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학생회 강연원고(2009.4.9)
---------------------------
경계에서 사고하기, 휘청거림의 공부길
내게서 공부는 ‘분노’였다. 대학시절 느껴보지 못한 공부에 대한 열정이 뒤늦게 불타 닥치는 대로 읽어대고 닥치는 대로 써댔다. 거의 모든 대학원생이 운동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던 시절, 독서한 것을 두고 벌이는 진지한 토론은 별로 없었다. 항상 결말은 ‘정치적 올바름’이 논리를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당시 ‘정치적 올바름’은 대개 논리 외부의 현실이었다. 그때 학문은 그만큼 신뢰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담지자 또한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 학문적 고아의식은 나와 같은 ‘초자’ 학도에겐 이론의 세계와 체험세계를 너무 빨리 동일시하는 아마추어적 자기 확신 과정을 공부길로 오인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아무튼 갓 대학원에 입학한, 그것도 대학 때 다른 분야를 공부한 신학도의 서투른 글을 읽어줄 이는 없었다. 왕성하게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던 20대 후반 청년의 ‘갑갑증’은 적절한 소통의 자리를 찾지 못했고, 지식의 섭취와 배설 사이의 극한 비대칭이 내면의 격동을 불러 일으켰다. 필경 그 시절 나의 분노는, 그 정체 모를 감정의 배후는 이러한 갑갑증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듯하다.
분노는 대개 서투른 감정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더욱이 정신의 시장기를 주체하지 못하면서 거기서 얻은 영혼의 힘을 통제하지 못해 격동하는 이에게 그것은 영락없는 사실이다. 한데 그 시절은 공적인 것의 부조리함에 많은 이들이 정신의 자양분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건 오히려 내겐 기회였다. 내면의 격동을 주체하지 못하는 청년은 자기의 사적인 분노를 공적인 분노로 손쉽게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치는 공부에 대한 사적인 분노와 열정을 성화(聖化)시켰다. 공부는, 그 왕성한 지식의 식욕은 더 이상 자기 분열의 조건이 아니라 자기 주체화의 조건이 된 것이다. 이런 과도한 자기 주체화는, 그 시절 있을 법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상당부분 잠식했다. 오히려 과한 자기 확신 덕에 목적 지향적 과제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갓 서른이 된 청년에게 저서를 이력의 일부로 남기는 기회가 다가왔고, 박제된 공부 영역이라 판단했던 아카데미즘의 외부에서 학문적 여정의 가능성이 발견되었다. 제도권 밖의 연구자로 살아가기 연습은 이때 시작되었다.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나름 꽤나 자긍심을 갖는 삶의 태도는 이렇게 청년기의 서투른 열정의 산물이었다.
한데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공적인 것으로 회수된 사적인 열정은 지식의 ‘작은 독재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다른 견해들에 대한 닫힌 태도는 그 열정과 분노가 좌절될 때까지 정신의 관성으로 남겨졌다.
하여 공부는 이제 ‘성찰’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청산 작업이다. 내면의 작은 파시스트는 퇴장해야 했다. 더 이상 그것은 자긍심의 일부가 아니었고, 민주화라는 역사적 구성물에 대한 세대적 좌절감의 원흉처럼 각인되었다. 공적인 것을 향한 집단적 열광의 일부였던 사적 열정이 그 속에 편집증적 아집과 독선이라는, 극복하고자 했던 지난 권위주의 시대의 폐습이, 아비 세대의 저 추한 잔유물이 우리 자화상의 일부로서 남겨져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기비판이었다. 하지만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지식의 권위주의를 청산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습관과 욕구로 번안되어 저장된 독재자 의식은 발견도 제거도 쉽지 않았다.
끝없는 비판, 비판의 비판, 비판의 비판의 비판, ..., 몸의 일부가 된 내면의 작은 파시스트를 극복하는 일은 이렇게 비판의 무한궤도 속을 떠도는 여정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동시에 급속도로 제도화되어 가는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동거 형식들에 대한 비판 작업이 나의 공부길의 내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적인 자기 비판과 공적인 사회 비판은 이렇게 다시 상면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나와 같은 급진주의적 자기 성찰의 담론을 공유하던 한 계간 잡지 기획진의 일부가 되었다. 대학이라는 학문 제도권 밖에서 공부길을 택하고 살아가는 자리가 생겼다. 제도 안이든 밖이든 신념을 공유하고 정신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과의 사적이고 공적인 관계망은 공부의 여정을, 제법 힘이 드는 그 삶의 길을 유지시키는 동력이 어느 만큼은 된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어느덧 40대 후반의 중년이 됐다. 천방지축 청년의 좌충우돌하는 열정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여전히 시행착오는 거듭 되풀이 되고 있지만, 열정도 식었고 모험심도 사그라들었다. 지식의 섭취량은 현저히 줄었고, 배설해야 하는 양은 넘치게 많아졌다. 또 다른 비대칭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 대학원 시절부터 헤아리면 겨우 20여년에 불과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새로운 것을 드러내는 역할보다, 휘몰아치듯 달려오는 후배들에게 남겨줄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역할이 중요해졌다.
다행이다. 조금은 남겨줄 자원이 생겼다. 존재의 불안에 휩싸인 후배들에게 약속해줄 희망의 작은 단서들이, 흔적처럼 도처에 있는 그것들이 이제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형편없지만 나누어 줄 것이 조금 있다.
무엇보다 내가 가진, 내가 나눠줄 수 있는 최고의 자원은, ‘휘청거림’이야말로 공부길을 가는 이에게 최고의 덕목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해 줄 수 있는 존재위치,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시작했고, 여전히 그 길 위에 있기에, 나름 끈질기게 지켜온 삶이기에 그것은 나의 자원이 되었다. 누구도 다듬어 놓지 않은 길, 아니 다듬어 놓을 수 없는 길, 해서 그 닦이지 않은 길 위를 휘청거리며 가고 있는 이는 휘청거림의 현실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휘청거림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덕목인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는 그것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은, 엄밀히 말하면, ‘밖’은 이념형으로나 존재하는 것이다. 아니 종교체험 같은 일시적인 선취적 체험으로만 가능한 것이겠다. 현실은 ‘안’이거나 혹은 그 외부, 하지만 여전히 ‘안’의 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외부에서 서성거리는 일상으로 구성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도 자본주의의 일원이어야 하고, 하느님나라를 갈망하는 이도 땅의 질서 속에서 살아야 하듯이 말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 세계의 일원이면서도 그 일원이 아닌 듯이 살아가는’ 삶, 그것이 휘청거림의 실제 내용이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경계(boundary)에서 사고하고, 경계에서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여 지난 20여 년 간의 여정에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값비싼 체험은 휘청거림은 공부하는 이의 덕목이며, 그것을 나이로 양도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최선의 공부길을 걷는 일이라는 사실에 있다.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들도 ‘하느님의 백성’이다 (0) | 2018.07.20 |
---|---|
‘잉여의 시선’으로 공공성의 인문학을 꿈꾸다 (0) | 2018.07.19 |
누가 ‘좋은 피’인가 - 미누 추방 사태를 보며 (0) | 2018.07.18 |
내 이름은 에스바알 (0) | 2018.07.18 |
갈릴래아의 예수, 유럽의 예수, 변선환 찍고, 안병무의 전태일-예수 - 예수의 아래로부터의 장소성과 기독론의 가능성 (0) | 2018.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