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평화신학포럼의 2020년 연례포럼(2020.06.25) 때 발표된 두 글에 대한 논평 . 두 발표글을 첨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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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의 사회적 공간화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제기
현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탈냉전의 국가적 공간화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행위주체는 ‘국가’다. 그러나 양권석은, 로버트 갈루치나 하토야마 유키오 등에 의지하면서, 국가적 공간화 기획은 한・미・일 동맹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탈냉전의 기획이 냉전의 기획 범주 밖에서 작동할 수 없다는 뜻이다. 현 정부가 ‘운전자론’을 통해 냉전의 기획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본 것과는 달리, 그는 출구가 없다는 전제 위에서 발제를 시작한다. 김희헌은 신학적 레토릭으로서의 ‘원죄’ 개념을 통해 비슷한 논지를 편다. 즉 두 발제자는 현 정부가 추진하는 탈냉전의 국가적 공간화 기획은 민(民)이 주체가 되는 다른 기획을 필요로 할뿐 아니라, 탈냉전의 개연성에 있어서도 근원적 한계를 지닌다는 점에서 새로운 기획이 요청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이 포럼의 제목이 도출된다.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화를 향하여’라는 문제의식이 두 발제자의 공통 논지다.
그렇다면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화 기획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발제자들의 디테일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그들 각각의 해석이다. 여기서 두 번째 공통된 문제의식이 제기된다. ‘냉전의 사회적 공간화 기획’은 한반도를 폭력의 공간으로 만들어 간 과정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견고하게 사람들을 포획했는지를 말하면서 김희헌은 ‘원죄’라는 신학적 레토릭을 활용했고, 양권석은 ‘식민지적 무의식’이라는 탈식민주의적 정신분석학 개념을 활용했다. 그 안에서 대중은 희생자였고, 또 다른 대중은 가해자로서 대중에게 폭행을 가하는 냉전적 질서 공범자요 하수인들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 즉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화 기획을 김희헌은 두 가지 과제로 제시한다. 인식의 자기초월로서의 ‘기억의 재구성’과 실천의 자기초월로서의 ‘용서’가 그것이다. 특히 용서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민’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용서의 지역화’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때 ‘지역화’의 함의는 ‘아래로부터의 용서’라고 할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는 ‘중앙화’와 ‘지역화’의 담론적 성격을 차이보다는 연속성에 방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에게서 ‘아래’는 ‘중앙’의 연장이자 완성이다.
한편 양권석은 식민화된 무의식이 일으키는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문제제기하고 그 상흔을 치유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신의 탈냉전화’를 주장하면서, 그것을 실현해 나가는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용서의 공동체’ 형성을 강조한다. 여기서도 체제의 탈냉전화와 정신의 탈냉전화는 연속적이다. 체제는 구성원들의 신체와 정신을 포획하여 식민화하였다는 점, 즉 지배의 연속성이 강조되고 있다. 하여 그에게서 정신의 탈냉전화는 정신에서 체제로 확장되는 저항의 연속성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마치 하버마스가 체제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강조한 것처럼, 체제에 의한 존재의 정신의 식민화 테제가 들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현대실천이론이 문제제기하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의 자리가 들어 있지 않다. 체제의 식민화 기획이 존재의 몸과 정신에 침투하지만, 그런 침투에 의해 몸과 정신이 영향을 받음에도, 그것을 식민화 기획과는 다르게 임파워먼트되는 주체의 (의식적・무의식적인) 자기기획이 가정되어 있지 않다. 가령, 한 미대학생이 졸업작품으로, 초등학교에 설치된 동상을 그 학교 학생들이 귀신놀이의 소재로 활용하는 비디오아트를 제출한 적이 있다. 여기서 동상이라는 기념비는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일상화하는 기억의 정치학적 장치(ideological appartus)로 작동하고 있다. 그 속에는 해석을 거부하는 단단한 의미체계가 숭고함이라는 메시지를 발화하고 있다. 한데 아이들은 귀신놀이를 통해 그 기억의 정치학적 장치를 무장해제시키고, 다양한 해석이 끼어들 수 있는 부드러운 기억의 정치학적 장치로 바꾸어버렸다. 아이들은 그렇게 체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음에도 그 안에서 식민화된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구 삼아 행복한 자기기억을 형성해낸다. 그것을 현대 실천이론은 주체의 임파워먼트로 해석한다. 한데 양권석의 정신의 탈냉전화 기획은 이러한 일상의 정치학, 그것의 가능성을 가정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두 발제자의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화 프로젝트’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그 논의의 비어 있을지도 모르는, 혹은 명확하기 드러나지 않았던 요소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첫째, 냉전의 사회적 공간화라는 것이, 기억의 왜곡이나 망각의 장치를 통해 냉전체제에 의해 공식화된 국가적 기억 이외의 다른 기억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여 은폐된 체제의 본질적 속성은 ‘폭력과 압제’임을 두 발제자는 공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비판은 냉전체제의 은폐의 정치학이 폭로되는 여러 계기들을 통한 문제제기을 통해 점점 설득력이 있는 담론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냉전의 정치=폭압과 압제’라는 도식은 냉전의 사회적 공간화에 대한 좀더 세밀한 분석의 장애적 요인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가령, 나치체제를 억압적 체제로서만 읽는다면, 그 체제가 ‘대중의 국민화’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읽어낼 수 없게 된다. 조지 L. 모스(George L. Mossee)는 대중 개개인이 아니라 국민화된 집합적 주체가 공공선이라는 것을 합의해가면서 대중독재로서의 나치즘이 탄생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대중의 국민화’라는 테제를 문제제기한 바 있다. 만약 심각한 사회적 재앙이 닥쳤을 때, 그것이 외환위기든 감염병 팬데믹의 위기든, 계산 가능한 희망의 가능성이 잠식되어 버린 상황에 놓인 위기의 대중이 자신의 욕망이 투사되 ‘공공선’이라는 가치에 동조하면서 ‘국민’이라는 집단적 주체를 형성할 때, 거기에서 대중독재의 씨앗이 잉태하곤 한다는 것이다. 나치즘은 바로 그렇게 탄생한 것이라고 조지 모스는 주장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독재체제는 폭력과 압제의 표상만이 아니라 국민적 욕구의 발현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공공성의 형성과 대중의 국민화는, 즉 장 자크 루소적인 ‘일반의지’ 개념을 정치종교로 전유하게 된 집합적 주체로서의 국민의 탄생이 대중독재를 구현하는 나쁜 체제를 소환해냈다는 얘기다.
이것은 두 번째 문제제기와 이어지는데, 냉전의 사회적 공간화를 이와 같이 읽어낼 때, 냉전의 사회적 공간 속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이 과잉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데 그것은 ‘지방화된, 아래로부터의’ 고통을 읽는 지나친 단순도식이 될 수 있다.
가령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육식에 대한 혐오 감정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은 김희헌의 원죄적 질서나 양권석의 식민지적 무의식으로 인한 고통일 수 있지만, 그녀의 행동은 단순히 피해자의 그것이 아니다. 그녀의 이상행위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즉 그녀는 가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사회학자 다니엘 파이어스타인(Daniel Feierstein)을 그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간접희생자’라는 용어를 끌어온다. 즉 집단학살 같은 폭력은 피해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간접피해자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해자까지도 간접희생자가 되는 상황, 그것을 그는 ‘사회파괴’라고 부른다. 사회파괴는 《채식주의자》의 ‘영혜’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와 혐오가 무차별하게 제3자에게 표출되고, 그것이 무차별 반복되는 끊임없는 ‘응징의 와전’이 일어나는 사회를 가리킨다. 이런 사회를 냉전의 사회적 공간화라고 한다면, 여기에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사라지는, 모두가 가해자이며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바로 여기서 세 번째 문제제기가 도출된다. 이와 같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얽힌 폭력의 악순환 상황을 해체시키는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화 기획에서 중요한 요소를 김희헌은 기억의 재구성이라고 불렀고 양권석은 정신의 탈식민화라고 했다. 한데 그러한 탈냉적적인 기억의 재구성, 정신의 탈식민화 기획이 소환하는 것은 ‘균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간과될 수 있다.
비디오아트 〈두려움의 지도〉에서 두 체제 접경지대의 주민들에게서 한국전쟁 당시의 ‘지하공간’에 들은 자우녕 작가는 그 지하공간의 지도를 그린다. 한데 그 지도는 이념의 지도가 아니라 두려움의 지도다. 그 두려움의 대상은 이념의 저편만도, 이념의 이편만도 아니다. 거기에는 이웃의 시선도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여 주민들 각자는 이웃도 모르는 지하공간을 만들었다. 하여 두려움의 지도가 함축하고 있는 지하공간의 냉전적 사회적 공간은 균질된 기억을 담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를 의심하면서 만들어낸 은폐의 기술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주민들이 그것을 은폐하지 않고 진술한다는 것은, 그 질술의 자리가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이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때에 폭로되는 것은 그들 각자의 서사들이다. 할머니와 손주에 관한 얘기, 언니 누나와 얽힌 얘기 등, 두려움의 지도는 그 속에서 수많은 기억들을 소환해낸다.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화는, 국가를 매개로 하여 진행되는 공식기억의 재구성과정에서는 균질된 재해석들이 필요하겠지만,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기억들의 재구성 과정에서는 수많은 사적인 기억들이 서사를 이루며 사방팔방을 향해 소곤소곤 발설되어 이야기하는 소음의 난장처럼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그 안에서 서로 소통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각자 파편화된 기억들이 서사로 재구성되어 발설되면서 각자는 기억을 왜곡했던 냉전적 사회공간의 억눌림에서 해방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곳, 그것이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이 아닐까.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은 새로운 균질된 기억을 만드는 공식적 기억의 재구축의 공간만이 아니라, 소리의 난장처럼 무수한 기억들이 서사화되는 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여 태극기 할베들에게서 이념의 장치가 벗겨지고 그들 각자가 왜곡된 자신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기억해내고 그것이 어떤 새로운 서사로 만들어지는 장소,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킨 촛불을 든 시민들이 자신에 기억들, 가족사, 친구관계, 일터에 얽힌 것들을 흘러내리는 촛농 속에 함께 흘려보내는 장소, 그 장소들의 총합이 바로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이 아닐까. 그것은 균질된 기억의 장소들이 아니라 균질화될 수 없는 기억의 장소들이 탄생하면서 일으키는 담론의 공간적 효과가 아닐까.
나는 두 발제자의 탈냉전의 사회적 공간화 기획에 대해 어쩌면 그 속에 간과되었을지 모르는 것들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들의 기획에 이미 동참했다. 우리의 동참은 이렇게 이견일 수도 있는 말들을 보태면서 이루어진다. 그럼으로써 공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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