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교회 2001.09.30자 하늘뜻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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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망의 노래, 타자에 대한 두 태도
어느 예배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한국찬송가공회가 간행한 찬송집의 노래다. 참 오랜만에 불러보는 것이어서 음도 낯설었지만, 노래책 자체도 내겐 구경거리였다. 마침 그 교회에 비치된 《해설찬송가》를 펴놓고 있었기에, 읽을 내용만 보면 그냥 지나치길 서운해하는 나의 기벽이 도졌다.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대신 책 이곳저곳을 마치 처음 본 것이기나 한 듯이 뒤적인다.
405장. 눈길은 여기서 멎었다. 오랜 친구 같이 반가운 제목이 나를 향해 손짓하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유명한 〈어메이징 그레이스〉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놀라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가사 하나 하나가 주옥과도 같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자신의 죄스런 심성과 한번쯤 치열한 격전을 벌이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그러나 어느 누군들, 이 싸움에서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번번이 실패한 채, 깊은 번뇌에 시달리던 때를 나 또한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부르던 이 찬송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동 또한 잊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쩔 도리 없이 죄인으로밖엔 드러날 수 없다는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죄 사함의 시혜를 베풀어줄 이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니 그 은혜는 놀랍고 감사하기 그지없다. 바로 이것이 이 찬송이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공감대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그네들이 가장 애창하는 찬송이 바로 이 노래라니 말이다. 이런 상념에 젖은 채 나는 무심코 페이지 아래편의 ‘해설’난으로 눈이 향했다. 거기엔 찬송 작사자에 관한 이런 설명이 달려 있었다.
이것은 존 뉴튼의 자전적 찬송시이다. 존 뉴튼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소유한 노예선에서 선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3월 10일, 그는 배를 타고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성난 폭풍우가 배를 강타하였다. 심각한 위험에 처한 뉴튼은 이때의 자신을 요나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영적인 깊은 자각을 체험하였다. 그는 이날을 '영적 출생의 날'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1754년 그는 자신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며 점차로 자신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해 가기 시작했다.
어구 속에는 존 뉴튼에 관한 해설자의 깊은 존경심이 담겨져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한데 이 해설을 읽으면서 나에겐 모든 추억어린 상념이 정지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노예선 선주의 아들일 뿐 아니라, 그 배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가학적 행위를 목도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그런 가학적 잔혹 행위를 아무런 가책도 없이 행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선주의 아들인 그가 단순한 선원일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심한 폭풍우에서, 그 절망적 상황에서 살아난 뒤 그가 부른 감사의 노래가 이것이었다는 것이다.
흑인에겐 노예선으로 끌려왔다는 것 자체가 결코 잔잔해지지 않는 성난 파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끝없는 절망의 늪이었다. 그네들에게 고향을 향한 꿈은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노예선’이란 이렇게 타인의 죽음을, 죽음 같은 삶을 대가로 해서 자신의 생명을 연명하는 제도의 한 가운데 있는 장치다. 그런데 그 배의 선주의 아들이자 선원인 자가 자신의 목숨을 건진 것에 감사 찬양하는 노래라는 것이다.
무슨 이런 찬송가가 있나? 그런 것에 공명하며 감동스럽게 노래 부르던 나는 무엇인가? 다른 그리스도교도들은? 테러를 겪은 후 하느님 운운하며 복수의 칼부림을 다짐하는 미국 대통령이나, 그것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그 나라 백성의 잔인함은 아마도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는 신앙심에 기초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계 각처에서 벌여왔던 그리스도교도들의 폭력의 역사, 그리고 황석영의 소설 《손님》이 고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땅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그리스도교도들의 냉혹스런 잔임함의 이야기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를 부르짓는 자들의 이기심, 그 참을 수 없는 자기 중심주의를 신앙심이라고 옹호해왔던 그리스도교 역사의 필연적 부산물인 것이다.
그날 나는 우연히 차안에서 다른 노래 한 곡을 듣게 되었다. 내가 속한 교회의 찬송집에 들어 있는 김민기 님이 작곡 작시한 〈아하 누가 그렇게〉가 바로 그 곡이다. 소리 높여 외쳐대는 ‘주여 주여 주여!’ 삼창과는 달리,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부르는 그 절제된 목소리, 거기에는 어떤 어투보다 강렬한 갈망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1] 아하 누가 푸른하늘을 보여주면 좋겠네 아하 누가 은하수도 보여주면 좋겠네
구름 속에 가리운듯 애당초 없는듯 아하 누가 그렇게 보여주면 좋겠네
[2] 아하 누가 나의 손을 잡아주면 좋겠네 아하 내가 너의 손을 잡았으면 좋겠네
높이 높이 두터운 벽 가로놓여 있으니 아하 누가 그렇게 보여주면 좋겠네
[3] 아하 내가 저 들판에 풀잎이면 좋겠네 아하 내가 시냇가에 돌맹이면 좋겠네
하늘 아래 저 들판에 부는 바람 속에 아하 누가 그렇게 보여주면 좋겠네
“아하 누가 푸른 하늘 보여주면 좋겠네, 아하 누가 은하수도 보여주면 좋겠네!” 푸른 하늘도 은하수도 그는 보지 못했다. 그에겐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갈망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갈망한다. 마치 체념의 말투 같은 ‘~하면 좋겠네“라는 어구는 ‘아하’라는 감탄사와 만나면서, 체념의 심곡 만큼이나 그곳을 박차고 나오려는 몸부림이 베어 있다.
“구름 속에 가리운 듯 애당초 없는 듯”. 이 놀라운 어구 속에는 그 갈망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웅변하고 있다. 나아가 그 속에는 단순한 강령 같은 도그마로는 손쉽게 절망을 넘어갈 수 없다는 답답한 현실을 보여준다. 아니 실은 그 갈망은 애당초 없는 것인지도 모를 ‘무형의 희망’, 근거 없는 희망이다. 그럼에도 그는 바로 그것이라도 보고자 갈망하고 있다.
누군가 이 절망 한 가운데 있는 자기의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아하 누가 나의 손을 잡아주면 좋겠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고 고백한다. “아하 내가 너의 손을 잡았으면 좋겠네.” 여기서 시재가 바뀌고 있는 걸 유념하자(‘잡아주면’에서 ‘잡았으면’으로). 미래의 누군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현재 자신의 실천에로 갈망의 형태가 바뀌는 징후다.
“높이 높이 두터운 벽 가로 놓여 있으니!” 역시 절망의 현실 인식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풍랑에서 구출됐다고 “주 은혜 놀라와”라며 호들갑떠는 자세가 아니다. 아직 체험되는 현재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절에서 그는 자신이 저 들판의 풀잎이 되고자 한다고, 시냇가의 돌멩이고 싶다고 노래한다. 놀랍게도 그는 여기서 누군가를 잡아주는 이가 되고자 한다는, 계몽적 자의식을 수정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아예 세상의 일부로, 타인, 타세계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겠다고 다짐한다. 이로써 그는 더 이상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 무엇을 갈망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초월을 경험하고 있다. “아하 누가 그렇게 보여주면 좋겠네”가 아니라 “하늘 아래 저 들판에 부는 바람 속에” 자신이 타인, 타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잘 표현한 찬송이 있을까? 이 노래는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서 부르는 이기적 감사찬송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 타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고 나아가 타자의 일부로서 살겠다는 고백 속에서 메시아 갈망의 의미를 읽어내는 자기 초월의 감사노래다. 무망한 ‘메시아 갈망가’라기보다는 자신을 메시아의 동료로, 아니 공동의 메시아로 고백함으로써, 희망을 이야기하는 찬송가인 것이다.
성서의 제일 끝에 나오는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마지막 날’을 향한 끝나지 않은 갈망의 이야기는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22,20)라고 맺음하고 있다. 이때 그 메시아 갈망의 노래는 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된 것처럼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세계의 한 부분,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비천한 한 부분이 되는 자기 초월의 삶 속에서 계속 불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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