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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세미나

후발대형교회와 개신교 극우주의 - 도덕과잉 신앙과 이념과잉 신앙의 길항적 공존

문화연구학회 정기학술대회(2020 12 19)에서 세션3의 발제원고로 만든 것. 발표용 글인데다 급하게 쓴 것이어서 너무나 허술하다. 완성된 글로 쓰려면 많이 손보아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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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발대형교회와 개신교 극우주의

- 도덕과잉 신앙과 이념과잉 신앙의 길항적 공존 -

 

 

세대주의 신앙과 ‘전광훈 현상’

 

현재까지 세 번에 걸친 코로나19의 대유행 중 두 번은 뚜렷한 슈퍼전파자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둘은 개신교와 깊은 관련되어 있다. 첫 번째가 신천지발 대유행이었고, 두 번째는 전광훈 현상이라고 불리는 거리의 기독교 극우주의발 대유행이었다. 이 두 슈퍼전파자 집단은 공히 개신교와 연관되어 있고, 세대주의적 열광주의 신앙으로 무장한 이들이다.(1)

세대주의는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고 그리하여 예수가 통치하는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강한 종교적 신념 아래서 발생하는 종교현상을 가리킨다. 이런 종교현상에 세대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들의 독특한 해석양식 때문이다. 즉 천년왕국의 도래로 귀결되기까지 세계의 많은 사건들을 그 징후로 해석하면서 세대를 나누고 그때마다 하느님의 통치 양식이 변화해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세대에 대한 논의에서 음모론적 해석이 다분하지만, 특히 종말이 임박한 현재를 이야기할 때는 거의 모든 서사를 음모론으로 이끌어가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세대주의로 번역된 디스펜세이셔널리즘(dispensationalism)이라는 단어의 용례가 흥미롭다. ‘디스펜세이션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인간의 계산 능력을 초과하는 신의 기획적 통치라는 함의를 갖는 경륜(經綸)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οικονομια)에서 유래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을 뜻하는 오이코스(οικος)을 의미하는 노모스(νομος)가 합성된 단어인 오이코노미아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가계의 재산관리에 관한 상세한 경영철학, 방법, 혹은 그런 저작을 가리킨다. 그것이 2세기 이후 신학적 개념으로 재활용되면서 세상을 다스리는 신의 기획적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전용되었다.

한편 로마가 지중해 패권국이 되면서 빠르게 영토가 확장될 때 귀족들은 제국 곳곳에 사유지들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 사유지들을 관리하는 총괄집사격의 노예가 그 모든 사유지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적용했다. 그리스의 오이코노미아가 다분히 경영철학에 방점이 있다면, 로마의 오이코노미아는 이렇게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총괄집사역을 맡은 노예는 매우 세세하게 농장 경영에 관한 관리기법들을 발명해내는데, 그것을 통해 그는 주인에게 최대의 이윤을 제공하려 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한데 같은 시기에 영토가 빠르게 확장된 제국은 최대한 안정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법제의 발전에 최대한의 노력을 가했다. 그러니까 로마공화정의 최고기관인 원로원의 의원들은 체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법제를 발전시켰고, 동시에 가계의 효율적인 재산관리를 위해 오이코노미아를 발전시켰다. 문제는 이 두 요소가 서로 모순 관계라는 점에 있다. 법제는 공적 성격이 강한 반면, 오이코노미아는 사적 성격이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오이코노미아의 원리를 만드는 데 책임이 있는 총괄집사들은 양자가 충돌할 때 오이코노미아가 법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인에게 설득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해서 오이코노미아적 텍스트들은 그 기획이 법 너머에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은 서기 2~4세기의 그리스도교 교리문답서들을 조사하면서 그 시기 교회에서 이미 구체적 종말론(concrete eschatology)이 후퇴하고 생명정치(bio-politics)의 장치들이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밝히는데, 이때 그가 그런 장치로 제기한 것이 오이코노미아의 신학이었다. 근대적 생명정치의 뿌리가 2~3세기 그리스도교에서 이미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고대로마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얼마만큼 각 지역까지 전달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교리적 진술의 논리만으로 그것의 통치성을 추정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로마교회에서 오이코노미아의 신학이 종말론의 실체성을 퇴출시키는 담론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은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오이코노미아 신학을 아감벤처럼 매끄러운, 일관성 있는 신학담론으로 보는 것은 과장된 해석으로 보인다. 2~4세기 교회는 하나로 잘 통합된 집단이 아니었고, 로마교회에서조차 잘 정의된 종교로 체계화된 모습을 보이지 못한 때다. 해서 다양한 그룹들이 고대로마의 오이코노미아 개념을 여러 방식으로 전유하여 신학화했을 것이고 그중에는 종말론적 열망을 담은 신학적 시도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흔적이 오늘날 가톨릭의 관면교리 속에 담겨 있다. 이는 교회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상황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로마교회는 디스펜사티오(dispensatio), 디스펜세이션(dispensation)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을 번역한 것이 관면(寬免)이다. 이 교리는 종말론의 실체성이 퇴출된 교회에서 적용된 것이지만, 그 명칭이 디스펜사티오인 것은 오이코노미아 신학이 법을 중지시키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해석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세대주의에 대해 이렇게 긴 얘기를 늘어놓은 세대주의적 신앙이 갖고 있는 반사회성의 내적 근거를 논하기 위해서다. 이런 종파의 신자들은 예수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강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그런 믿음에는 종말이 임박했기 때문에 사회의 규범이나 질서에 반하는 행위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 신의 디스펜사티오를 허락받았다는 자기 확신이 포함되어 있다. 신천지 종파나 거리의 극우파 열혈신자들이 코로나에 대해 보였던 반사회적 태도는 그런 믿음의 양상을 반영한다. 또 강력한 사회적 지탄에도 불구하고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보였던 반사회적 태도 속에도 그런 세대주의 신앙이 한몫하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태도에 대한 모든 설명이 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신앙적 요소였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요컨대 신천지 현상과 전광훈 현상은 공히 반사회적인 광신도 현상에 속한다. 하지만 둘은 적잖은 차이가 있다. 두 종교현상이 강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 시기가 다소 다르다.(2) 또 신천지 종파에는 젊은 층과 여성층이 유입이 두드러졌던 반면, 거리의 개신교 극우주의자들 중에는 남성 노년층이 훨씬 많다. 또 전자는 다분히 비정치적광신도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후자는 정치적광신도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해서 이 두 광신도 현상을 세대주의라는 하나의 묶음으로 다루는 것은 그 현격한 차이들을 해석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 글은 이 차이를 주목하면서, ‘전광훈 현상에 집중하려 한다. 우선 전광훈 현상이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보면 개신교 극우주의 성향을 뚜렷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개신교와 극우주의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양상에 대한 이론적 논의부터 시작해보겠다.

 

극우주의

 

극우주의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권위주의와 독재 정치를 추구하며, 약한 타자를 향한 증오와 공격적 행위를 조장하는 대중정치 현상이다. 이러한 대중정치 현상이 불타오르는 출발점에는 대중의 집단적인 절망과 좌절의 상황이 있다. 하지만 절망과 좌절에 빠진 모든 대중이 언제나 극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으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을 공포로 해석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 누군가를 증오하고 공격하도록 선동하는 자를 통해 대중은 극우주의자들이 된다. 이때 증오와 공격의 대상은 근원적으로는 외부에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내부에서 색출된다. 그리고 색출된 내부의 적외부의 더 큰 적에 연계된 자라고 지목된 자들이다.

한데 대중의 이러한 해석에는 굉장한 비약이 있다. 일종의 집단적 환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그런 비약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대상이 개신교적 극우주의 성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런 비약을 설명하기 위해 천년왕국운동에 관한 연구들을 참조할 수 있다.

대중의 집단적 환각에 관한 사례는 강한 종말론적 신앙공동체에서 종종 발견된다. 그런데 종말론적 신앙공동체가 고통의 체험을 공포로 읽어내는 데는 그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자가 필요하다. 그런 이를 (종말론적) 예언자라고 하자. 그는 대중의 집단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자다. 그는 대중의 극도로 흥분하게 하고 그것을 특정한 행동으로 조직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자다.

한데 종말론적 예언자가 대중을 선동한다고 해도 대중이 그를 단순히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거에는 그 예언자의 개인적 능력도 필요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해석을 대중이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메시아주의 담론이라고 하자. 여기에서 핵심은 구원이다. 즉 그 대중은 메시아주의 담론의 구원 메시지에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메시아주의적 구원 신화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메시아주의적 구원신화를 특정 대중이 공유하려면 그 담론이 소통되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 장소에서 예언자는 그 메시아적 구원 신화를 현재화하는 해석을 대중에게 설파한다. 그는 고통을 공포로 해석하게 한다. 그것이 공포로 해석된다는 것은 가해자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가해자는 궁극적으로는 악령이지만 현실에서는 적그리스도로 표상된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준동을 막고 그들을 제거하는 행동이 요청된다. 해서 예언자는 그런 적대적 행동을 조직해내는 담론과 전술을 구사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증오적 실천의 수행적 효과를 일으키게 한다. 여기서 비정치적 광신도 집단은 적그리스도를 비정치적 맥락에서 구체화하는 담론 전략을 펴는 반면, 정치적 광신도 집단은 적그리스도를 정치적 행동주의와 연계시킨다. 전광훈 현상이 바로 그렇다. 나는 이러한 정치적 메시아주의 담론이 통용되고 예언자가 준동하는 담론의 장을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러므로 전광훈 현상을 극우주의적 광신도 현상으로 보려 한다는 것은, 첫째로 대중의 고통에 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둘째로 메시아주의적 담론과 예언자에 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중 이 글은 첫 번째 논의에 집중하려 한다.

 

‘1990년대’, 거대한 전환

 

현대 한국사회를 시기구분할 때 ‘1990년대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시기다. 정부의 성격도 바뀌었고 자본주의 양상도 바뀌었다. 수도권의 등장과 함께 도시성도 전환되었고, 매체환경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으며, 대중문화의 시대가 도래한 때이기도 하다. 수없이 많은 전환이 이 시기에 일어났는데, 한국개신교도 이 시기에 거대한 전환이 있었다.

개신교의 거대한 전환의 중심에는 후발대형교회가 있다. 1960~1990, 30년 동안 한국개신교는 전대미문의 대부흥을 이룩했다. 그 이전 시대(1945~1960년 경) 개신교는 지나치게 정치화된 종교를 추구했다면, 대부흥시대 개신교는 비정치적인 대중신비주의적 종교의 시대였다. 앞서 말했듯이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밀실에서나 수행되었다. 대중신비주의적 종교는 부흥회를 통해 작동했는데, 그 장소는 대략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그 장소에 따라 대중의 신자되기도 세 단계로 펼쳐졌다. 첫 번째는 광장의 부흥회인데, 이곳에선 주로 수많은 새신자들이 탄생했다. 둘째는 부흥회 판이 된 교회인데, 여기선 주로 새신자의 팬덤화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셋째는 산기도원의 부흥회인데, 여기선 주로 신자의 컬트화현상이 벌어졌다.

이 대부흥 시기에 대형교회(mega-church)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그때 세계 최대의 교회를 비롯해서, 세계 50대 초대형교회(giga-chursh)(3) 중 절반 가까운 교회들이 한국의 교회들일 정도로 이 시대는 대형교회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 시대의 대형교회 현상을 선발대형교회라는 명칭으로 조명한 바 있다. 선발대형교회들은 주로 전국의 대도시들과 그 인근지역에서 등장했고, 새신자들이 대대적으로 충원됨으로써 대형화된 교회였다. 새신자들 중에는 특히 이농민들이 많았다. 즉 이 시기 대형교회의 탄생은 이농민의 새신자화로 인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이때 성공한 교회들은 담임목사가 부흥사인 경우가 많다. 광장의 부흥회에서 개신교를 접하거나 다른 경로로 신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이들 부흥사들의 교회로 찾아와 새신자가 된 이들은 빠르게 부흥사-목사의 열혈 팬이 되었다. 이런 팬덤 현상을 등에 업은 부흥사-목사는 교회의 가용자원을 성장에 집중투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하여 교회가 대대적인 성장을 이룩했다는 것이 선발대형교회의 일반적인 성장 스토리다.

한데 1990년대 이후 교회의 성장세는 급격하게 꺾였다. 새 신자의 유입이 현저히 감소하게 되자, 성장에 맞추어져 있던 교회의 지출체계, 부채 관리, 고용 문제 등에 차질이 생겼다. 소형교회들은 생존의 위기에 빠졌고 중대형교회들도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교단 조직과 교단 산하 신학교의 재정위기로 이어졌고, 대학은 학문의 파행성이 심각해지기 시작해졌다.

한국사회도 1990년대 이후 성장의 위기가 오면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정부든 교단이든 교회든, 그 십년대의 전반기와 후반기는 담론의 기조가 매우 다르다. 한국사회의 경우 1990년대 전반기는 막 시작된 민주화의 단꿈에서 아직 깨지 않은 상태였다. 또 선진국 클럽이라 할 수 있는 세계경제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소비사회로의 전환이 빠르게 진척되면서 시민들의 소비자적 주권의식은 공공적 주권의식을 압도할 만큼 빠르게 확장되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새 신자의 유입이 줄었다는 것을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이는 거의 없었고, 대신 1,200만 혹은 1,400만 성도 운운하는 말들이 흘러넘쳤다.(4) ‘부자되세요가 당시 한국사회의 유행어인 것처럼, ‘부흥하세요가 목사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인사말이었다.

한데 하반기에 한국사회는 몰락의 기미가 역력해졌고 1997년에는 사상 초유의 경제대란을 겪게 된다. 교회도 위기론이 널리 퍼졌다. 특히 교회의 불법과 탈법에 관한 기사들이 연일 보도되었고, 교회의 갈등이 법정 문제로 비화된 사례들이 속출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망도는 급락했고 그런 기조는 이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교회와 산기도원의 매각기사도 잇따랐다. 거의 모든 신학대학들은 분쟁에 휩싸여 있었고, 신학생들은 인문학으로서의 신학을 외면하고 교회 성장학에 몰두했다. 많은 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애정이 현저히 식어버렸고, 담임목사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산산이 무너지는 것을 체감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실망신자화라고 불렀다.

해서 1990년대가 대전환기이지만, 그 변화가 실감되는 시기는 하반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바로 그 시기에 새로운 대형교회들의 탄생 러시가 있었다는 점이다. 주목할 것은 이 시기 등장한 대형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강남강동분당 지역(이하 강남권’)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성장이 새신자의 유입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수평이동한 신자의 유입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시기 이후 등장한 대형교회들을 후발대형교회라고 명명했다.

신자들의 수평이동 현상은 1990년대 이전에도 굉장히 많았다. 그 시기는 거대한 이주의 시대였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했고, 취업이나 결혼으로 인한 수평이동도 매우 많았다. 아직 교통체계가 미발달한 상태여서 주거지의 이주는 교회간 수평이동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의 수평이동은 사정이 다르다. 물론 여전히 취업과 결혼으로 인한 이주나 서울에서 신도시로의 이주도 중요한 이유이긴 했지만, 이 시기에 특별한 현상은 실망신자가 대대적으로 등장했고, 그들 중 상당수가 교회를 이탈하여 유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나는 이것을 실망신자의 떠돌이화라고 불렀는데, 이들 떠돌이신자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교회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았고 교회의 다양한 직분을 경험한 이들이 떠돌이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온라인 네트워크의 등장과 디지털사회로의 전환은 떠돌이신자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교회를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목사에 대한 의존성이 약화되고 실망신자가 된 때부터 종교적 진리에 대한 독자적인 탐구욕이 더 높아졌는데, 떠돌이신자가 되면서 더욱 탐구는 더 다양해졌고 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그들을 성숙하게 했는지 아니면 더욱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었는지는 개개인마다 다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떠돌이 과정에서 그들은 충성하는 신자에서 종교소비자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상대적으로 학력이나 재정능력이 높은 이들이 많았다. 해서 떠돌이신자들은 사회적 위치에서도 자존성이 높은 이들인데, 종교적으로도 자존성이 높아졌다. 그런 이들을 대대적으로 유치할 수 있었던 교회들의 성공비결은, 과거와 같은,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후발대형교회의 성공 비결을 캐릭터화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소비자가 된 신자에게 효과적으로 교회의 새로운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캐릭터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성서해석의 과정을 강조하는 제자훈련으로 캐릭터화에 성공한 교회, 중산층적 영성으로 캐릭터화에 성공한 교회, 성장주의를 반대하는 캐릭터로 성공한 교회, 도덕적 청렴성으로 성공한 교회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교회를 찾는 떠돌이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었다.

그렇게 재정착한 신자들에게 후발대형교회는 다른 데서는 체험할 수 없는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공연처럼 시청각적 쾌감을 주는 예배, 다양한 편의시설, 고품격의 대안학교, 그리고 아버지학교, 결혼예비자학교, 부부학교, 노인학교 등 신앙과 일상을 접맥시키는 각종 프로그램, 비혼자 커뮤니티의 독립적 운용 등, 신자들에게 교회에 속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보상을 선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이들 후발대형교회는 한국사회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특급의 인맥공장에 진입할 기회를 주는 곳이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시작했다. IT산업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교회도 신성장동력 얘기가 나왔고, ‘제자훈련경배와찬양이 주목되었다. 시행착오가 계속되었지만, 많은 교회들은 두 패러다임의 한국적 요람처럼 인식되었던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를 모방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 두 교회에 대한 기대가 사그라든 2천년대 이후에는 윤리적 신앙을 강조하는 캐릭터 교회들이 주목받고 대형교회의 대열에 서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무튼 1990년대 후반,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를 선망하고 모방하는 중소형교회들은 프로그램만 따라한 것이 아니라 그 담론도 따라했다. 그러나 이 교회들을 모방한 교회들 대부분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 프로그램들이 인적, 물적인 자원이 충분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여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 사회뿐 아니라 교회도 양극화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후발대형교회적 주체화

 

제자훈련이란 소그룹별로 진행되는 성서 독해와 전도 훈련 과정을 체계화하여 등급화하는 프로그램인데, 거의 모든 신자들의 전 생애는 이런 등급 체계에 포박되어 서열화된다. 열등신자와 우등신자가 나뉘는 것이다. 한데 이 프로그램은 제자훈련에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투여해야 우등신자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목사는 이 프로그램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사역활동을 할 수 있어야 이 체계 속에서 신자들을 이끄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에 연령별, 성별, 직능별 헌신노동이 덧붙여진다. 그런데 이런 밀도 높은 제자훈련을 매 과정마다 충실히 수행하고, 각종 헌신노동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만으로 교회의 인너써클에 진입할 수는 없다. 동시에 세속적인 경쟁력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선 신자들은 세속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의 스펙쌓기를 제외한 다른 여가활동을 즐길 여유가 없다. 그래야 이 강도 높은 신자되기 과정을 우등신자로 이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개인적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많은 시간을 투여해도 경쟁 과정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한데 개인적 역량에는 물적 자원이라는 요소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각 단계별로 우등신자가 되면 교회의 신자 네트워크에서 인정받는 이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인정시스템은 매 단계마다 기회라는 보상을 제공받는다. 그리고 그 보상들은 종교적 성공만이 아니라 사회적 성공의 기회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런 기회들을 잘 활용하면서 장년이 되면 그 교회 신자들로 구성된 사회적 파워엘리트 클럽의 맴버십을 갖게 된다. 요컨대 제자훈련은 사회적 엘리트 충원과정과 연계된 신자됨의 장치로 작동한다.

경배와찬양은 예배당의 공간배치, 조명과 사운드, 음악, 예배 이끄미들의 복장과 발성, 동작 등을 세밀하고 포괄적으로 디자인하여 실행에 옮기는, 일종의 공연화된 예배 기획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신자들이 공연문화에 익숙한 자이어야 그런 예배 기획은 기대하는 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각기 제자훈련과 경배와찬양의 캐릭터로 유명해졌지만, 실은 두 교회도 이 두 프로그램을 모두 활용하고 있고, 많은 다른 교회들도 그러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으로 성공한 교회들이 있는가 하면 훨씬 더 많은 교회들은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공과 실패는 신자들의 자원능력의 총량과 상응하며, 목사도 그만큼의 비용을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느냐의 여부와 관련이 있다. 그런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교회는 제자훈련을 촘촘하게 작동시킬 수 없고, 장기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은 제자훈련으로 교인들을 통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말했듯이, 많은 교회들은 이 두 프로그램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담론도 따라한다. 이때 그 담론의 내용을 단적으로 요약하면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요약된다. 선발대형교회를 상징했던 조용기의 삼박자구원신학은 축복의 방점이 찍인 것이었는데, 그것은 사회적으로 축복받지 못한 계층 사이에서 열렬히 수용되었다. 반면 후발대형교회의 예수라면 ...’ 담론은 윤리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 종교적인 축복의 선포에 갈급하지 않은 계층에게 걸맞는 신앙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자훈련 프로그램은 이성적 신앙의 장치에 가깝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윤리적 요소가 크게 중요하다. 한편 경배와찬양은 감성을 동원하는 신앙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감성의 장치로서 신자들을 동화시키면서 이를 윤리적 메시지와 연계시킨다. 즉 둘 다 윤리적 성격이 강하다. 하여 조용기의 종교가 축복의 종교라면, 후발대형교회의 종교는 윤리의 종교의 성격이 강하다.

이때 후발대형교회적 윤리의 디테일은, 선발대형교회가 추구했던 가치들을 지양하는 것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가령 성공하면 모든 게 용납되는 성공지상주의가 선발대형교회적 가치의 핵심이었는데, 후발대형교회는 성공한 만큼의 윤리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과시형 소비가 아니라 검약한 소비를 강조하고, 권위주의적 가족관계보다는 아버지학교식의 사랑의 가부장주의를 추구한다. ‘세습이 아니라 반납을 강조하고, 배타성보다는 관용을 중요시한다. 나는 이렇게 윤리가 전면화된 신앙을 웰빙신앙이라고 부른 바 있다.

이렇게 개개인의 일상화된 윤리를 강조하는 웰빙신앙이 부상하였다는 것은 교회에서 종말론의 자리가 후퇴하고 있음을 시하한다. 신자들은 세계의 일상의 시간이 중지되고 법이 무력화되는 전복의 꿈을 꾸는 대신, 세계 안에서 성공하는 것과 신자로 성공하는 것이 뒤얽힌 신앙을 체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해서 성도가 되는 것과 시민이 되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런 성도인 시민혹은 시민인 성도는 질서의 전복을 꿈꾸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웰빙신앙은 보수주의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강남권의 후발대형교회는 새신자가 아니라 떠돌이신자의 집중적인 재정착지가 됨으로써 성공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들 재정착한 신자들은 종교적으로 자존성이 강한 이들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자존성이 높은 이들이 많았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무한경쟁 체계 아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그들 각각이 마치 전쟁 같은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 성공을 이룩한 전사(戰士)들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전사들 중 절대다수는 가정도 전쟁터로 만들었다. 특히 자녀교육에 관한 한 그 치열함은 어느 영역 못지않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대대적으로 몰려들어간 후발대형교회는 경쟁력보다는 웰빙적 윤리가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 왜일까.

이와 비슷한 현상이 촛불정치태극기정치에서도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높고 생활수준도 높은 이들이 많았던 촛불정치의 대중은 평화적 집회를 만들어냈다. 창의적인 미학적 요소가 도처에서 분출하고, 타자를 배려한 포용의 담론이 넘실대며, 집회를 마무리할 때는 깨끗하게 청소까지 하는 독특한 시위문화를 보여주었다. 반면, ‘태극기정치의 대중들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둘러댔다. 그리고 소음이 난무한 집회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태극기정치의 대중은 상대적으로 취약계층이 많고 교육수준도 낮았다. 물론 촛불정치태극기정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진보와 보수로 나뉘는 반면, 선발과 후발 대형교회는 모두 보수주의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아무튼 사회적 경쟁체제에서 보다 성공한 신자유주의적 전사들은 삶의 다른 영역을 비전투지역, 즉 후방지대로 만들어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후방지대는 평화의 공간인 것만은 아니다. 동시에 전방의 전투력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한 에너지 충전의 장소다. 후발대형교회도 그렇게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인맥공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은 전투가 일상화된 사회의 후방지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1997년과 2008년의 경제적 재앙을 겪으면서 한국사회는 연줄의 유용성이 크게 강화되었다. 물론 혈연적 연줄은 직계가족 범위 안에서만 유용하지만, 학연이나 지연의 힘은 점점 더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한데 방대한 연줄망 연구서인 대한민국 파워엘리트(황금나침반, 2006)에 의하면 양질의 연줄은 다양한 영역들을 아우르는 연줄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 책은 교연(敎連)에 관해서는 깊은 분석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형교회는 다양한 영역의 연줄 형성을 광범위하게 만들 수 있는 한국사회에서 거의 유일한 연줄형성의 장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수의 파워엘리트들이 자주, 그리고 장기간 모임을 유지하는 곳이며, 그 연줄이 특정한 이해관계를 위해 맺어진 것이 아니라 웰빙적 가치를 표방하면서 엮인 것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즉 후발대형교회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연줄 형성의 장, 즉 최고의 인맥공장인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인용한 연줄망 연구서는 파워엘리트의 40% 이상이 개신교 신자라는 조사결과를 분석 없이 언급한다. 개신교 인구가 가장 많을 때도 20% 이하인데, 파워엘리트의 비율은 그것보다 두 배 이상 높다는 것은 인맥공장으로서 교회의 역할이 꽤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것이 전쟁의 일상화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후방지대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일 것이다.

 

후발대형교회의 ‘바깥’

 

그런데 후발대형교회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고, 그들의 담론이 다른 교회들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들의 성공을 공유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중소형교회들과 선발대형교회들에서 신자들의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다. 떠돌이신자 중 후발대형교회로 옮겨간 이들도 꽤 많았다. 해서 그런 이들로 인해 많은 대형교회들이 새로 등장했다.

하지만 떠돌이신자들 중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이들도 꽤 많다. 대표적 사례는 신천지 종단으로의 이동이다. 신천지의 성공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2000~2016년 사이에 집중되는데, 그 성공의 정도는 1970~1980년대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되었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비견할 수는 없어도, 두 번째로 꼽을 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성공을 이룩했다. 매년 1만 명 정도의 신자 증가가 그 기간동안 계속되었다. 그 십여 년 간 초대형교회가 매년 하나씩 만들어지는 만큼의 신자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간 신천지 신자가 된 이들의 대부분은 개신교에서 옮겨간 이들이었다. 자만이 주목의 대상이 아니다. 청년과 여성신자들이 꽤 많이 옮겨갔고, 그들 대다수는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떠돌이신자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동한 두 개의 경로가 있는데, 고학력의 중상위계층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이동하여 후발대형교회들이 탄생하는 경로가 그 하나이고, 중하위계층의 청년층과 여성층이 집중적으로 이동하여 신천지를 가장 급성장한 신흥소종파로 자리잡게 하는 경로가 다른 하나라는 것이다.

후발대형교회가 개신교의 거대한 전환을 추동한 원인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다면, 그 교회들의 프로그램과 담론을 따라했던 무수한 교회들, 특히 중소형교회들에서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향한 축복이 사라지고 중산층 친화적인 윤리가 그것을 대체하여 반복적으로 설파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에서 위로받지 못하는 이들은 실망신자가 되고 나아가 떠돌이 신자가 되었다. 그런 이들의 다수가 신천지로 이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광훈 현상은 어떤가? 이 정치적 광신도 현상의 대중은 이러한 대전환과 상관성이 없는가?

 

태극기를 든 노인들

 

시청 근처,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알려진 교회에서 해방신학자로 유명한 이가 강연을 했다. 지식인들이 유난히 많던 그 교회의 젊은 신도 모임에서 초대한 행사였다. 한데 강연이 끝난 뒤 그 교회 토박이임을 주장하는 노년의 신자들 몇이 그 신학자에게 무뢰할 정도로 강하게 면박을 가했다. 그들은 은퇴한 교수, 대기업 임원 같은 중상위계층에 속한 노년의 남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교회에서 태극기집회에 열렬히 참여하는 이들로 널리 알려진 이들이었다.

물론 그 교회 신자들의 평가는 과장되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심정적으로는 강한 동조의식을 갖고 있더라도 태극기집회의 적극 참석자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수십 명 혹은 백여 명이 모인 소규모 태극기집회가 매주 벌어지는 장소에서 적극적으로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소박한 차림, 혹은 행색의 품격이 엿보이지 않는 노년 남성이 많았다. 다른 일보다는 집회 참석이 거의 유일한 사회활동인 사람들이 집회의 단골 참석자들이다.

그들 중에는 개신교계 소종파에 속한 신자들이 적잖았다. 자신들이 만든 유인물을 나누어주는 이들은 영락없이 그런 소중파에 속한 이들이었다. 또 그들은 집회 한 켠에서 현수막을 들고 있거나 개인용 입간판을 들고 있기도 했다. 또 집회가 벌어지는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소형앰프와 마이크를 들고 일장연설을 하는 이도 소종파에 속한 이들이다. 필시 그는 그 종파의 목회자인 듯하다.

중년 남성들은 드물게 있었는데, 그들 몇에게 말을 걸어보니 목소리가 개신교 목사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목사라고 말하는 이는 내가 물은 이들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중년 남성들 중 적극적인 참여행태를 보이는 이는 생각보다 적은 듯했다. 반면 중년 여성들이 일부 보였는데, 그들은 집회 이끔이들의 유도에 맞추어서 대단히 적극적으로 리액션을 하곤 했다. 또 남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수였지만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는 누구 못지않게 우렁찼다.

청년층은 대개 집회 운영에 참여하는 이들로 보였다. 특정 교회 소속이거나 극우적 선교단체 활동가 혹은 비종교적 극우단체 활동가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관전한 십여 건의 소형 태극기집회에서 청년층은 소수였는데, 그들의 성비는 어느 연령대보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집회들을 마치고 가는 이들 몇을 따라가서 그들이 식당과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옆자리에서 엿들어보기도 했고, 또 몇 사람에겐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세 명의 노년 남성과는 좀 더 길게 인터뷰를 나누어보았다.

다른 글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5) 그들 셋은 70대 남성으로 비슷한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1970~1980년대 하층노동자로서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혹독한 노동현장의 폭력성에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고자 함이었다. 부흥회는 그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우연히 산기도원에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훨씬 더 강렬한 종교체험을 하게 되면서 광신도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노동능력이 퇴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그들은 산기도원에 눌러앉아 사는 기식자가 되었다.

한데 1990년대에 그들 셋은 각각 기식하던 산기도원을 나와야 했다. 찾아오는 이들이 없자 경영난에 빠져 결국 매각된 것이다. 그들은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나 가족과 소통에 실패하여 가출하여 쪽방에 살게 되었고, 교회에도 나갔지만 산기도원 식의 신앙으로 무장한 이가 적응할 수 있는 교회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해서 교회에서도 나왔다. 그들은 거리 전도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것에 그들은 너무나 답답했고 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태극기집회에 나갔더니, 거기에는 이야기를 나눌 이들이 넘쳐났다. 신이 났고 마음의 응어리도 씻어진 듯했다. 한데 많은 목사들이 몸 사리고 집회를 외면하는데 전광훈만은 늘 그곳에 있었다. 해서 그들은 조력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전광훈 현상과 후발대형교회

 

산기도원 기식자, 거리 전도자, 태극기집회 열혈참석자, 얼핏 생각해도 이 세 주체는 강한 연결고리가 있어 보인다. 언술도 유사하고 신앙 유형도 비슷하다. 특히 세대주의적 광신도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잘 조합을 이룬다. 산기도원의 전성시대는 1970~1980년대였다. 부흥회가 일상화된 시기였으니 가장 강렬한 부흥회 장소인 산기도원이 성업인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거리 전도자가 된 시기는 산기도원이 속속 사라지던 시대, 1990년대 이후였다. 그리고 거리 전도자들이 현저히 줄어든 2017년부터 코로나 이전 시기까지는 태극기집회가 매주 정례화되었다.

내가 만난 세 명의 노인들이 그런 것처럼, 1970~1980년대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가혹한 시대였다. 그 폭력을 견뎌내는 데 그 시대 교회는 퍽 쓸만했다. 그런 이들이 많았고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가 흘러넘쳤으며, 종교적 엑스터시 상황에 이르면 현실의 혹독함을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 기억은 잠시라도 그 폭력을 감내하는 정신의 자원이 되었다. 그런 상황이 극단화되었을 때 산기도원이 효력을 발휘한다. 많은 도시 하층민들이 교회에서 부흥회를 겪었고, 정기적으로 산기도원에 다녀왔다. 산기도원에 눌러앉는 경우나 거리의 전도자가 되는 것은 좀 극단적인 사례다. 그렇지만 그 시대 다수의 노동자들이 개신교 신자가 되고 부흥회를 접하고 산기도원 신앙에 매료되는 일은 좀더 흔했다.

그런데 대전환의 시대에, 그 흐름을 주도한 후발대형교회 현상은 도시교회와 산기도원의 부흥회를 매우 주변적인 종교성으로 전락시켰다. 난폭한 1970~1980년대에 국가가 주지 않은 폭력의 도피처를 제공한 도시교회나 산기도원의 부흥회가 1990년대에는 청산 목록에 포함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과거가 부정당하는 정신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그런 이들이 세상을 향해 분노할 장소가 거리 전도자들의 부스였다.

그런데 천막당사로 급부상한 박근혜 현상이 등장했을 때,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율이 그의 정치력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는데, 그들의 정체는 누구였을까. 세대주의적 개신교 신자들이 그중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박근혜가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이 용인되어 자택으로 돌아갔을 때 그 집 주변에 모여준 열혈 지지자들이 모여들었다. 근데 그들 중에 세대주의적 신앙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다수 보였던 것이다.

이들 세대주의적 광신도들 중에는 거리 전도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교회의 강경한 근본주의자들도 있었겠다. 아무튼 그들은 박근혜의 열혈 지지자로 활동하면서 정치적 극우주의 성향이 크게 강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전광훈 같은 극우적 세대주의자들과 엮이면서 거리 전도자들은 이념성향이 크게 강화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개신교 극우주의자들의 이념과잉적 신앙이 맹렬하게 불타오르게 된 중요한 계기의 하나는 후발대형교회의 도덕과잉 신앙에 의해 퇴출 대상이 된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일상과 신앙을 연계시키는 신앙의 도덕화 현상은 교회의 통치성이 한결 정교하게 다듬어지는 과정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종말론적 신앙, 특히 세대주의적 신앙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때 도덕과잉 신앙이 포용하지 못한 이들을 이념과잉의 신앙을 주장하는 세대주의적 종교지도자들이 끌어들임으로써 세대주의적 대중은 정치적 극우주의의 성향이 강화된 것이라는 얘기다.

 

[후주]

(1) 전광훈을 세대주의적 열광주의 신앙으로 논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발언 중에는 세대주의적 신앙의 단면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현실 중심의 계산법들을 읽어낼 수 있는 경우도 많다. 해서 그의 언행만 보면 그의 신앙을 어떻게 규정할지에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를 개인이라기보다는 전광훈 현상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의 주위에는 극우주의적 정치성이 강한 세대주의 단체들이 우굴거리고 있고, 그가 단체장으로 내놓은 문서들 속에도 세대주의적 언술들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전광훈을 읽는 키워드로 세대주의에 주목하려 한다.

(2) 신천지는 2000~2016년 사이에 엄청난 성공을 구가했고, 그 이후에는 정체 상황에 있다. 반면 전광훈 현상은 그 맹아는 2천년대 초부터 나타나지만, 본격적인 전개를 2017년 경부터 나타난다.

(3) 일반적으로 대형교회(mega-church)는 주일 대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신자가 2천 명 이상인 교회를 말하며, 초대형교회(giga-church)1만 명 이상인 교회를 가리킨다.

(4) 2005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개신교 인구가 870만 명이 못되었으니, 1990년대 널리 회자되던 신자수는 너무나 과대평가된 것이었다.

(5) 이 내용은 태극기집회와 개신교 우파또 다시 꿈틀대는 극우주의적 기획, 황해문화95(201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