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교회 2009.12.20자 하늘뜻나누기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웹진 <제3시대>(2009 12 20)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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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에스바알
넬은 기스를 낳고, 기스는 사울을 낳고,
사울은 요나단과 말기수아와 아비나답과 에스바알을 낳았다.
―〈역대기상〉 8장 33절
〈사무엘기상〉 14,49에서 사울의 자녀는 3남 2녀다. 세 명의 아들은 요나단, 이스위, 말기수아이고, 메랍, 미갈이 딸이다. 여기서 이스위라는 이는 오직 이곳에만 나온다. 31,2에는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 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한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데, 요나단, 말기수아, 아비나답이 그들이다. 그리고 〈사무엘기하〉 2,8에는 사울의 다른 아들 하나가 생존하여 부친의 권력을 승계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이스보셋’이다. 한편 〈역대기상〉에서는 세 구절에서 사울의 아들 명단이 나오는데, 한결같이 요나단, 말기수아, 아비나답, 그리고 에스바알, 이 네 명이다(8,33; 9,39;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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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 딸 | ||||||
〈삼상〉 | 14,49 | 요나단 | 이수위 | 말기수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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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랍 | 미갈 |
31,2 |
| 아비나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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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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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보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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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상〉 | 8,33 | 요나단 |
| 말기수아 | 아비나답 | 에스바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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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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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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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단들을 통해 볼 때 요나단과 말기수아는 늦어도 〈사무엘기〉와 〈역대기〉가 만들어진 유다국과 유대 귀환공동체 시대, 즉 기원전 7세기 이후에는 사울의 아들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두 문서에 공히 나오는 아비나답 역시 사울의 아들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스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문제는 이스보셋(Ish-bosheth)과 에스바알(Esh-báʻal)이다. 에스바알은 〈역대기〉에 세 차례나 언급되어 있고, 이스보셋은 〈사무엘기〉가 사울의 권력을 승계한 인물로 한동안 다윗과 경쟁자로 여러 차례 묘사하고 있는 자다. 요컨대 이 두 문서는 각각 이 두 이름에 관해 양보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이스보셋은 ‘수치스러운 자’라는 뜻의 이름이다. 여기서 수치스럽다는 뜻의 ‘보셋’은 군주제 시대가 절정에 이르던 기원전 8세기 호세아 예언자의 신탁에서 바알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사용된 단어다(〈호세아서〉 9,10).
내가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너희 조상을 처음 보았을 때에, 제 철에 막 익은 무화과의 첫 열매를 보는 듯하였다. 그러나 ‘바알’브올(Baal Peor, 브올 지역의 바알)에 이르자, 그들은 거기에서 ‘그 부끄러운 우상’(보셋)에게 몸을 바치고, 우상을 좋아하다가 우상처럼 추악해지고 말았다.
이스(Ish)와 에스(Esh)가 ‘사람’이라는 뜻의 변형체라면 에스바알은 ‘바알에 속한 자’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보셋과 에스바알은 동일인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자, 그러면 이 두 이름 중 어느 것이 사울의 넷째 아들의 진짜 이름이었을까. 그는 아들의 이름을 ‘수치스러운 자’로 했을까, ‘바알에 속한 자’라고 했을까?
실은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성서 속에 바알이 이름의 일부로 사용된 것은 대개 이방통치자의 이름이거나(시돈왕 엣바알 1; 에돔왕 바알하난; 암몬왕 바알리스), 사울과 관련된 이름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삼촌 바알; 요나단의 아들 므립바알). 그렇다면 에스바알이 사울의 넷째(?) 아들의 진짜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편 유다국 왕실사관의 저작인 〈사무엘기〉에서 이스보셋으로 표기된 것은 필경 나라의 시조인 다윗의 경쟁자였던 이를 경멸적으로 묘사하려 했던 결과일 것이겠다. 반면 다윗의 나라인 유다국이 몰락하고 식민지 시대에 저술된 문서인 〈역대기〉는, 비록 그 저자들이 유다국의 후손들이겠지만, 시대 정황상 사울을 특별히 경멸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 이름으로 익히 알려져 있던 에스바알로 그의 이름을 표기하였다고 하는 게 보다 타당한 상상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울의 시대로 돌아가 보자. 그러니까 〈사무엘기〉의 최초본이 저술된 시대인 기원전 7세기경이나 〈역대기〉가 저작된 기원전 5세기경이 아니라, 사울이 살았던 기원전 11세기의 시대로 가서 그의 이름에 대해 상상해 보자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울의 집안에는 바알이 포함된 이름이 유난히 많다. 그의 삼촌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바알’이었다.(〈역대기상〉 9,36) 아마도 실제 이름은 ‘바알××’이거나 ‘××바알’이었는데, 그 기억이 사라지고 바알만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또 그의 아들 요나단은 자기의 아들을 ‘므립바알’로 지었다.(〈역대기상〉 8,34)
기브온의 조상 여이엘은 기브온에 살았으며, 그 아내의 이름은 마아가이다. 그 맏아들은 압돈이고, 그 아래로 수르와 기스와 바알과 넬과 나답과 그돌과 아히요와 스가랴와 미글롯이 있다.
― 〈역대기상〉 9,35~37
요나단의 아들은 므립바알이며 므립바알은 미가를 낳았다.
― 〈역대기상〉 8,34
한데 그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영웅인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집안의 수호신이 ‘바알’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사사기〉 6,32) 바알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거의 전 지역에서 나타나는 신으로, 수많은 지명에 바알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보건대(갓바알, 바알스본, 바알브올, 바못바알, 바알브몬 등등) 이 지역의 여느 신보다도 폭넓게 받아들여지던 신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지역 유지는 마을 혹은 씨족 수호신의 상징물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기드온의 집안에 바알 신상이 있었다는 것은 그의 가문이 자기 씨족을 이끄는 집안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지파동맹 시대에 이스라엘 부족들의 연합을 이끄는 신은 야훼였다. 하지만 씨족의 일상에서 중요한 신은 야훼가 아니었다. 가령 야훼가 사람의 이름 속에 들어간 것으로 널리 사용된 것은 왕국시대 말기에 와서다. 가령 유다국의 마지막 왕들인 ‘요’시아 왕과 그의 아들 ‘여호’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 그리고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 등이 그 예다. 인명을 연구한 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왕국시대 말기를 반영하는 이름들의 70~80%가 ‘야훼’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여호수아’처럼 지파동맹 시대에 야훼가 이름에 들어가 있는 것은 지파동맹의 지도력을 상징할 때가 대표적이다. 즉 일반적으로 야훼는 동맹을 상징하는 신이지 일상의 신은 아니었다. 그런 맥락에서 사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즉 그에게도 야훼는 동맹의 신이고, 일상의 신은 다른 존재, 아마도 바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블레셋이라는 전대미문의 강력한 세력의 팽창에 맞서 지파동맹을 이끄는 지도자로 부상한 인물이다. 물론 그는 지파동맹 가운데서도 유력한 부족의 하나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그중에서도 대표 가문의 후예였다. 하지만 동맹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부족은 에브라임 지파였다. 이 부족은 외적으로 군주국의 위협을 막아내는 동맹의 중심일 뿐 아니라, 내적으로 권력의 집중을, 하여 군주국화될 여지를 억제하는 일종의 경찰족속의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길르앗 족속의 입다와 에브라임 부족 사이의 전쟁을 묘사하는 〈사사기〉 11~12장이나 벤야민 지파의 기브온 족속과 에브라엠 부족의 전쟁을 얘기하는 17~21장은 바로 이러한 에브라임 지파의 경찰권을 둘러싼 내적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둘은 모두 지파동맹 사회의 말기 상황을 반영한다. 아무튼 에브라임 대 벤야민(특히 기브온 씨족)의 전쟁에서 크게 피해를 입은 벤야민 지파의 기브온 족속의 후예가 사울이었다. 상상을 더 해 본다면, 그의 장인의 이름이 아히마아스인데, ‘분노의 형제’라는 뜻이다. 그것은 어쩌면 기브온 족속이 겪었던 내전의 고통이 그 이름 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블레셋의 제국적 팽창주의로 인한 위기를 맞아 기브온 족속의 지도자 사울은 이스라엘 지파동맹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아마도 저 위기의 심각성과 비례하여 유일한 대응능력을 갖춘 그의 세력은 그를 일종의 초기 군주적 존재로 부상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자기의 권력을 승계할 맏아들의 이름을 요나단, 즉 야훼의 이름을 담는 것으로 지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가 이제 벤야민의 씨족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추장이라고 말이다.
한데 야훼의 권력을 주장하는 그가, 첫째 아들을 야훼의 이름이 포함된 요나단으로 불렀음에도, 그 동생들 중 하나를 ‘바알’이 들어 있는 이름인 에스바알로 지었다. 필경 그것은 자기 가문을 추종하는 대중의 신을 계속 섬기겠다는 뜻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알을 부정하고 오직 야훼만을 섬기는 것, 그러한 전향을 야훼신앙의 핵인 것처럼 생각하는 편견과는 다른 방식의 신앙이 초기 야훼신앙의 전통이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요컨대 지파동맹의 시대, 야훼신앙의 원초적 형태가 형성되고 그 정신에 따라 군주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기조가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견지되던 시대에, 그 동맹의 신 야훼는 다른 신들과 공존했다. 동맹에 함께한 공동체들은 야훼와 함께 공존한 이 신‘들’과 함께 생활을 나누고 기억을 나누고 꿈을 나눔으로써 ‘초기이스라엘 공동체’라는 평등주의적 사회를 구현했던 것이다. 신들 간의 화해, 아니 공존이 지파동맹 시대 이스라엘의 신앙이고 삶의 토대였다.
최근 한국교회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주제는 ‘종교다원주의’ 혹은 ‘혼합주의’ 문제다. 이 두 용어는 한국교회에서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며, 일종의 우상숭배의 주된 양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 교회가 오랫동안 한국에서 전가의 보도로 사용한 내부 통제의 주요 수단은 ‘반공주의’였다. 물론 아직까지도 반공주의는 매우 중요한 교회주의적 인식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은 많은 신자들에게 과거만큼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반면 종교다원주의 혹은 혼합주의에 대한 강박적 배타성의 칼날은 최근 들어 전에 비해 훨씬 날카롭게 살기를 번뜩이고 있다. 혐의 있는 학자를 교수직에서 면직시키고 사상검증기구를 만들어 연구 활동의 자유를 제약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리고 지난해 그 독살 같은 날은 또 다른 누군가를 베고자 허공을 가르며 살기어린 바람을 일으켰다. 지난 2008년 5월 20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생명의 강 살리기 종교여성공동기도문〉을 둘러싼 논란은 그 빈번한 사례의 하나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등 4대 종단의 여성 종교인들이 정부의 대운하 정책안에 대해 반대하고 살림의 강물로 지켜나가겠다고 다짐하는 공동의 신앙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1년도 더 지난 2009년 9월 말 느닷없이 보수주의 교회지도자들에 무차별 포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4대 종단 종교인들이 함께 작성한 것으로, 추상적인 연대가 아닌, 구체적 사안을 중심으로 종단간 여성 지도자들이 공동 의견을 함께 개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각 종단간 예전의 형식이나 표현방식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 생태공동체로서의 한국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종교간 대화의 한 틀을 제시한 것이다. 하여 각 종단의 전통적인 신앙 양식의 시각에서는 적지 아니 낯설고 문제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생태 공동체로서 서로 연대감을 갖고자 한다는 취지에서는 그 낯설음이 도리어 자기 중심주의를 넘어서 삶을 나누고 꿈을 나누는 기억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도문은, 비록 그 구체적인 주장에 동의하든 않든, 존중받아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한데 한국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그네들은 몇몇 표현을 빌미로 그 기도문의 의의 전체를 폄하했고 심지어 그 기도문의 공동작성자들을 모욕하고 정죄했다. 물론 그 몇몇 표현이란 공동기도문의 형식에서는 불가피했던 것들이다. 아래에 인용된 그 전문을 참조하라.
생각 없이 흩어져 살던 우리를 부른 것은 당신입니다.
고속의 기계덩어리에서 내려 맨발로 걸어오라, 짓궂게 부른 것도 당신입니다.
서러운 비수 하나 가슴에 품고, 견디며 삭히며 흘러왔건만
백두대간 몸통을 가르는 죽음의 대운하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당신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유언처럼 간곡히 부르십니다.
오, 하느님, 부처님!
살려 달라 매달려야 하는 건 우리 자신인데,
거꾸로 당신이 우리를 향해 애원하시다니요?
무력한 당신, 한없이 작은 당신, 아직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당신,
한 중생이라도 더 구제하기 위하여 극락 언저리를 서성대는 당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래로 아래로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은 바로
당신의 눈물입니다,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모든 창조물은 당신의 선물,
천지에 어느 것 하나 당신의 모태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온 우주만물에 깊이 새겨진 하느님의 흔적,
부처님 말씀하시기를, 세계가 한 송이 꽃이라 했거늘,
분별심을 내어 저 강물의 숨통을 틀어막는 자 누구입니까?
더 잘 살려는 무조건적 욕망, 더 많이 가지려는 부질없는 바람,
빠르게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 것만이 능사라고 부추기는
거짓진리에 속아 당신을 배반해온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무릇 사람은 어머니 뱃속 양수에서 유유히 헤엄치다가 세상에 나옵니다.
사람의 한 생에 온생명의 계통발생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그랬습니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 없이는 생명도, 문화도, 역사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 갸륵한 생명의 순환이 예서 끊어지지 않도록,
오고 올 세대 역시 강물 따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살림의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인디언들은 사람 다니는 길에서 바윗돌 하나를 치울 때조차도
그것이 일곱 세대 후에 미칠 영향을 따져본다고 합니다.
말을 타고 부지런히 달리다가도, 문득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조급증에 걸린 우리, 이러한 인디언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강물의 리듬에 맞추어 천천히 걷노라니,
편의주의와 실용주의와 이기주의의 삼독(三毒)에 찌든 우리의 자화상이 떠오릅니다.
하늘의 뜻쯤이야 가볍게 능멸하고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양 으스대는
우리의 오만방자함이 가슴을 찌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명 걸음 걸음마다 참회의 눈물을 뿌립니다.
이 눈물이 바리데기 생명수 되어 죽어가는 어머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눈물샘인들 파지 못하겠습니까?
종교는 달라도 진리의 뿌리는 하나,
만물이 한 배(胚)에서 나와 한 사랑을 먹고 사는 식구(食口)요 생구(生口)인 것을 믿습니다.
생명의 강을 모시는 일은 나를 모시는 일이요, 너를 모시는 일입니다.
녹색별 지구를 살리는 일이요, 만물의 어머니를 살리는 일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님과 소태산 대종사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一心)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신기루일 뿐,
모두가 골고루 가난해지는 것만이
생명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선택인 것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이제 4대 종단의 종교여성들이 가부장적 개발의 망령에서 벗어나
사랑과 자비, 정의와 평화가 한 데 어우러지는
후천개벽의 새 세상을 열기로 결단하오니,
모쪼록 이 믿음의 싹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지키고 돌보아 주십시오.
받들어 비옵나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멘.
한데 1년도 더 지나서 제기된 이 뜬금없는 논란의 배후에는,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정국을 맞아 보수주의가 한껏 위축되고 있던 상황이 가로놓여 있는 듯이 보인다. 일종의 국면 전환용으로 제기된 교회주의적 공안담론인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해묵은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의 혐의가 제기된 것이겠다. 과거 반공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는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기에 일단 이런 혐의로 마녀사냥이 시작되면 상황은 순식간에 그 혐의에 몰두하여 공격과 변명으로 점철되는 국면이 되고 만다. 일종의 이단논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한국 기독교인들의 공통감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직 야훼’라는 편집증적 자의식은 우리 외부의 모두를 적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자기가 주장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으면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겠다는 자폐적 독선주의인 것이다.
게다가 이글 전체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러한 자폐적 신앙은, 야훼신앙에 대한 터무니없는 망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순수한 것’에 대한 허망한 자기 확신에 기초한다. 한데 순수함에 관한 상상 아니 망상은 늘 사후적으로 등장한다. 애초에는 수많은 것들이 서로 대화와 경합을 벌이면서 공존하는 이웃들이었는데, 다른 것을 배제하면서 성립된 독점권력이 등장하면서 세계도 영혼도 신도 순수한 원천에 관한 신화의 재료가 되고, 적과 우리의 이분법으로 점철된 우주가 펼쳐진다. 반면 사울의 아들 에스바알은 바로 그러한 신화 이전에 이웃으로 서로 얽혀 있던 신앙의 마당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
- 이세벨의 부친이자 아합의 장인(〈열왕기상〉 16,3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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