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

분노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5.18정신’은

[경향신문]의 칼럼코너의 하나인 '사유와 성찰'(2019 05 18)에 실린 글(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172042005&code=990100&utm_source=facebook&utm_medium=social_share)

----------------------------------

 

 

분노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5.18정신

 

한 미술작가가 광주민주항쟁 39주년을 기리는 토론회에서 낭송을 맡았다. 1980521일 광주기독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온 뒤 헬기사격으로 사망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에 관한 이야기다. 비장하고 엄숙한 어조의 낭송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듣는 이의 가슴을 헤집는다.

그 작가는 낭송에 맞추어 만든 영상도 함께 틀었다. 39년 전, 발랄했던 꿈 많은 소녀가 10센티가 넘는 무지막지한 총탄에 내장이 다 터져 나온 채 사망하여 묘지에 안장되기까지, 521일을 전후로 하는 며칠간의 동선을 따라가는 영상이다. 근데 카메라가 주시하는 이미지는 1980년이 아니라 2019년이다. 비장하고 엄숙한 낭송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작가는 말했다. “우리가 그 잔인했던 처절한 날을 기억할 때조차 그것과 너무나 대조적인 지금의 일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잖아요.”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기억한다는 것은 원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적으로 재현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영상을 보면서 떠올린 것은 그 이상이었다. ‘기억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머리를 맴돈 것이다.

낭송은 익숙한 분노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낭송뿐이었다면,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 같은 노래처럼, ‘에 대한 증오심을 곧추세우는 방식으로만 기억하고 말았을 것이다. 한데 이 영상은 그런 식의 기억하기를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었다. 하여 귀로는 낭송을 듣고 눈으로는 영상을 보면서 증오의 재생산이라는 익숙한 방식의 기억하기에 그칠 수 없었다. 그것에 덧붙여지는 다른 물음들이 끊임없이 솟구쳐 나왔다. 기억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저들 학살자들만이 아니다, 나는 방해자가 아닌가 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 머리 속을 휘젓고 다닌 것이다.

십여 년 전 5.18민중항쟁증언록이 나왔을 때 그것을 읽으면서 새삼 놀랐던 것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5.18항쟁공동체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무장대원들(기동타격대)의 다수가 짜장면배달부, 인쇄공장 직공, 다방종업원, 건들거리는 재수생 같은 언더클래스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서울 같은, 이주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도시와는 달리, 지역공동체성이 강한 지방도시들은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온 도시주민이 함께 자랑스러워 한다. 마찬가지로 성공하지 못한 삶, 실패했거나 실패할 것이라고 낙인찍힌 이들은, 도시 전체는 아니더라도, 온 동네가 수치스러워 하는 대상이었다. 그런 이들이, 살면서 칭찬이라곤 거의 들어보지 못했던 이들이 시민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권력에 항거하자 시민들로부터 격려와 칭찬을 받았다. 그이들은 그 칭찬이 못내 자랑스러웠다고 증언했다. 처음으로 시민의 일원이 되는 체험을 한 것이다. 해서 그들은 더 열렬한 항쟁의 일원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5.18항쟁공동체는 배제와 편견의 벽이 허물어지는 하나됨의 체험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어떤 연구자는 그것을 절대공동체라고 명명했다.

나쁜 권력에 항거했을 뿐 아니라, 공동체 내적으로 배제와 편견이 해체된 공공적 집단성을 발현시켰다는 것, 바로 이것이 저 어마무시한 숭고의 이름을 부여받는 기준이었다. 마치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가리켜 절대타자라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불가의 숭고의 이름을 부여한 것과 유사한 어법처럼 보인다. 물론 이 어법은 단순한 칭송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 예수를 준거 삼아 살아야 한다는 절대적 기준을 그리스도공동체가 공유한다는, 하여 그리스도공동체를 타자 포용의 신념공동체로 결속시키는 언어가 바로 절대타자라는 표현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리스도교는 낮은 자를 높이고 굶주린 자를 배부르게 하며 슬픈 자를 위로하는 예수 정신의 계승자가 되었는가? 마찬가지로 묻자. 배제와 편견의 해체는 우리가 소리 높여 외친 ‘5.18정신의 일부가 되었는가? 이 도시는 언더클래스를 시민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기풍이 남다른 도시가 되었는가. 5.18정신의 계승자를 부르짖으며 등장한 정부들은 언더클래스를, 비시민화된 이들을 시민의 일원으로 포용하는 제도를 더 발전시켰는가. 그리고 나는 그런 편견을 넘는 사회를 꿈꾸는 자로 살고 있는가.

올해 5.18 기념식은 꽤나 시끄러울 것 같다. 자국민을 학살한 나쁜 권력을 청산하지 못하는 구타유발자들이 발광을 한다. 하여 ‘5.18정신은 또다시 분노와 응징의 색깔에 물들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5.18정신이 충족될 수 없다. 스카이캐슬을 욕망하는 사회가 아닌, 배제와 편견이 없는, 모두에게 열린 사회를 향한 구체적인 행보를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