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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민 사찰? 아직도 더 보여줄 게 있는가?

[한겨레신문] 2010년 7월 6일자 칼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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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사찰? 아직도 더 보여줄 게 있는가?

 

 

 

이번엔 민간인 사찰이다. MB 정부 집권 이후 계속되는 ‘역민주화’(retro-democratization)가 끝이 없다. 도대체 다음에 무엇을, 어떤 것까지 보여줄 것인가.

MB 정부는 출범 당시 ‘선진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시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망설임 없는 청산의 말을 자제함 없이 마구 내뱉었음에도, 그것이 그 이전, 곧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선진화’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의 힘이었겠다. ‘뭔가 다를 것이라는 대중의 합의’가 정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MB 정부의 주체들은 그렇게 해석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다른 그 무엇’의 표제어인 ‘선진화’의 정체는 지극히 모호했다. 숱한 말들이 이 용어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선진화’라는 표제가 붙은, 그 배회하는 글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그 대중의 합의라는 것을 구현하기 위한 그이들 나름의 생각의 틀을 발견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아직은 없다.’는 것이다. 필경 MB정부의 이데올로그들도 필사적으로 그 함의를 찾아보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자신도 아직은 모르고 쓴 말, 알고 싶은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한데 이즈음 정부의 실세들에게서 ‘선진화’라는 말이 훨씬 적게 사용되는 듯이 보인다. 이유는 명료하다. 이제 그 표현의 ‘약발’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긴 출범 직후부터 ‘선진화’라는 말보다는 ‘퇴행화’라는 말이 더 적합할 만큼 예스러운 것, 그중에서도 ‘혐오스런 낡은 것’을 창고에서 꺼내 쓰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던가? 이젠 시민사회에서 선진화라는 말에 어떤 기대를 갖는 이는, 보수층에서조차, 현저히 줄었다.

내 기억으로는, 정권 출범 직후 예사스럽지 않은 시민적 저항에 부닥치면서 퇴행화 현상은 속출했다. 물론 이 퇴행화의 뚜렷한 징후인 ‘감시와 통제’는 확실히 지난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이다.

‘감시’는 타인의 정보를 축적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는 권력의 양식이다. 이때 감시당하는 자는 감시자의 시선에서 생각하도록 강요당한다. 또한 감시자는 전지(全知)적 존재, 곧 신적 존재로 자기 자신을 착각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감시와 통제의 체제를 이끈 ‘군인 권위주의자들’은 이미 거세되었다. 그들은 전지자가 되는 데 실패했고, 시민은 권력에 대한 역감시(inverse surveillance)의 주역이 되었다. 우리에게 민주화는 역감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적 감시가 가능해진 체제의 등장과 함께 도래했다.

그런데 지금의 감시 체제의 주역은 ‘기업 권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사회의 시민을 왕성한 소비자로 변모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소비자는 자기 개인의 취향에 극도로 민감한 존재다. 즉 남과 다른 취향을 ‘더 발전시킨’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권위주의적 기업가, 아니 그 퇴행적 기업 권위주의자들은 반대적 생각의 가능성을 확장시켜놓고 다시 그 반대를 통제하고자 한다.

이런 정부가 내지르는 선진화라는 구호를 누가 믿을 것인가. 그들은 ‘더 시장적인’ 보수적 성향의 유권자들까지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MB 정부는 강력한 쇄신 요구에 직면해 있다. 시민의 반대를 보다 예의 바르게 대하라는, ‘선진화’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요구다. 내가 보기엔 지금 그 시금석은 이른바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시민이 참아줄 수 있는 마지막 요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