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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9 / 코린트의 바울(2) - 에클레시아, 그곳에서 벌어진 일

[가톨릭평론]에 연재 중인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9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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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의 바울(2) : 에클레시아, 그곳에서 벌어진 일

 

 

 

소아시아 지역에서 바울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였다. 이곳에서 그는 안티오키아를 대표하는 바르나바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런데 지난 글들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바르나바와 많은 점에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입장을 달리하는 점도 있었다. 그 차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더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소명 의식의 차이는 그로 하여금 독자노선을 취하게 했다. 그것이 생면부지의 땅인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로 선교 여정에 오른 이유였다. 한데 말이 좋아 독립선교사지 누구의 후광도, 후원도 없이 떠난 여정은 그야말로 험난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필리피, 테살로니키, 베레아, 아테네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느 곳에서도 길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도망자 신세가 되어 수많은 날을 풍찬노숙하다 겨우 찾아온 곳이 코린트였다.

한데 여기서 기다린 것은 감옥이었다. 고귀한 계층도 아니고 대부호도 아닌, 경계선 밖에서 객지를 따라 떠도는 자의 감옥살이가 평탄할 리 없다. 그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유일한 예외가 고린도후서12,7이다. “내 육신에 가시, 곧 사탄의 심부름꾼(σκολοψ τη σαρκι αγγελος Σατανα)이 나타났다고 말이다. ‘가시라고 번역된 스콜로프스(σκολοψ)는 성서에는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하지만 다른 고대 헬라문헌들에서는 쇠꼬챙이 같은 것으로 목을 찌르며 고통을 가하는 형벌이나 고문도구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였다. 필경 엄청난 통증에 시달렸다는 뜻이겠다. 해서 그것이 몸 안에서 발작을 일으키면 바울은 지옥의 사자(직역하면 새한글성서처럼 사탄의 심부름꾼이다)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데 이 표현이 왜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에만 나올까. 아마도 이곳의 그리스도파 사람들은 바울이 그 통증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감옥살이가 그 통증을 도지게 한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곳에서 드디어 견고한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그것을 그는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라고 불렀다. 이 단어가 사용된 빈도를 보면 사도행전고린도전서가 각 23회로 제2성서 문서들 중 가장 많다. 고린도후서9회를 포함하면 이 단어는 압도적으로 바울과 고린도가 결합되어 있을 때 사용된다. 고린도전서고린도후서를 합해도 사용된 단어 수는 사도행전60%에 불과하다. 그만큼 자신이 만들어낸 첫 번째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코린트의 에클레시아가 바울에게 얼마나 간절했고 자랑스러웠는지를 알 수 있다.

 

코린트 에클레시아 출현의 내력

 

사도행전18,1~18은 바울이 코린트에서 16개월 동안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는 압축적으로 이야기한다. 세 장소가 이야기 흐름의 키워드다. 첫 번째 단락은 이스라엘계 회당이다.(1~6) 그리고 두 번째는 에클레시아(7~11), 세 번째는 프로콘술인 갈리오의 재판정(11~18)이다. 이 세 장소와 얽힌 이야기는 순차적으로 벌어진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회당에클레시아재판정이라는 장소성의 전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데 이렇게 장소가 바뀌게 되는 것은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의 심각한 갈등 상황 때문이다. 늘 그랬듯이 바울은 코린트의 회당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해서 그의 동역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에 속하는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를 만났다. 회당의 지도자(αρχισυναγωγος. 아르키쉬나고고스)로 표기된 두 명의 유력인사인 그리스보(Κρισπος, 크리스포스)와 소스데네(Σωσθενης, 소스떼네스)도 바울을 따르게 되었다.

물론 모든 이들이 그를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 반대자들이 누구인지 사도행전본문은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들인지는 어느 정도 추정 가능하다. 우선 그들은 매우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갖고 있다. 말했듯이 회당의 지도자로 불리는 이들이 두 명이나 바울을 지지했음에도, 또 꽤 재력이 있는 사업가도 그의 편에 섰음에도, 바울은 더 버티지 못하고 회당애서 밀려나야 했다. 이때 그가 내뱉은 일갈은 그 갈등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심각한 모욕을 당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멸망하고 말 것이오. ...... 이제 나는 다른 종족들에게로 갈테요!”(사역. 18,7) 이 말속에는 중요한 정보가 하나 더 있다. 갈등은 다른 종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렇다면 반대자는 강성 유대주의자들이었다는 얘기다. 그들은 다른 종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던 자들이었다.

아무튼 바울은 회당의 주요 인물들 몇을 동지로 얻었다.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 그리스보와 소스데네가 바울을 따라 회당을 떠났다. 또 티티우스 유스투스(Titius Justus)라는 인물도 바울 편에 선 이인데, 그의 집은 회당의 쉬노모루사(συνομορουσα)라고 묘사되어 있다. ‘쉬노모루사는 직역하면 벽을 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바울파가 회당에서 밀려났을지언정 여전히 강력한 힘이 있어서 그 옆 건물에서 모임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라틴식 귀족의 이름이다. 이것으로 과한 추정은 금물이지만, 그래도 그가 로마의 지휘관급 퇴역병(legatustribunus)(01) 출신이거나 로마에서 밀려난 귀족(nobilis emarginatus) 출신 인사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개연성이 있다. 이것은 코린트의 이스라엘계 회당이 도시의 업타운 지역, 즉 성내의 유력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바울의 에클레시아도 그런 곳에 있었다는 얘기다.

아무튼 바울이 축출될 때 유력한 헬라계 인사들이 같이 이탈했다. 그렇다면 회당사회에서는 유대주의적 헤게모니가 한층 강력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지역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은 그만큼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코린트 사회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위상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은 이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표현했다. ‘밖으로라는 의미의 전치사 에크(εκ)부르다라는 뜻의 동사 칼레오(καλεω)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그리스의 폴리스 사회에서 시민총회를 가리키는 정치적 단어인데, 바울에게서 이 단어는 회당사회 혹은 지역사회의 질서 바깥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새로운 공동체라는 함의로 사용되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혜가 누구에게도 어떤 차별도 없이 선사되는 장소를 뜻했다. 즉 누구에게나 열린 공동체인 것이다.

당시 이런 사상은 바울만의 주장은 아니었다.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사회에서도 그런 포용주의 신학이 발달했었다. 실제로 회당사회는 유대아인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계 이민자, 시리아계 이민자, 블레셋계 이민자, 요르단 동편 족속들의 이민자들도 포괄하는, 곧 가나안 출신 이민자들을 포용하는 곳이었다. 하느님이 그들을 모두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는 신학이 회당사회에서 발달했다. 심지어 비가나안계 사람들도 받아들이는 신학도 제기되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도 여호와와 함께하여 그를 섬긴다고 하자. /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고 /  여호와의 종이 된다고 하자. / 그 누구라도 안식일을 지켜서 속되게 하지 않는다고 하자. / 내가 맺어 준 언약을 굳게 붙잡는다고 하자 / 그러면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데려와서 / 나의 기도의 집에서 기뻐하게 하겠다. / 그들의 다태우는제물(번제물)들과 희생제물들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겠다. /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을 위해서! (이사야서567절)

 

이스라엘 귀환공동체의 지도자인 3이사야의 신탁으로 알려진 이 구절은 아마도 기원전 3세기 이후의 문헌일 가능성이 있다. 초기 귀환공동체가 형성되던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는 문서를 만들고 유포시킬 만큼의 사회적 인프라가 형성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집트의 헬레니즘 제국인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 지배하던 때인 기원전 3세기에 와서야 지중해 전역에 걸쳐서 수많은 문헌이 만들어졌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튼 이 신탁의 내용은 놀랍게도 이스라엘 중심주의에 반하는 포용주의 신학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특히 팔레스티나 바깥에서 더욱 열렬히 받아들여졌다. 하여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φοβουμενοι τον θεον)개종자들(επιστρεφομενοι)이라는 포용주의적 용어가 신학화되기도 했다.

한데 1세기 전반기 어간부터 빠르게 강성 유대아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수많은 회당들이 휘둘리고 있었다. 바울도 한때 그런 강성 유대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파로 전향했고, 매우 열정적으로 포용주의 신앙운동에 매진했다. 아마도 안티오키아의 바르나바는 바울에게 그리스도 신앙의 이러한 새로운 비전을 불어 넣어준 장본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바울은 바르나바와 견해를 달리하게 되었다. 바르나바의 포용주의는 유대아 종족 중심주의에 반대하면서 모든 이들에게 열린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장했지만, 예루살렘에서 예수 가족과 제자들이 이끄는 예수공동체를 존중했다. 해서 그는 유연하게 예루살렘의 예수파와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파 사이의 갈등을 최소화하려 했다.

한데 바울은 그런 바르나바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바르나바는 유대아주의에 어느 정도 물들어 있는 예루살렘의 예수파에게 부분적으로나마 주도권을 양보할 수 있는 이들을 대변했다. 그들은, 1천 년 넘게 제국에 의해 짓밟힌 조국을 떠나 떠돌이로 살았던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에게 구원의 우선권을 양보할 마음의 자산을 가진 이들이었던 것이다. 해서 유대아주의자들이 할례를 주장하고, 유대아 절기를 지키라는 주장을 존중해주어도 큰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한데 바울이 대변하는 이들은 훨씬 절박한 이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이방인들이 많았고 여자들도 많았다. 노예도 적잖았다. 절기를 지킬 여유도 없었고, 할례를 받고자 해도 받을 수 없는 이들이 다수였다. 그러니 바르나바의 유연함이 바울에게는 한가한외교적 화법에 지나지 않았다. 하여 바울은 바르나바에 반대하면서 안티오키아의 영향권 바깥인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로 떠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독립선교사로 떠돌던 그가 코린트에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에클레시아를 만들어낸 것이다.

모두에게 차별이 없다는 것은 당시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전복적 상상력이다. 그런 말조차도 허용될 수 없는 그것을 바울은 주장했다. 어떤 국가의 법도 회당의 율법도 동의하지 않는 그런 비상식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 그것이 바로 에클레시아다. 그리고 그런 사건의 질서를 그는 그리스도 안(εν χριστω)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이 어구는 바울의 친서에 32회나 사용된다. 바울 위서에서도 40회 쓰였다. 반면 제2성서의 다른 문헌들에는 단 한 번 나온다. 즉 이 용어는 전적으로 바울계 그리스도파의 용어다.

그리고 바울은 이 어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을 구별짓는다. 밖에서는 통하지 않는 은혜의 질서가 구현되는 곳, 그런 사건의 장소가 바로 에클레시아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이 동거하기는 쉽지 않다―에클레시아에서 벌어진 일

 

지난 호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운영하는 천막공장에서 기거했다. 성밖, 선창가다. 국제도시의 항만으로 오가는 이들은 너무나 많고 다양했다. 왕들과 귀족에서 천민과 노예까지. 하지만 천막공장이 있는 곳은, 그런 항구 중 가장 더럽고 악취가 풀풀 나는 곳에 있었다. 바로 하느님나라를 물려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끓는 곳이다. 고린도전서6,9~11에 열거된 그런 사람들의 공간이다. 바로 도시의 최하층민이 사는 곳이다. 바울은 자발적으로 그곳에 들어가 생활했다.

욕설과 속임수, 약탈과 폭력이 넘쳐 나는 곳이다. 바울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다수를 에클레시아로 초대했다. 더러운 선창가의 민중이 성안으로 들어가 저택에서 벌어지는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지중해의 뙤약볕 아래에서 땀에 찌든, 씻지 않은 몸들로 채워진 저택의 거실은 악취가 진동했다. 더구나 그들의 말투나 행동거지도 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살면서 한 번도 지도자의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이 신비체험을 하게 되어 공동체에서 강한 발언권을 갖게 되었을 때, 그들의 언행은 종종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이런 상황은 공동체 내의 유력인사들 사이에서 바울의 지도권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가령, 바울보다 더 유명하다는 인사들의 가르침을 운운하면서 바울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도 생겼다. 그것은 필경, 바울이 주장한 차별 없는 은혜라는 것이 일으키는 문제가 어렵게 만든 공동체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우려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함은 차별 없음이라는 주장만으로는 다 설명되지도 해소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또 자기 자신도 생각과 말투 곳곳에서 몸에 밴 차별을 모조리 떼어내지 못했다. 알게 모르게 그는 실언과 망발로 사람들을 상처나게 했다. 이럴 때 지도자는 종종 도망치는 구실을 만들곤 한다. 자신이 상처받지 않을 만큼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떠나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코린트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간 이유였을까. 그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코린트를 떠난 좀더 직접직인 이유는 아마도 갈리오의 법정에서 패소해서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은 유대아주의자들이 바울을 코린트의 최고지도자(프로콘술)인 갈리오의 법정에 기소했다고 하는데(18,12), 어쩌면 에클레시아의 유력인사들 몇도 바울의 기소에 공조했을지 모른다. 고린도후서11,13거짓 사도들’, ‘속이는 일꾼들이라는 표현은 내부의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를 가리킨다. 지난 호에서 말했듯이 갈리오가 바울에게 실형을 내린 주된 이유는, 율법에 어긋나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선창가의 사람들, 곧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부랑자들인 오클로스를 선동하여 사회를 파괴하는 극단주의적 대중정치(ocholcracy, οχλοκρατια)를 도모할 우려가 있는 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에클레시아 내에서 선창가의 오클로스들의 모습에 진저리쳤던 일단의 엘리트들은 바울의 민중론이 자칫 이런 위험한 대중정치로 귀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수 있다. 해서 그는 패소했고 구금되었다.

하지만 그런 혐의가 있다고 해도 그런 행동을 도모하지 않았으니 당국이 그를 계속 붙잡아 둘 수는 없는 일이다. 해서 그는 얼마 후 석방되었다. , 조건이 붙었을 가능성이 있다. 강제추방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는 코린트의 서쪽, 에게해로 이어지는 항구인 겡그레아로 갔다. 거기에서 선창가 민중사역에 헌신하는 그리스도파 여성 지도자(로마서16,1)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뵈뵈(Φοίβη. 포이베). 로마서16장에서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많은 인사들을 열거할 때 첫 번째로 언급할 만큼, 로마의 그리스도파 사이에서도 정평이 있는 대단한 지도자다. 한데 그녀도,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처럼, 로마에서 추방당해 이곳으로 온 이였다. 그곳에서 바울은 머리를 삭발했다. 그리고 에페수스로 떠났다. 이 삭발이 어떤 의미인지, 그 다음 사역지인 에페수스에서 펼친 그의 두 번째 사역은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두 번의 글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후주]

(01) 레가투스(legatus)는 로마군단의 총사령관급 지휘관, 트리부누스(tribunus)는 부사령관 혹은 참모장급 지휘관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