제거해도 좋은 대상’을 향해 분노를 퍼부었다.
전쟁 같은 비상한 상황이 아닌 시대에는 연쇄살인범, 존속살해자 등과 같은 이들이 악마로 선택된다. 특히 연쇄살인범은 악마적 요소를 안성마춤으로 가진 존재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것처럼 영·유아 연쇄살인범은 더욱 철저히 악마적 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선 그를 늑대와 동일시하는 영상을 보여준다.
해서 대중은 그 악마에게 복수를 수행한다. 사형 집행은 〈친절한 금자씨〉처럼 복수자들이 직접 형을 집행할 필요 없이 국가가 대신 그것을 실행에 옮겨준다. 그러니 대중의 복수는 깨끗하다. 그 제거해도 되는 존재를 피 안 묻히고 깨끗하게 제거하는 것이다. 허나 이 깨끗한 복수의 약점은 강도가 약하다는 점이다. 강도가 약하기에 복수를 성찰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자유롭다. 동시에 깨끗한 복수는 또 다른 복수가 필요하다. 사형이 일회적일 수 없듯이, 대중은 끝없는 잔혹범죄를 필요로 하며, 그들을 처형하는 체제의 단호함을 요청한다.
곧 사형제도는 시민사회의 무정형적인 복수심을 문제의식 없이 표출하게 하는 장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유영철이 혼동했던 것처럼, 시민사회도 그 복수의 쾌감은 자신의 ‘고통이 망각된, 그리하여 그 성찰이 망각된 결과’라는 것이다. 성찰 없는 고통은 타인에게 복수심으로 전가된다.
바로 그러기에 나는 사형제를 소비하는 우리의 욕망 구조에 주목한다. 나아가 우리의 신앙적 성찰은 이러한 복수의 욕구를 ‘단’하는 그리스도를 기억함으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체제의 숱한 잔혹행위를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단 한 번’만의 죽음으로 그 모든 것을 끝내기를 기도하는 〈히브리서〉저자의 신앙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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