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로 부재 사회의 원로 공방에 대하여
그를 체포해오기로 했던 이들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를 지지하는 군중의 수가 만만치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그럴듯한 보고에도 불구하고, 대제관들과 바리사이들은 명을 수행하지 못한 아랫것들을 심하게 나무랐다. 명령권자들은 의도적으로 그를 놓아준 것 아니냐고 윽박지른다. 체포조 사병들은 쩔쩔매며 점점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느라 허둥대다 급기야는 마음 한구석에 께름칙하게 남아있던 생각까지 뱉어버리고 만다. “일찍이 어떤 사람도 그렇게 이야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개개인의 가슴 속에 숨겨진 생각이 사병들 집단에게 내려진 지엄한 임무를 방해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바리사이들은 병사들을 군중과 바로 동일시해버린다. “너희도 속았단 말이냐, 이 무식한 놈들아!”
「요한복음」 7,43~49을 상상력을 동원해서 재현해보았다. 여기서 강조점은 예수를 체포하지 못한 상황을 두고 명령권자인 대제관들과 바리사이 대 명령 수행자인 체포조 사병들과 간에 단절된 대화 상황에 있다. 바리사이는 현장의 상황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예수는 대중을 미혹하는 자이고, 대중은 그 ‘사기꾼’에게 잘도 속아 넘어간다는 일반적인 명제에 있다. 그들은 이 두 명제를 미리 전제하고 있고, 거기에서부터 벌어진 사태를 해석한다. 따라서 병사들이 예수를 체포하지 못한 것은 그들도 군중처럼 속아 넘어간 탓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오해로 점철된 대화 당사자들 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자. 대제관이나 바리사이는 명령권자일 뿐 아니라, 규범의 대표자이고 신적 진실의 대행자이다. 반면 그들의 명을 받은 이들은 ‘휘페레테스’(ὑπηρετης, 하인)다. 곧 명령권자에게 존재가 귀속된 자다. 이것은 명령권자의 의미망 속에 완전히 포섭된 자,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주체성은 없고 다만 주인의 정체성의 일부일 뿐인 자를 말한다. 따라서 바리사이의 해석은 일어난 일에 대한 사실을 대변한다.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사실이지만 말이다.
또 하나, 바리사이의 해석은 병사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마음 한 구석의 것을 단서로 활용한다. 비록 실제에선 행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단지 갈등 요소에 불과한 것임에도, 병사들은 숨겨진 그 속마음 때문에 바리사이에 의해 해석된 사실에 승복하며 자책하게 된다. 결론은 병사들은 결국 늘 그랬듯이 무식해서 속아 넘어간 자가 되고 만다.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른바 ‘원로들’ 간의 상반된 시국선언은 무식해서 ‘속아 넘어간’ 대중을 깨우치려는 해석의 대표자들 간의 공방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논쟁 상대방은 무식한 대중을 속이는 미혹자, 사기꾼에 다름 아니다.
이분법이다. 진실 대 허위, 선함 대 악함, 아름다움 대 추함, ..., 그리고 우리 대 저들. 이렇게 단순 명쾌하게 이분화된 세상의 두 범주가 작금의 원로 간의 공방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이 논쟁은 당연히 한 가지 사실로 수렴된다. “누가 진짜인가?”
원로간의 공방은 성격을 달리하는 언론매체들 간의 공방전으로 직결되었다. 아니 언론매체들이 각기 자기편으로 원로들을 줄 세우기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곧 전 시민사회는 이 공방에 휘말려버렸다. 누가 진짜인지를 주장하고 가짜를 폭로하는 게임 말이다.
‘원로’라는 존재는, 단지 나이가 많다는 것만이 아니라, 더 멀리 더 많은 것을 ‘보는 경륜’을 가진 이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원로는 해석자이며, 시민사회는 그 해석에 귀속되는 존재, ‘휘페레테스’가 되는 셈이다. 곧 이 공방은 사기꾼에 속지 말고, 경륜이 많은 원로들의 판단을 경청하라는 식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상대편의 말은 들을 것도 없다. 그 편에 줄 선 이상, 더 고려할 것 없이 사기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의 한 사람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비판적으로 지적한 이른바 ‘범주적 사고’다. 유태인의 범주에 든 자는 그가 어떤 삶을 사는 이든 관계없이 나쁜 자라는 나치의 범주적 사고는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폭력을 낳았다. 빨갱이라는 범주에 든 자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악의 화신이라는 반공주의적 인식론은 한국 현대사를 증오의 역사로 점철시켰다. 그리고 최근 한국 사회의 논쟁은 이러한 범주적 사고의 틀 속에 농락당하고 있다.
위의 성서 구절에 바로 이어지는 50절부터는 니고데모가 이러한 해석의 한 전제인 ‘예수가 사기꾼이라는 명제’와 논쟁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니고데모는 말한다. “그가 무슨 말을 했으며 무슨 행위를 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심판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바른 태도가 아니오.” 곧 범주적 생각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해 저들의 응수다.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 아니야. 성서가 말하고 있지 않아. 갈릴래아에선 예언자가 나올 수 없다고.” 범주적 사고는 지역주의 혹은 종족주의적 편견, 아니 사회가 내장하고 있는 온갖 편견과 얽혀 있다.
이러한 범주적 사고는 과도한 ‘안다는 확신’의 소산이다. 그런 점에서 더 멀리, 더 많이 ‘보는 경륜’의 소유자인 원로는 시민사회의 ‘안다는 것에 대한 병적 확신’을 대표한다. 이 확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보기도 전에 이미 답이 나와 있는 해석과 연루되어 있다. 무엇을 말했고 무엇을 했는지를 알기도 전에 먼저 판결해버리는 조급한 자만심과 맥이 닿아 있다.
예수는 이러한 안다는 자만심, ‘볼 수 있다는 경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요한복음」 9장 41절의 말씀처럼, “너희들이 지금 ‘우리는 본다’고 주장하니, 그대들의 죄는 그지없다”라고. 그것은 범주적 시선에 대한 비판이다. 범주를 통해 세상을 실제로 (경험해) 보기도 전에 판정부터 내리려는 조급한 자만심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한 조급증의 확신이 낳은 배제와 폭력에 대한 비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원로는 세상을, 세상의 범주를 아는/보는 존재라기보다는, 범주를 통한 지식, 그 안다는 편견에 거스르는 사유의 실험을 보여주는 자여야 하지 않겠는가.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소망한다, 감성이 교류하는 ‘살림’의 세계를 - 이른바 ‘황우석 논쟁’을 보면서 든 하나의 단상 (0) | 2010.10.11 |
---|---|
안병무 선생의 삶과 민중 사상의 현재성 (0) | 2010.10.11 |
한국 기독교, 지금이 성찰의 기회다 (0) | 2010.10.11 |
기다림과 들음 - 종교교육의 공교육화를 향한 하나의 제안 (0) | 2010.06.06 |
한국교회의 선교, 이제 성찰의 시간이다 (0) | 2010.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