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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당이 사라지고 있다

[한겨레신문] 2010.7.26에 실린 칼럼 원고입니다.
홍익재단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성미산을 지키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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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사라지고 있다

 

 

30년 전, 처음 이사 왔을 땐 집집마다 작은 마당이 있었다. 상습침수지역에 넓은 마당이 딸린 큰 집이 있을 리는 만무다. 하지만 그 작은 집터에서도 마당엔 옹골지게 화단이 가꾸어져 있었다. 우리 집에도 대문은 장미덩굴로 뒤덮여 있었고, 저 뒤편에 대추나무가 있었다. 먹다 뱉은 씨로 심은, 열매가 열리지 않는 귤나무도 내 허리 높이 정도에서 멈춘 채 꿋꿋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옆동네에 월드컵 경기장이 들어서고, 쓰레기처리장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하철역이 생겼다. 느리다고 할 수는 없는 변화가 거듭되던 동네에 가속패달이 장착되었다. 몇 년 새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 하나는 ‘마당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개집은 실내로 이동했고, 작은 화단도 발코니로 이사했다. 하긴, 밖에 화단이 있기는 하다. 한쪽 구석에 나무들 몇 그루가 서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곳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없다.

이런 것은 나름 의미 있는 변화다. 마당은 사라졌지만, 거실에 연결된 발코니에서 자라는 화분과 강아지는 가족의 일원이 되어, 희로애락을 같이 하곤 한다. 나비와 벌, 지렁이와 참새, 제비 대신에 매일 쳐다봐주고 돌봐주는 주인의 손길이 더 친밀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그런 마음의 교분 이면엔 땅의 부가가치를 최대화하려는 ‘집주인들의 경제학’이 있다. 마당처럼 ‘놀려놓은 땅’은 ‘가치가 없는 땅’이다. 바로 이런 경제학은 부자들의 계산법만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가난했던 동네에서 자란 아이들의 꿈의 토양이 되었다.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이렇게 자랐고, 또 그이들의 자녀들도 그렇게 자라고 있다.

요즈음 이런 땅의 경제학이 내가 사는 동네 인근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인근의 유일한 야산을 모 대학이 구매하였고, 그 산 한 편에 같은 재단의 초중등학교를 옮겨오려 한단다. 그것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시민들의 휴식의 공간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이들은 그 사학재단이 조만간에 나머지 땅엔 아파트를 지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얘기는 몇 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 국가는 이 땅을 민간에 매매했다. 그곳이 ‘놀려놓은 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구매자인 한 사학재단은 그곳을 재개발하여, ‘노는 땅’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다.

한데 주민들이 들고 있어났다. 이 땅은 ‘노는 땅’이 아니라 사람들의 쉼터라고. 이미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생수를 길었고 산책을 했으며 운동을 했다. 또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해서 이 땅은 노는 땅이 아닌, 가치 있는 땅이라는 것이겠다. 다른 계산법이 활용되었다. 그리고 주민들은 일단 이 싸움에서 승리했다.

집주인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이는 다른 사학재단에게 땅을 팔았다. 흥미로운 것은 판매자는 새 구매자로부터 막대한 초과이윤을 남겼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 액수가 백억 원이 넘는다고 주장한다.

새 주인은 집을 집고 싶어 한다. 가난한 집주인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그런 계산법에 따라 마당을 없애고 집을 지어 왔으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더구나 판매자에게 막대한 비용을 얹져 주고 산 땅을 ‘놀려 놓을’ 리야 있겠는가?

주민들 중 많은 이들은 이곳을 재개발하는 데 동의했다.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들의 자녀들의 꿈을 위해 ‘마당을 없애는 것’ 쯤은 감수하겠다고.

해서 시민들의 여가공간을 지켜내려는 이들은 점점 어려운 싸움에 직면해 있다. 땅을 마당으로 남게 하려는 일은 언제나 힘겹고 외롭다. 하지만 마당 없는 집들로 채워질 땅을 생각한다면 어렵더라도 끈덕지게 붙어볼 만한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