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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나는 소망한다, 감성이 교류하는 ‘살림’의 세계를 - 이른바 ‘황우석 논쟁’을 보면서 든 하나의 단상

한백교회 2005.7.10자 하늘뜻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우리교육] (2005 08)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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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감성이 교류하는 살림의 세계를

이른바 황우석 논쟁을 보면서 든 하나의 단상

   


 

 

한 병원에서 수술중인 환자들에게 모종의 가스를 주입해서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어 그들의 장기를 적출해낸다. 이 저명한 병원은 장기가 거래되는 거대한 암시장이었던 것이다. 로빈 쿡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든 코마는 의료과학 전문가들의 이러한 음모가 파헤쳐지는 줄거리로 구성된다.

물론 허구지만, 그 배후에 가로놓인 상황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장기 기증자에 비해 수요가 월등히 많고, 현재 추세로 볼 때 이런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공급과 수요 간의 심한 불균형은 암거래시장을 발생시켰다. 그 시장은 누군가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단절시켜야 하는,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사정은 엄청난 거래비용이 발생하는, 꽤나 매력적인 시장이 되게 했다. 곧 그것은 살림인 동시에 죽임인 시장이다.

한데 코마처럼 미국의 한 저명한 병원에서 저질러질지도 모르는 의료과학의 부적절한 활용보다 좀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암시장이 이미 지구적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남아시아나 러시아 등의 극빈층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들 가운데는 장기이식용 인간들의 매매가 적지 않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어린 아이의 장기가 이 지구적 암시장의 주요 품목의 하나라는 점이다.

이런 지구화된 장기의 매매는 공급자와 의료기술자간의 철저한 분화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이 장기들이 윤리적 문제들이 세탁된 채 의료기술자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법은 대체로 장기 제공자인 외국의 익명의 타자들을 위해 수요자인 내국의 시민들을 처벌할 만큼 공명정대하지 않다. 결국 장기이식이은 살림의 축복이기도 하고 죽임의 저주이기도 한, 야누스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최근 현대의학은 이런 문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이른바 이식의학이 아니라 재생의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실용화가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지구적 의료자본들의 집중적인 투자 속에 연구가 진행 중인 성체줄기세포 연구와, 황우석 박사 연구팀에 의해 그 현실화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연구는 많은 점에서 과거의 의료과학의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담고 있다. 특히 이식의학의 저주를 푸는 축복의 선물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치명적으로 훼손된 장기의 재생이 가능하다면 장기의 암시장은 사라질 것이고, 이 시장에서 희생되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 또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연구는 의료과학이 갖는 죽임의 요소를 축소하고 살림의 요소를 확대할 기회를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이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장밋빛 미래에 대한 믿음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부시 정부는 그것을 죽임의 과학으로 보는 견해를 대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가톨릭과 일부 개신교, 그리고 시민사회의 일각에서 비판적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주된 비판 논조는 그것이 인간 배아의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에 죽임의 과학이라는 것이다. 또한 여성의 난자가 매매되는 시장을 만들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여성 몸을 착취하는 죽임의 과학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런 주장들은 여성이나 초기 생명체일수도 있는 배아의 고통을 간과하는 의료과학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림의 윤리, 살림의 신앙임을 자부한다.

한데 이런 비판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과학자들 못지않게 고통 당사자에 대한 이해의 심한 불균형을 감추지 못한다. 가령, 난치병으로 저주스런 삶을 영위해야 하는, 혹은 임박한 죽음을 고통 속에 맞이해야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이런 질병의 고통이 사회적인 편견을 통해서 가중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또 장기이식의 부정적인 측면을 간과함으로써 지구화된 암시장을 개선하려는 일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또한 여성 육체의 착취를 우려하는 시선 속에는 종종 난치병으로 훼손된 여성 육체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들 비판들이 자부하는 살림의 가치는 동시에 죽임의 흔적을 내포한다.

그런데 이들 대립되는 입장은, 이미 어느 논평가가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서로 동일한 입지를 공유한다. 그들 모두 인간 생명의 고통만을 유념하고 있다. 가령,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핵심적 논점인 생명체의 범위 논쟁에는 인간 대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이 강박증처럼 양편을 옭아매고 있다.

과연 인간 대 비인간이라는 범주가 그렇게 명료한가? 삶과 주검의 경계는 어디인가? 사실 주검의 명확한 기준에 대한 논의는 불과 1960년대 후반 이후 시작되었다. 장기이식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증자의 명확한 주검에 대한 정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초에야 뇌 전체의 죽음을 뜻하는 뇌사가 의문의 여지없는 주검의 기준으로 확립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삶이 시작되는 경계의 문제도, 순수한 생명과학적 논의인 듯 포장되어 있지만, 사회적 필요와 맞물려서 논의되고 있다.

좀 더 생각을 진전시켜 보자.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시절 북아메리카 백인들의 대다수는 흑인을 말하는 짐승으로 여겼다고 한다. 일본의 식민지이던 시절, 일본 내지인에 비해 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은 덜 준비된 인간이었으며, 남양군도의 원주민에 비해서는 더 준비된 인간으로 이해되고 있었다는 담론 연구들도 있다. 또한 여성은 오랫동안 불완전한 인간으로 취급되어왔다. 육체적 소수자(장애인 등), 성적 소수자(동성애자, 성도착자 등), 인종적 소수자 등등, 수없이 많은 불완전한 인간 존재들이 여전히 우리들의 언어 세계 속에 실재하고 있다. 또 패륜범죄자, 연쇄살임범 등, 악마화된, ‘반인간적 존재로 인식되는 이들 또한 실재한다. 요컨대 인간 대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의 이면에는 이런 모호한 존재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배제는 무의식적인 차등의 이분법 속에서 배양되고 있다.

공동체의 감성을 연구한 많은 이들은 고통이 공감되는 범주를 그 준거로서 제시한다. 곧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겨지는 이의 고통은 어느 정도의 감정이입되지만, 그 외부인의 고통은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고통에 대해 더욱 공감을 많이 하는 사회는 가족주의가 강한 사회이고, 민족적 고통에 대한 공감이 특별할 때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토양이 마련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고통의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 이들을 우리는 비인간적 존재로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고통스러워서 내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시민사회에서 타자의 고통은 침묵 속에 묻혀버린다. 성인들의 사회에서 아동이나 청소녀/년의 고통이 묵살되어온 것처럼 말이다. 교육은 교육 대상자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발설하기보다는 어른들의 욕망을 반영할 때 우량한 존재, 보다 인간화된 존재로 간주되는 체계로 구축되어 왔다.

인간 대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을 공유하면서 벌어지는 논쟁은 자신들이 살림의 이상을 대변한다는 믿음 속에 진행된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반/비인간화된 존재는 죽임의 깊은 수렁 속으로 내던져져, 그들의 고통의 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는다. 반인간적 존재에 대한 증오에 휩싸인 고문기술자들의 귀에는 고문피해자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진리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 몰입해 있는 노수사 호르헤의 귀에는 자신이 살해한 동료 수사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장미의 이름에서). 결국 상대를 비인간, 반인간적 존재로 인식하며, ‘살림에 대한 독백적 주장들을 반복하는 태도는 그 타자화된 존재들의 죽임, 그 고통의 소리에 대한 무관심을 수반했다.

마무리 하는 길목에서 바울의 고백에 잠시 귀기울여보자. 여기에서 죽임이 아로새겨진 오늘 우리의 시대의 문화 속에서 살림의 상상력을 간직하는 하나의 비전을 엿볼 수 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의 선교를 위해 그는 그곳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를 심혈을 기울여 쓴다. 로마서는 이렇게 쓰였다.

그는 자기가 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사투를 벌여왔는지를 고백한다. 그에겐 이 투쟁만이 모든 것이었다.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한데 그럴수록 더욱 깊은 죄의 수렁 속에 헤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구원을 체험한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 체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모든 피조물들(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나와 같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그들도 구원을 갈망한다.’ 불연듯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소리, 그 고통의 비명이 들리게 된 것이다. 단절됐던 감성이 트였다. 저들의 고통이 감정이입된 것이다. 하여 그는 이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의 구원을 갈구한다. 한 저명한 과학사회학자가 인간만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민주주의를 주장했듯이.

살림의 실천은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진리 추구 뒤에 가려진 존재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감성 교류 공간을 확장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신의 독백에 의해서도, /주체의 독백에 의해서도 아니라, 온 우주 존재들의 감성의 교류를 통해서 죽임을 넘어서는 살림의 공간으로 전환되어 갈 것이다.



[참고자료]

▷ <MBC 스페셜 3부작생존>

대구지하철 참사 등,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를 겪어야 했던 이들의 고통을 통해, 죽임의 문화가 안겨준 저주의 단면들을 들춰보는 다큐멘터리다.

피에르 부르디외 외, 󰡔사회적 비참󰡕 1~3(동문선)

부르디외를 포함한 23명의 사회학자들이 현대의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그것을 낳은 죽임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세 권짜리 방대한 보고서다.

아서 클라인만비나 다스 외, 󰡔사회적 고통인간의 고통에 대한 사회학적, 의학적, 문화인류학적 접근󰡕(그린비)

죽임의 문화는 끊임없이 타자화된 존재의 고통을 낳으며, 그 고통을 표현할 언어를 은폐한다. 그런 점에서 죽임을 넘어 살림을 추구하는 것은 고통의 메커니즘을 읽어내고 그것의 목소리를 회복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바로 이런 과제와 치열하게 대면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강봉균 박여성 이진우 외,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한길사)

76명의 세계 지성들의 지적 작업을 소개하는 책으로, 죽임이 구조화된 세계와 그러한 메커니즘에 갇힌 지식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각 분야 지식인들의 경계를 넘는 지적 모험들을 소개한다.

김동춘 박노자 박명림 하종강 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당대비평’ 2005년 신년특별호󰡕(생각의 나무)

최근 한국사회의 은폐된 고통들을 들추어내고, 그것의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죽임을 넘는 살림의 비전을 지향하기 위한 문제인식이 무엇일지를 고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