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평론]에 연재 중인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10 - 〈로마서〉, 뒷 이야기'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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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뒷 이야기
바울은 코린트 서편 항구인 레카이온(Λεχαιον)의 천막공장에서 기거하면서 사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안식일엔 성안, 행정과 무역, 종교의 복합중심지인 아고라(Agora)에 있던 에클레시아로 갔다.(01) 선창가에서 대략 2.5km쯤 떨어진 곳이니 그리 멀지는 않다. 하지만 성안의 중심지인 아고라와 선창가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거리는 너무나 멀다. 성안이 시민의 공간이라면, 레카이온 선창가는 민중의 공간이다. 더욱이 성안에서도 핵심공간인 아고라는 권력의 중심지다. 그런 곳에 만들어진 바울의 에클레시아에는 권력층에 속하는 인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중상위층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성안의 하층민이나 노예, 여성들이 모여들었고, 심지어 레카이온 선창가에서 바울에게 동화된 최하층 민중도 바울과 함께 안식일 예배에 참석했다.
해서 코린트의 에클레시아는, 바울이 꿈꾸었던, ‘그리스도 안’에선 누구도 차별 없는 나눔과 섬김의 이상을 품은 공동체로 굳건히 자리잡았지만, 그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사회의 인습적 질서인 계층적, 인종적, 성적 격차가 에클레시아에서만 연기처럼 사라질 수는 없었다. 모두가 바울의 평등주의적 가르침을 가슴속에 간직하며 되새기고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계층적, 인종적, 성적 기억은 골수에 각인되어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 끊임없는 모순이 그들을 휩싸 버렸고,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서 바울의 말과 그들 모두의 몸의 기억이 일으키는 갈등은 끊임없이 그들을 함정에 빠뜨렸고, 종종 심각한 갈등으로 표출되곤 했다. 그런데 그것도 대개 변형된 양상으로 나타나곤 했다. 게다가 갈등 당사자들은 그 변형된 양상이 본질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런 혼란에 개입하는 바울의 개념이 ‘몸과 지체’론이다. 곧 하나인 몸(σωμα, 소마)과 연결되어 있는 ‘지체들’(μελη, 멜레)이다. 해서 별볼일 없어보이는 한 지체가 아프면 몸 전체가 병들게 된다는 것이다.〈고린도전서〉 12장)
그러나 바울은 이 도시의 최고통치자인 갈리오의 법정에 기소되었고, 죽을 만큼 혹독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리고 아마도, 석방 조건으로 추방령이 내려졌다. 바울의 1차 목적지는 에게해 건너 소아시아의 에페수스다. 이후 에페수스는 코린트에 버금가는 바울의 제2의 거점이 되었다.
이 여정에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가 동행했다. 그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하이던 서기 49~50년경 로마에서 추방당한 이들로, 코린트에서 바울의 가장 중요한 동역자였다. 바울일행이 코린트를 떠난 것은 51~52년경이다.
뵈베를 만나다
에페수스로 가려면 코린트 동편 항구인 겡그레아를 통해야 한다. 저 유명한 뵈베(Φοιβη, 포이베/피비)(02)가 있는 곳이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로마시 그리스도파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바울은 생면부지의 공동체인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마서〉)에서 자신과 친밀한 인사들 30여 명을 나열하는데. 그중 첫 번째로 거명된 이가 뵈베다. 모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익히 아는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었겠지만, 그중 그녀가 첫 번째 인물이라는 얘기다.

그런 지도자가 왜 로마를 떠나게 되었을까. 프리스킬라, 부부와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말했듯이, 프리스킬라는 로마의 귀족 출신으로 보인다. 한데 ‘듯보잡’ 이스라엘계 이민자인 아퀼라와 결혼하면서 야훼신앙에 귀의했고, 그리스도파의 일원이 되었다. 얼마 후 그들은 그리스도파가 연루된 한 사건에 휘말려 추방되었다.
선대황제인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서기 41~54년 재위) 치하에서 ‘크레스투스’라는 이의 선동으로 소요가 일어났다. 당국은 그렇게 기록했다. 여기서 ‘크레스투스’(Chrestus)란 ‘크리스투스’(Christus)를 혼돈한 표현으로 보인다. 라틴어 크리스투스를 헬라어로 표현하면 ‘크리스토스’(Χληστος), 곧 그리스도다. 당시 지중해 곳곳에선 이렇게 혼돈하는 일이 빈번했다.(03) 하여 크레스투스 운운하는 기록에서 추론되는 사실은,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 전인 30년대 초, 팔레스티나에서 황제를 참칭한 대역죄로 처형당한 그리스도(04)를 추앙하는 이들이 로마시의 이스라엘계 회당에서도 출현했고, 그들이 클라우디우스에 반하는 정치적 소요를 일으켰으리라는 것이다.
뵈베도 그때 추방된 인물로 추정된다. 아니 실은 그녀는 그 소요를 이끌었던 지도자이거나 그 소요가 발발했을 때 그리스도파 지도자였던 탓에 추방된 이일 수 있다. 아무튼 그녀는 여전히 로마의 그리스도파 인사들 사이에서 널리 존경받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랬기에 바울이 편지에서 그녀를 제일 먼저 거명한 것이겠다.
이름으로 추론하면, 그녀도 로마의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한데 코린트에 와선, 프리스킬라처럼 도심에서 거처를 잡은 것이 아니라 동편 겡그레아 항의 선창가에서 살았다. 민중의 공간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곳의 민중사역자가였겠다. 바울의 에클레시아가 복합계층의 신앙공동체였다면, 뵈베의 예수공동체는 거의 민중으로 구성된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겡그레아에서 머리를 밀었다. 그것이 어떤 상징행위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굳은 결의를 ‘많은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행위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집례하는 이는, 바울 자신도 존경해마지 않는, 널리 알려진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뵈베다. 로마시의 위상을 염두에 둔다면, 당대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도파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바르나바에 견줄 만한 최고지도자가 아니었을까 한다. 암튼 그녀의 집례로 머리를 깎는 의례를 마친 뒤 그는 떠났다.
한데 이 의례 전후에 얽혀 있었을 법한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을 추정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만남 직후에 저 유명한 〈로마서〉가 쓰였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겡그레아에서 이 편지를 썼을 것이다. 분량으로는 바울의 모든 서신 중 가장 길다. 내용도 다른 서신들보다 좀더 깊다. 또한 주장이 강경하다. 한데 그 수신자들은, 이제까지 보냈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생면부지의 사람들이다. 그만큼 바울은 공들여서 글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근데 편지의 목적이 긴급한 의사전달과 관련이 있으니 지체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뵈베가 그의 서신을 들고 로마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뵈베는 바울의 편지가 필요했고, 바울은 강력한 전달자인 뵈베가 필요했다. 왜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했을까. 그리고 그 긴급성이란 무엇일까.
우선 생면부지의 공동체에서 일어난 긴급한 사안을 바울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 든다. 로마 출신인 프리스킬라와 적어도 2년을 함께 하면서도 듣지 못했던 소식을 말이다. 답은 명확하다. 뵈베가 그 소식의 진원지였을 것이다. 로마의 그리스도파를, 과거부터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인물인 데다, 바울과 만나고 있는 그 시점까지 전개되는 소식에 가장 밝은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 소식이란 무엇일까.
바뀐 정세
클라우디우스가 죽었다. 숨 막힐 정도로 안정된 행정의 달인, 그의 치하에선 제국 전체가 조용했다. 근데 그가, 소문대로라면, 아내 아그리피나의 독살로 사망했다. 치욕적 죽음이다. 사회가 곳곳에서 들썩였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랬다. 그들은 신의 심판의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추방된 이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이제 진짜 주의 날이 도래할 때가 되었으니, 그날을 맞이하는 행동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들이 계획한 저항 방법은, 〈로마서〉를 통해 추정해본다면, ‘납세거부운동’이었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뜬금없이 이렇게 말한다. “세금 받을 사람에게 세금(φορος, 포로스)을, 관세 받을 사람에게 관세(τελος, 텔로스)를 내십시오.” 여기서 한글성서가 잘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포로스’는 직접세를, ‘텔로스’는 간접세(상품세, 관세, 시장세 등)를 가리킨다. 직접세는 로마시민에겐 면세되었다. 그러나 이민자들은 납세의 의무를 져야 했다. 간접세는 모두에게 부과되었는데, 로마시민은 병역의 의미를 졌으니, 상업종사자들이 별로 없었던 반면, 이민자들은 다수가 상업활동에 종사했다. 요컨대 바울이 언급한 세금들은 로마시의 이민자들에겐 예민한 문제였다. 근데 바울은 세금을 내라고 권한다. 그 말은 수신자들, 그러니까 로마시의 그리스도파 사람들 사이에서 납세거부운동의 조짐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도시를 관통하는 티베르 강 건너편을 가리키는 ‘트라스테베레’(Trastevere) 지역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살았다. 이스라엘계 회당도 여기에 있었다. 한데 그 규모가 족히 1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강 이편 도심 지역 곳곳에는 상인들과 반쪽로마인(half-Romans)(05)들의 집단거주지인 수부라(Subura)가 있었다. 그 규모를 합하면 족히 5만 명은 되었다. 이 지역의 극빈층이나 노예는 면세자들이겠지만, 그들은 세금을 내는 이들의 예속인들이니 독자적인 이해관계로 자신을 해석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요컨대 이곳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납세자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러니 납세거부운동으로 인해 이들 지역에서 적잖은 저항의 불길이 타오를 것이 기대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것에 반대한 것일까. 그가 표현한 것처럼 ‘권력은 하느님이 준 것’이니 정당하기 때문일까. 그렇게 바울이 로마권력에 충성스러웠던 인물인가. 혼란스럽다. 해석이 필요하다. 해서 당시의 특수한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울의 주장에 어떤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네로가 즉위했다. 부친의 갑작스런 서거로 불과 17세인 이가 황제가 되었다.(06) 게다가 부친은 자신을 승계할 자로, 아내의 전남편의 아들인 네로보다는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해서 네로의 모친이자 황후인 아그리피나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다. 이런 사정은 네로의 집권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시사한다. 수많은 권력층이 황위를 노렸고, 또 황제를 좌지우지하려 했다. 이것은 네로의 정치가 귀족층과 강한 대립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 실제로 그는 유례없이 많은 원로원 의원을 갈아치우고, 그 자리를 속주 출신 인사로 대체했다.
네로는 귀족 대신 시민층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끊어들이려 했다. 해서 면세혜택을 받는 시민의 범위를 최대로 확장했고, 콜로세움(Colosseum)에서 수없이 많은 검투・경마행사와 축제를 열었다. 훗날 네로 축출 세력의 계보를 있는 문필가인 유베날리스(Juvenalis)는 네로 시대엔 로마시민들이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에 취해버렸다고 풍자했다. 귀족의 눈에 이 축제들은 놀고먹기만 하는, 로마의 기강이 사라져 버린 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데 다른 관점에서 이 축제들은 시민을 정치적 주체로 호출하는 장치였고, 또 그들에게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복지의 통로였다. 요컨대 네로는 서민친화적 통치자였고, 그들과 함께 귀족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뿐만 아니라 이민자 집단에게도 복지혜택을 확대했고, 곡물 공급의 안정을 중시함으로써 시장의 불안정성을 개선하려 노력했다. 이것은 귀족의 횡포와 독과점을 견제하는 정책이기도 했다.
네로는 시민층과 서민층의 환호를 받는 데 성공했다. 하여 그는 정국의 주도권을 빠르게 장악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유능한 참모진을 둔 덕이 컸다. 당대 최고의 정치가로 꼽히는 세네카, 치안을 효과적으로 장악했던 부루스 같은 유능한 인사들이 네로 정권 초기에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문제적 바울
뵈베가, 이름에 걸맞는 신분의 사람이라면, 그녀는 제국의 중앙정치에 관한 정통한 정보를 가질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는 인물임을 뜻한다. 물론 바울은 이런 고급정보에 다가갈 수 없었다. 해서 뵈베와의 만남을 통해 바울은 더 큰 세계관으로 세계를, 그리고 로마를 해석하는 안목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 바울이 지금까지 어느 서신에서도 말하지 않았던 논점을 제기한다. 납세를 해야 한다고. 이유는, 권력은 하느님이 부여한 것이니 순종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13,1~6) 이런 논리대로라면 불의한 권력도 존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주님’(κυριος, 퀴리오스)이라고 부른 그리스도를 처형한 권력도 정당한가, 그랬기에 예수의 죽음도 신의 계획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4,25) 논리만 보면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모든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다고 강변하면서, 차별을 담론화하는 자들과 싸운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두 명의 바울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해서 우리는 당시의 정세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네로가 즉위했다. 그에게는, 귀족이 아니라, 시민 친화적, 때로는 민중 친화적 요소가 있다. 그렇다면 네로의 집권은, 민중론자들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로 읽혔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최소한, 네로 집권 초기의 정세를 낙관한 것일까. 이 편지를 전달한 뵈베도?
그렇지만 이 서신의 서두를 보면 그는 네로 체제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로마 황제와 귀족층, 그들은 서로 정적인 듯이 보이지만 실은 예외없이 부패와 타락으로 점첨된 자들에 다름 아니다. 해서 그는 독설을 퍼붓는다. ‘썩어 없어질 것’에 다름 아니라고 말이다.(1,18~32)
그렇다면 어쩌면 그는 대중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던 새 황제를 자극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트라스테베레와 수부라의 이민자와 서민층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할 모반은 필시 실패할 것이다. 한데 그 실패는 공동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지만, 특히 민중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들은 사실 납세의무자가 아님에도 주인의 뜻에 따라 참여했을 것이지만, 제일 먼저, 제일 가혹하게 죽임당하거나 모진 고문으로 불구가 될 만큼 혹독한 응징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뵈베나 프리스킬라처럼 고귀한 계층의 지도자들은 추방당할지언정 죽거나 모진 고문을 받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하여 바울은, 그리고 뵈베는 정세에 대한 착각에 기반을 둔 무모한 모험주의를 경고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네로를 향한 공격이 결국은 더욱 반민중적인 귀족세력에게 더 유리한 정치적 기회를 만드는 셈이 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정치공학적 판단도 있었을 것이겠다.
그렇다면 어쩌면 바울과 뵈베는 네로의 정치를, 충분하지는 않지만, ‘전략적으로 지지할’ 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뜻에서 권력에 순종하라고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일종의 ‘공개 가면’(public transcript)의 말일 수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정치적 전략의 언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위에서 언급한 ‘썩어 없어질 ... 모양’ 운운이 시사하듯 ‘은닉 대본’(hidden transcript)으로서 이 서신이 읽힐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로마서〉에는 그들의 ‘저항의 정치학’이 담겨 있다.(07)
그래서 바울이 필요했다
이 서신은 매우 긴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금은 저항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은 아닌’ 그 시간성, 그 정세의 맥락을 해독해내는 것은 뵈베의 영역이다. 그녀는 중앙정치의 복잡한 정치공학을 해독해낼 줄 아는 인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덕에 바울은 민중의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는 정치적 개입이 어떤 것이어야 할지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뵈베에게는 ‘바울의 의인론’ 같은 신학이 없었다. 탈계층적이고 탈종족적이며 탈성적인(desexualolgical) 민중 주체를 다루는 신학은 동시대 누구에게도 엿볼 수 없는 바울 고유의 신학적 성과인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의인론을 유대아 중심주의적 신학뿐 아니라 로마의 제국신학에 대항하는 큰 스케일의 담론으로 재해석했다. 1장에서 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의 타락과 부패를 논하고, 2장에서 유대아 중심주의의 실패를 다룬 뒤에, 3장 이하에선 그 모든 과오는 ‘저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는 논점으로 전환된다. 해서 ‘유대아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3,9)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은 의롭지 않은 모두를 의롭다고 인정해준다는 ‘의인론’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뵈베는 이런 신학이 필요했다. 로마의 그리스도파 사람들에겐, 자신과 저들을 분리하고, 그런 이분법적 틀 안에서 극단적 모험주의를 도모하는 것에 제동을 걸 신학 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모든 기획은 배제된 이들의 존엄이 간과되지 않는 가운데서 모색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런 문제의식을 신학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과 뵈베의 기획은 성공했을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납세거부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필시 그들 중에는 바울의 서신을 저항의 ‘은닉 대본’으로 공유하면서 그의 에클레시아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이 있었던 듯하다. 〈로마서〉는 그곳에서 그런 문제의식과 함께 유통되었다. □
[후주]
(01) 고대코린트시 유적에서 ‘히브리인들의 회당’이라고 적힌 문설주가 발견되었다. 이 문설주는 서기 4~6세기의 것으로 보이는데, 바울 시대인 1세기 중반에 있었던 회당을 중축한 건물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 회당은 시내 한폭판인 아고라 광장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도행전〉 18,7에 의하면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회당과 벽을 맞대고 있던 건물에 있었다.
(02) 원래 발음이 ‘푀이베’이지만, 바울 시대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피비’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글성서는 그녀를 뵈베라고 표기했다.
(03) 당시 헬라어에서 ‘이’(ι) ‘(장음)에’(η), 이중모음 ’에이‘(ει)는 발음상 혼돈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04) 〈마가복음〉 15,26에 의하면 그의 죄목은 ‘유대아인들의 왕’이다.
(05) ‘반쪽 로마인’이라는 표현은 내가 임의로 붙인 것이다. 매매춘업소에서 일하는 자들, 로마계 해방노예, 범죄자들 등을 이렇게 분류한 것이다.
(06) 제국 창건부터 클라우디우스까지 네 명이 선황제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심지어 티베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는 50대에 황제가 되었다.
(07) 이것은 정치인류학자인 제임스 스캇(James C. Scott)의 용어다. 그의 책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은닉 대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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