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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이들의 이름을 망각해온 그리스도교를 반성하며

[경향신문] 2019년 12월28일자 '사유와성찰' 코너에 실린 칼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2272038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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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들의 이름을 망각해온 그리스도교를 반성하면서

 

예수가 체포되고 심문을 받은 뒤 재판에 넘겨지고 형장으로 가서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하루가 안 되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열렬한 추종자였던 그의 측근들은 그 하루 만에 마음이 무너졌다. 해서 대부분의 복음서들은 그 십자가 형장에 그의 제자 중 아무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 살벌한 하루 동안 어떤 이들은 누군가의 추격을 당하면서 숨기에 바뻤겠고, 다른 이들은 신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절망에 빠져 일어설 기운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예수의 측근이었던 몇 명의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도 실상은 제자단의 일원이었지만 어느 복음서들도 그들을 제자라고 부르는 것을 꺼려했다. 해서 그들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어느 복음서들도 제자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곳에 있었던 여성들의 명단에는 유독 마리아들이 많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등. 그밖에도 예수의 주위에는 유난히 마리아들이 많다. 예수의 모친도 마리아이고, 예수와 너무나 절친했던 마르다와 라자로의 자매이자 누이의 이름도 마리아다. 이 마리아는 많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예수가 사랑했던 이가 아닐까 추정되었던 여인이다. 이들 여러 마리아 중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예수의 어머니는 동일인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 주위에 마리아가 많은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왜 마리아들이 그토록 많을까. 이스라엘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참고로 마리아는 그리스식 이름이고, 그것의 히브리식 이름은 미리암이다. 하지만 성서에 나오는 이름 중 마리아 혹은 미리암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예수 주위의 여성들처럼 그 이름을 가진 이들이 그렇게 많은 경우는 성서 어디에도 없다.

한편 그들 대부분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한 이들이었지만 갈릴래아에서의 예수 이야기를 다루는 복음서 텍스트에는 그이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필시 그들이 여자들이기 때문이겠다. 후대에 그리스도교가 나름의 권력의 장을 만들어냈으니, 예수에 대한 기록 속에서 이름을 둘러싼 정치학이 작동했음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그토록 망각되었던 이름들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기록에 등장한다. 그리고 거의 같은 이름이 부활의 목격자로도 나온다. 다른 제자들이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 몇 명의 마리아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어떤 활동을 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거의 유일한 활동가였음을 시시한다. 그렇게 너무나 확고하게 알려진 탓에 이 대목에선 그녀들의 이름을 삭제할 수 없었던 것이겠다.

예수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예수가 이끌었던 하느님나라 운동이 실패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이를 안장한 무덤엔 그이가 없다, 그리고 그이는 갈릴래아에 먼저 갔다, 그러니 그리로 오라.’ 이것이 이들 여성들이 부르짖고 다녔던 예수부활설의 요체였다. 그런 뒤에 일부 남성제자들이, 아마도 별도로 예수부활운동에 나섰고, 그중에는 예루살렘 부활설도 등장했다.

아무튼 모두가 넋 놓고 무너져 있을 때 무너지지 않고 무언가를 했던 여성들 덕에 예수운동은 되살아났고, 그것이 오늘의 그리스도교의 출발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 몇 명의 마리아들이 있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마리아들이다.

우선 마리아라는 이름은 이름 없는 여인들을 예수와 그의 집단 내에서 부르는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 있는 이나 부유한 이들은 여성이어도 이름이 있었지만 무지렁이 여성대중들에게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예수운동 집단 사이에서는 그들을 이름으로 불렀다. 마리아가 그것이다. 물론 다른 남자들처럼 부친이나 가족의 이름과 연결해서 아무개의 엄마 혹은 아무개의 자매 마리아등으로 불리거나 지명과 연결해서 어느 마을 출신 마리아등으로 불렸다. 한데 이름을 갖게 된 그 여성들은 예수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가 되었다. 여성 얘기가 가장 두드러지지만, 성서는 이렇게 이름 없는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름과 함께 존재감이 형성된 그이들이 새로운 사건의 중심 행위자가 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과연 그 전통에 있는가? 신은 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었고, 최초의 인간은 주변의 동물과 식물과 나무와 땅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 짓기는 관계맺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름을 부르면서 상호적 존재가 된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많은 이들의 이름을 지우고 있고, 그렇게 이름이 사라진 이들을 아무렇게나 무시하고 배제한다. 한데 오늘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런 세계의 질서에 공모자가 되고 있다. 최초의 전통은 그렇게 유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