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보호와 학대 사이에서 춤추는 위선
한 동거 커플에게 뜻하지 않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어난 아기를 남자는 고아원에 보내자고 했고, 여자는 그럴 수 없다고 버팅깁니다. 결국 그들을 헤어졌고, 아이는 여자가 키우게 됩니다. 실은, 이런 경우 흔히 그렇듯이, 여자는 엄마이지만 언니였고 여자의 엄마는 아이의 할머니지만 동시에 엄마였습니다.
한 여자 가수가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이야깁니다. 밝기만 해 보였던 모습 이면엔 그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아비 없는 아이를 향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일찍부터 알아차렸던 모양입니다. 또래 꼬마들의 놀림도 아이에겐 회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왔겠지요. 할머니이자 엄마, 엄마이자 언니라는, 할당된 가족 역할의 혼란은 종종 할머니도 엄마도 언니도 부재한 상황으로 아이를 내몰았을 겁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환경은 ‘비정상’의 존재에게 가해지는 폭력 앞에 그녀를 내던졌습니다.
거짓말을 합니다. 이 폭력을 예감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입니다. 허구의 아버지를 만들어내고, 정상적인 가족의 일원인 듯 생활기록부를 조작합니다. 그 조작을 사실인 듯 보이게 하려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계속합니다.
선생님이 속고, 또래 아이들이 속아 넘어갑니다. 한데 문제는 마지막까지 속지 않는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하여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아이’라는 자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겠지요. 비정상에 가하는 사회의 폭력을 회피하기 위해 ‘나쁜 아이’가 되어야 하는 비극적 자의식, 내가 그녀의 인터뷰를 보면서 추론해낸 그녀의 다른 얼굴입니다.
‘자녀학대’란 흔히 부모가 가해자이고 자녀가 피해자인 폭력 상황을 일컬을 때 쓰입니다. 하지만 직계존속을 향한 폭력이라는 단면적 이해만으로는 부모-자녀 간의 폭력이, 그 실상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컨대 부모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부모 자신이 그(들)의 부모에 의한 상습적 학대의 희생자일 수도 있고, 부부간 폭력이 아이에게 전이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사회적 폭력의 희생자로 내던져진 이의 상실감이 가족 내부에서 폭력의 가해자로 그들을 탈바꿈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 자신의 공시적 통시적 폭력의 기억, 그리고 그것들 간의 겹침과 꼬임이 자녀 학대의 배후에 놓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의 입장에서도 학대는 단지 부모의 가해자적 폭력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모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 넓게는 사회 일반의 문화가, 아이가 체감하는 공시적 통시적 폭력에 가해자로 얽혀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녀학대’를 나는 ‘형식상 부모로 인해 아이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일체의 폭력’이라고 재정의하고자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녀학대의 유형을 열거하자면, 고아원에 버려진 경우를 포함하는 ‘유기’,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방임’, 부모의 물리적 폭력의 대상이 되는 ‘(좁은 의미의) 학대’ 등이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여자 가수의 경우는 아마도 유기의 한 실례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사례는 유기가 비정한 부모들의 폭력의 소산이라는 일면적 이해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오히려 그녀의 사실상의 부모인 ‘엄마/언니’나 ‘할머니/엄마’는 유기의 가해자라기보다는 피해자에 가깝습니다. 또 그녀를 버리고 떠나버린 아버지만이 폭력의 가해자가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 나아가 사회 일반이 가해자로 얽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녀 학대의 문제는 부모-자녀 간의 폭력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폭력 해소의 실마리는 결국 부모-자녀 관계에 대한 성찰이 가장 우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부모-자녀의 관계에서 ‘자녀 보호’ 혹은 ‘양육’이라는 당위적인 부모의 의무를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성찰의 주체는 주로 부모의 태도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다음에 인용한 두 본문은 자녀 양육에 관한 부모의 태도와 관련하여, 바울계를 자처한 초기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견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 본문들을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으로 다시 읽어냄으로써, 부모의 성찰의 부재와 자녀 학대의 사회적 폭력이 어떻게 서로 공모관계에 있는지를 문제제기하고자 합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최근에 벌어진 한 사건은 그것을 시사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기가 죽지 않도록 그들을 들볶지 마시오.
―〈골로사이서〉 3장 21절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성나게 하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규율과 훈계로 그들을 기르시오.
―〈에페소서〉 6장 4절
〈골로사이서〉나 〈에페소서〉는 바울보다 적어도 두 세대 이상 지난 뒤의 바울계를 자처하는 공동체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바울 자신이 이른바 사도들과 적지 않은 갈등 관계에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 두 텍스트는, 추정컨대, 사도계 그리스도교적 흐름과 보다 잘 융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컨대 2세기 초 또는 중반 경에 바울과 주류 그리스도교 사이의 가교 역할을 이 텍스트들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본문들은 2세기경의 그리스도교의 자녀 양육에 관한 대표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고 이해해도 그다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위 인용문에서 〈골로사이서〉가 ‘들볶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나, 〈에페소서〉가 ‘자녀가 성나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모두 부모, 특히 아버지의 자녀 보호의 태도가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말들입니다. 사실 이런 자녀 폭력은 당시에 매우 일상적 현상이었습니다. 로마법이나 유대교 율법은 직계비속에 대한 아비의 가혹한 체벌을 정당화했으며, 심지어 에집트의 관습법은 살인조차도 허용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골로사이서〉는 아비의 체벌은 ‘자녀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규율(파이데이아)과 훈계(누떼시아)’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용어들은 차분한 말로 가르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의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이교도 사상가이건 유대교 사상가이건 간에, 종종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아비의 폭력적인 훈육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은 차분한 가르침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이성적 부성(父性)과 자녀의 고통을 감정이입하는 감성적 부성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흐름과 맞물려서 이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도 당시의 부모의 보호/교육의 관행을 개선하는 운동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후 2세기 초 또는 중반 경 소아시아 지역의 어느 공동체들에 의해 담지된 말이지만, 그 이후 오랜 시공간의 격차로 인한 적지 않은 환경의 변화가 이 성구를 읽는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지만, 오늘 우리가 읽기에도 이런 말씀들은 여전히 경청할 만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이 구절을 되새기는 데서 그 시공간적 격차를 다시 물어야겠습니다. 우리 시대의 변화 상황을 주목하지 않고 그냥 옳은 애기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의미의 왜곡이, 그 아전인수적인 해석이 우리의 값싼 신앙심을 정당화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전근대 사회와 근대 사회는 우선 가족의 규모에 있어서 커다란 격차가 있습니다. 이른바 대가족과 핵가족 사이의 차이가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가족 규모에 있어서의 변화는 1930년대 이후 본격화됩니다.
대가족사회에서 가족의 진정한 주체는 가부장뿐입니다. 나머지는 가부장의 하위주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의 욕망 속에 편입된 식솔들을 만들기 위해 가족 교육이 존재하며, 그것을 위해 가혹한 훈육과 체벌이 작동합니다.
한데 근대사회는 ‘사랑’을 가족 결속의 제1 원리로 부상시킵니다. 아버지는 그러한 사랑의 결속체가 외부로부터 도전받지 않도록 지켜내는 존재이고, 어머니는 가족 내부의 사랑의 조정자로 가족을 결속시키며, 이렇게 부모는 자녀를 사랑의 원리에 의해 잘 자라게 함으로써 사회의 건강한 시민의 일원이 되게 한다는 이상이 근대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구성합니다. 여기서 자녀를 ‘충실한 국민으로 만드는 작업’에 있어서 가족과 더불어 또 하나의 주요 기구를 얘기하자면, 학교가 있습니다. 공교육은 대가족이 붕괴된 사회에서 핵가족 너머의 차원, 사회 또는 국가라는 유사 가족을 상상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가족처럼 사회/국가도 사랑의 결속체인 듯이 상상하게 하는 것입니다.(게마인샤프트로서의 사회/국가)
식민지 일본은 전시동원체제로 조선을 재구성하기 위해 이러한 근대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였는데, 이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녀를 일본의 충성스런 신민이자 천황의 용감한 전사 혹은 후방기지의 일원으로 양육하는 사랑의 존재로서 주체화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식민지 시대의 가족 이데올로기는 반공적 발전주의를 위한 총동원체제인 군부독재 체제의 신민 양성 시스템의 토대로 재구축되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체제에서 학교는 민족이라는 유사 가족적 사랑의 결속체를 상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근대적 가족주의는 ‘폭력 없는 보호’를 이상으로 여기는 부모관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그러한 ‘폭력 없는 보호’의 민족/국가 통치 이상을 탄생시킵니다.
한데 문제는 근대 체제는, 사랑의 유사 가족적 결속체라는 이상과는 달리, 결코 폭력이 약화된 사회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폭력은 더욱 강화되고 더욱 깊어집니다. 거의 ‘폭력의 일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폭력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는 부모의 역할은 과거보다 훨씬 중차대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훗날 폭력적인 세상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 또한 부모의 의무입니다. 요컨대 부모는 폭력 없는 보호를 수행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보호는 더욱 철저해야 하고 더욱 용의주도해야 합니다. 하여 근대사회는 ‘폭력 없는 보호’라기보다는 ‘폭력 없는 과잉보호’의 가족 체계를 낳게 됩니다.
하나 더 얘기하면, 후기근대 사회로 가면서, ‘교실의 붕괴’ 현상이 구조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매스미디어의 역할이 급속도로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월드와이드웹 같은 쌍방향 미디어 시스템의 폭발적인 확산은 교실이 낡은 사회적 감수성을 재생산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타에 확증시켜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런 변화가, 학교 체제뿐 아니라, 근대적 가족에 대해서도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습니다. 한편 후기근대 시대에 사회적 폭력은 더욱 심화되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의 ‘자녀 보호’라는 과제는 더욱 강화되는 것이 작금의 추세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부모는 자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유사 가족이라는 민족이나 국가가 자녀를 잘 보호해줄 거라는 믿음도 이젠 거의 붕괴됐습니다. 정글 같은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는 존재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가 부모들을 압도합니다.
이러한 강박증은 ‘보호의 과잉’을 낳습니다. 이 과잉 현상이 ‘다른 차원의 자녀 학대’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폭력을 일삼는 부적절한 부모, 일탈된 가정만이 아니라, 린치도 거의 없고, 주눅 들도록 야단치지도 않는 부모, 정상적 가정에서도 과잉보호로 인한 자녀 학대는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자녀 학대는 ‘일상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부모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자녀들을 과잉보호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자녀들이 학대상황에 쳐해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합니다. “이런 혹독한 세상에서 어떻게 과잉보호하지 않을 수 있어요”라고...
모두들 문제를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이 지금 당장도 매우 심각하며 향후엔 더욱 악화될 가능성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한 성찰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에 사람들은 운명론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신생아실 간호사들이 찍은 이른바 ‘아동학대’ 사진들이 사람들을 분노케 합니다. 그녀들의 어처구니없는 장난으로 신생아들은 괴롭힘을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국가는 그녀들의 처벌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매스미디어는 그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열변을 토하는 성토의 장이 됐고, 훗날의 삶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잘 정립되지 않은 가설들을 사실처럼 떠벌리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국가와 시민사회는 한목소리로 그녀들의 아동학대를 과장하는 데 동조했습니다. 얼핏 우리 사회가 갑자기 유아/아동학대에 대단히 민감한 사회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러한 민감함이 아동학대, 자녀학대의 일상화를 반성하는 사회적 동력으로는 좀처럼 전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들의 자녀학대에 대한 자괴감을 이런 사태를 통해 잠시 망각하는 효과를 맞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이상한 현상을 설명하는 적절한 용어가 있습니다.
‘희생양 만들기!’ 자신의 악마성을 망각하기 위해, 혹은 자신이 악마와의 공모자라는 것을 잊기 위해 다른 존재의 악마적 행태를 과장하는 것.
저의 불길한 상상이 맞는다면,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자녀학대에 대한 저항의 언어는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간직되고 있는지요? 혹 우리는 신앙을 우리 자신의 악마성을 위해 소비되고 있지는 않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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