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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분출하는 시민적 욕망이 위험하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2010 06 15)의 '야! 한국사회'코너에 실린 칼럼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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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출하는 시민적 욕망이 위험하다

 

 

‘전 국토를 공사판으로!’ 지난해 초, 여당 원내대표가 기자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친 구호다. 그리고 ‘4대강 사업’에 관한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의지는 변치 않았다.

6.2 지방선거 참패 이후 장고(長考) 끝에 대통령은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말로 시작되는 대국민방송을 했다. “더 많이 토론하고 ...... 4대강 수계에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의 의견도 다시 한 번 수렴하겠다.”는 말은 귀를 솔깃하게 한다. 그러나 ‘정책적 문제가 정치적 문제로 잘못 다뤄지고 있다’는 불평 섞인 말 속에서 그이가 하겠다는 ‘더 많은 토론과 의견 수렴’은 이미 답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누군가는 그의 이례적인 장고를, 반전의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해석했다. 운 나쁘게도 나로호가 꿈꾸었을지도 모르는 대반전의 시간은 없었다. 월드컵이 또 다른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로는, 정부가 발표한 천안함의 서사, 전 세계를 향해 타전했던 그 과학주의 담론처럼, 흥행에는 성공했어도 시민사회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는 실패하는 ‘요란한 빈 수레’에 다름 아닌 공허한 퍼포먼스로 비추어질 뿐이다.

아마도 시민사회는 이미 ‘잘 학습’되어 있는 것 같다. 정치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의 ‘순수국민’은 이제 그다지 많지 않다. 정치가는 여전히 그걸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순수국민이 사라진 빈자리에, 순수국민 신화를 믿는 ‘순수정치가’가 무릎 꿇고 구애하는 우수꽝스러운 장면이 연상된다. 정치가 구태를 벗지 못한다는 말의 한 현상이 이런 것일까.

한데, 나에게 정치의 구태 만큼이나 우려스러운 상상은 너무 영악해진 시민사회에 관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열망의 대상에서 제도화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시기는 소비사회화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이때 자본은 민주정부들이 그 제도화의 내용을 채우는 핵심 브레인이었다. 과도한 자본의 개입 속에 한국의 소비사회는 천박한 양상을 띠었고, 시민은 과하게 시장화되었다.

민주화된 세계의 미래에 대해 자본이 그리는 테크노피아는 주체할 수 없이 욕망을 분출시키는 시민들의 세상이다. 그리고 이런 욕구는 신용카드를 통한 과잉소비와 결합되었고, 부동산 신화를 믿는 뻥튀기 현실로 육화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서 이웃이 사라진 욕망의 경제가 소비사회의 시민적 영혼의 심장을 대체했다. 이러한 욕망의 경제 아래 사회적 배제 현상은 이웃에 대한 망각을 통해 견고해졌다. 한 경제학자와 공간사회학자가 말한 ‘잊어버림의 정치’는 이미 우리사회의 주된 특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여 몇 년전 칸느에서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일본 영화의 제목처럼, 민중은 존재하지만, 시민사회는 그들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다.’(<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2004)>)

하여 과학주의 담론으로 채색된 천안함 서사를 퍼뜨린 정부를 시민사회가 지지하지 않은 것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신냉전주의가 시민적 욕망의 경제를 훼손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한 가계부채에 대한 심리적 안전망인 부동산 거품은 지구화 시대를 맞아 작은 파고에도 심하게 동요한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독주에 제동을 건 시민의 선택은 그리 신뢰할만한 게 아닐 수 있다. 탐욕을 분출시키려 경쟁하는 정치는 파행화된 정치만큼이나 시민사회를 오염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욕망의 억제는 때로 필요하다. 하여 최근 타계한 한 스님이 보여준 ‘무소유’는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