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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기다림과 들음 - 종교교육의 공교육화를 향한 하나의 제안

이 글은 '희망제작소 우리시대 희망찾기 프로젝트'의 교육 분과팀이 만들어낸 [교육문화, 환상과 두려움을 넘어서](2007.11 출간)에 종교교육 분야의 글로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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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과 들음

종교교육의 공교육화를 향한 하나의 제안

 

 


부재한 공론의 장

 

6학기의 대학채플 이수를 의무화한 학칙으로 인해 학위수여가 거부된 학생이 자기가 속한 사립대학의 종교교육이 종교의 자유에 관한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대학채플은 복음 전도나 종교인 양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사랑에 기초한 보편적 교양인 양성을 지향하는 것이며, 또 목사가 집전하는 예배만이 아니라 강연, 드라마 등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생들의 무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판례를 남겼다.(1998.11.10. 선고 9637268) 이 판례는 기독교계 사립대학이 종교교육을 수행할 권리를 인정하면서, 이 특정 대학의 채플은 예배로 국한되기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종교교육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이 판례는 개념상의 혼란을 내포한다. 마치 종교교육과 예배가 별개의 것인 양 분류되고, 대학에서의 채플(chapel)은 예배(worship)가 아니라 종교교육이라고 판시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실재로 지난해(2006)에 이 대학의 학생들이 교육부에 제출한 대학채플강요학칙개선 청구서의 수령이 거부될 때 위의 판례가 이유가 되었다. 교육부 관리는 이 판례에 의존해서 대학채플이 예배가 아닌 종교교육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종교교육을 정의하자면, ‘종교적 진리에 관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다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비신자의 개종과 신자의 정체성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종파적 교육’, 종교들에 관한 학문적이고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종교들과 종교 일반에 관한 교육’, 그리고 종교적 진리에 기초한 보편적 인식 및 교양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교육이 그것이다. 이중 위의 판례는 첫 번째의 것을 예배의 기능으로 이해한 것 같고, 세 번째의 것을 종교교육으로 해석한 듯하다. 또한 왕궁이나 학교 등 본질상 종교기구가 아닌 곳에 설치된 예배당 혹은 그곳에서의 예배를 뜻하는 채플이 예배가 아니라 종교교육이라고 규정한 것도, 예배가 찬송과 기도, 설교라는 상투적인 예전 형식으로만 구성되는 것이라는 협소하고 편협한 이해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엄밀함과 정확성을 추구해야할 법률적 해석으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한데 이러한 개념상의 혼란을 무시하고 그 취지를 적극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이 판례의 문제는 별반 해소될 것 같지 않다. 필경 실제의 대학채플은 종파적 교육과 종교적 교육을 명료히 구분하였다기보다는 혼재된 채 실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국 개신교회 일반의 교육철학이나 선교관에 비추어 본다면 종교적 교육보다는 종파적 교육에 더욱 방점을 찍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인다. 그럼에도 종종 대학채플 등에서 비종교적 내용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종교적 교육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비종교적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채플 내용이 구성된 결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요컨대 대학채플이 헌법상의 무신앙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침해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이 글은 종교교육을 이야기하고자 기획된 것이다. 특히 여기서는 다른 종교의 경우보다 더욱 폐해가 심각한 기독교 기관에서의 종교교육에 초점을 둔다. 말했듯이 그것은 종교 교과목에서만 수행되는 게 아니라, 학교채플이나 교회 예배에서도 실행된다. 다양한 현장에서 수행되는 종교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보다 바람직한 모습을 가지려면 어떠해야 할까, 바로 이 물음이 이 글의 중심 주제다.

위의 사례는 종파적 교육과 종교적 교육의 경계에서 벌어진 하나의 법률적 해프닝이다. 이 경계를 해석하는 데 우리사회의 법적, 공공적 점검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지, 얼마나 비전문적인지를 보여주는 한 전형에 속한다. 종파적 교육이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인권을 침해할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우리사회의 일반적 지성이 그것을 검수하기에는 이에 관한 지적 공론장이 결여되어 있다. 이는 선교신학적이고 종교교육적인 기독교의 특수적 지성이 사회의 공론의 장에서 대화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하여 교회나 기독교계 종교사학 등의 종교교육이 다종교적이고 다문화적인 우리사회에서 부적절하게 자리잡음으로 해서 벌어질 수 있는 인권의 문제에 대해 선교신학이나 종교교육학이 이러한 종교교육의 관행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또 사회의 공론의 장 또한 이를 평가할 지적 준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위와 같은 대법원의 부적절한 판결이 나오게 된 것이다.

 

기다림과 들음

 

이 글은 바로 이런 문제와 대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현주 목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문제의식에 다가가고자 했다. 우리가 보건대 그는 기독교 신앙을 대화적 차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며, 특히 그의 대화적 신앙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종교적 감수성과의 접점을 훌륭히 체화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종교적인 문화지평에서의 신앙의 전범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선교신학이나 종교교육학이 우리사회의 공론의 장 속에 한층 다가가도록 이끄는 신학적 자극을 주며, 나아가 우리사회에서 실행되는 종교교육이 다종교적이고 다문화적인 공적 담론의 장에서 어떻게 자리잡아야 할지에 대한 신앙적 근거를 제안하고 있다고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지난 20061228, 충주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우리는 약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현주 목사를 포함 네 명이 함께 했는데, 모두는 매우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고, 또 많은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종종 그렇듯이 열린 대화는 서로의 생각의 지평을 한층 넓히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의 성찰에 다가가게 한다.

주로 그가 저술한 책을 읽으면서 뽑은 열 개 정도의 질문을 준비해 갔는데, 꼬리를 무는 자연스런 이야기에 빠져들어 준비한 것은 절반 정도 밖에 나누지 못했고, 대신 새로운 생각들이 무수히 끼어들며 예측 못한 곳으로 이어지는 대화의 즐거움이 넘쳤다.

아무튼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이날 그와의 대화에서 중심이 되는 키워드는 들음과 기다림이었다. 그는 앞서 말하지 않았고, 앞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도 않았다. 기독교도들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의 하나는 항상 말을 선점한다는 데 있다. 하여 자기 생각대로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하고자 하고, 그런 흐름에 지배되지 않을 때 실증을 내며, 그런 대화 상대자의 태도를 문제시한다. 반면 상대방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은 그 대화에 만족해한다. 그런 점에서 잠시도 상대를 위해 기다리지 않으며, 먼저 해답을 제시하고 먼저 그것, 자신이 신봉하는 그 진리를 강요한다. 앞서 말한 교회나 학교 등의 기독교 기관에서 행해지는 종교교육이 다분히 종파적 교육의 성격을 띠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독교적 행동이나 사유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무례함이 신앙적으로 내면화된 결과다.

한데 이현주 목사에게서 내가 받은 인상은, 그는 타인/타자의 말을 듣기 위해 자기를, 자기의 생각을 비우듯이 대화에 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말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번번이 이야기 흐름의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양도하고 있는 모습이 그랬다. 따뜻하고 진지한 표정과 가벼운 미소는 그의 특징적인 기다림의 제스처처럼 보였다.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이러한 기다림의 동작은 이미 그의 몸에 체화된 듯 했고, 그 속에서 그는 자기의 생각을 비우는 의식을 치루는 듯이 보였다.

나는 그의 이러한 기다림이 자칫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수반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기다림이라는 어법은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마치 상습적인 폭력을 쓰는 남편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아니 순응적인 아내처럼, 공격적 체제에 의해 식민화된 몸을 미학적으로 변명하는 수사학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요컨대 기다림의 언술은 다분히 정복의 서사를 정당화하는 지배언어로 소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지배언어는 식민화된 존재가 자신의 식민성을 체감하지 못하는 감각 마비를 야기한다. 결국 기다림은 삶의 수동성을 가리키는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현주 목사에게서 기다림의 어법은 이러한 수동성을 가리키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구성된 그 자신의 전략적 행동이자 신학적 원리이다. 그것은 기존의 기독교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무례함, 타인/타자의 삶이나 가치관, 기억, 경험 등을 무시하고 자신의 것만을 주장하는 정복주의적 태도에 대한 그의 반제적 행동이자 신앙인 것이다.

이러한 무례함의 태도를 그는 기계론적 세계관이라고 말한다. 즉 무례함, 그러한 정복주의적 태도는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양 근대, 나아가 확대된 서양, 즉 서양을 흠모하고 서양과 동일화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근대의 전 세계적 차원의 문제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근대적인 지배체제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러한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도전세력에게서도 나타난다. 무례함은 지배의 서사 속에 내재된 인식론적 기조인 동시에, 저항의 서사 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배와 도전이라는 이분법적인 범주 간의 투쟁이 근대적 세계를 작동하는 동력이라면, 이현주 목사는 이러한 두 범주 모두에게서 동일한 게임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을 그는 기계론적 세계관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문제제기해야할 기독교 신앙조차도 기계론적 세계관에 포획된, 아니 오히려 그러한 세계관을 재생산하는 주체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그의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논점이 바로 기다림의 신앙인 것이다. 기다림은 수동적이고 식민화된 삶의 변증론이 아니고, 적극적이면서도 성찰적인 그의 신학적 의제인 것이다.

한편 그의 기다림들음의 태도와 맞물린다. ‘들음말함과 쌍을 이룬다. 이러한 상응관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대화의 관계가 성립한다. 한데 문제는 대개의 말함과 들음의 관계가 그다지 대화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특히 기독교의 선교 태도는 매우 파행적인 대화의 예를 보여준다.

가령, 지난 20069월 서울의 한 외국어고등학교에서 특별활동시간(CA)에 학생들을 강당으로 소집하여 뜬금없이 선교이벤트를 벌인 적이 있다. 이날 무대 위에선 갖은 선교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특히 태권도 시범 때에는 송판에 사탄’, ‘미신’, ‘무교등의 글귀가 쓰여 있었고, 그것이 격파될 때마다 원죄의 결과는 죽음뿐이라는 장중한 내레이션이 깔렸다. 한데 그 학교는 미션스쿨이 아니었고, 다만 재단이 곧 기독교계로 이전될 예정에 있었다. 일부 학생들이 학교 홈페이지에 항의 글을 올렸고, 학교는 홈페이지를 폐쇄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말함과 들음의 비대칭성의 극단적 사례를 보여준다. 하지만 송판에 쓰인 글귀를 격파하는 것을 선교로 이해하는 모습은 기독교 선교관에서 그리 낯설지 않다. 기독교는 타종교나 타문화를 극단적으로 적대시하면서 그 문화와의 대화를 시도하곤 한다. 그리고 종종 그 종교나 문화를 황폐화하는 것을 선교의 완성처럼 이해한다. 그 종교의 가르침이나 문화 속의 지혜에 전혀 주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악마화함으로써 말을 봉쇄하려 한다. 물론 여기서 선교는 오직 말함의 양식으로만 짜인다.

한편 최근 한국기독교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군부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급성장한 대형교회(선발대형교회)와는 달리 민주화 시대 이후 급성장한 대형교회(후발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문화선교 운동이다. 이 경향은 과거의 일방적인 공격적 기독교와는 달리 일정하게 대화적인 태도를 취하며 상대방에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띤다. 가령, 현대문화의 다양한 매체들을 활용하여, 상대를 위협하기보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말을 건넨다. 그것은 상대를 어느 만큼은 대화 상대로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선발대형교회가 보인 이데올로기적인 극우 노선에 대해 뉴라이트를 표방한다. 한데 대화는 여전히 쉽지 않다. 왜냐면 기독교 신학이 절대적인 것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적 요인은 이러한 절대적 확신에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만 고려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러한 선교적 신앙은 들음을 충실히 수행할 수 없다. 오직 듣기 싫은 것을 제외한 것만을 들을 뿐이다.

여기서 선교는 항상 말함을 뜻한다. 자기의 것을 주장함이다. 그리하여 종종 선교는 전도라는 말로서 표현된다. 이때 말하는 주체는 일 뿐이고, 나아가 그 신의 대리자들일 뿐이다. 그리고 듣는 대상이 하는 말은 반드시 필요한 선교의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선교 행위자의 개별적인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의 선교신학이 이러한 선교관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자 한 적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변선환의 타종교의 신학에서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자기 자신의 신조와 전통에만 몰두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타종교의 진리와 지혜에 귀 기울이는 데서 발견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요컨대 탈주체화 전략을 통해 다종교사회에서의 신학적 신앙적 재주체화를 모색해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타종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들음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선교신학이 타종교나 타문화에 대한 대화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는 적지 않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러한 최근의 경향이 적지 아니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 수용된 대화적 선교신학이 변선환처럼 타종교성을 기독교적 주체 형성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해석하는 급진적 대화주의로까지 나아가는 경우는 좀처럼 많지 않다. 대개는 기독교적 전통에 기초한 신조나 진리체계가 훼손되지 않는 한에서 타종교나 타문화의 요소를 수용하는 절충적 대화주의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이러한 어정쩡한 대화론은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는 대화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는 있을지언정, 타종교, 타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선교적 언술로는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들음의 태도가 철저하지 않은 선교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변선환의 들음의 선교신학은 한국적 신학으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변선환의 주목할 만한 시도는 교회의 폭력적 개입에 의해서 뿌리까지 뽑히고 말았다. 그가 속한 교단은 그의 교수직을 박탈하였을 뿐 아니라, 목사직, 심지어 교적(敎籍)까지 박탈해버렸던 것이다.

 

비존재의 침묵의 소리

 

한데 변선환의 신학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들음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대화가 우열 관계에 놓일 때 상대방이 아무리 들을 준비가 되어 있더라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말을 하지 못하게 해서가 아니다. 대화의 소통구조가 왜곡된 탓이다. 국가간, 집단간, 개인간의 대화는 실제로 이렇게 우열 관계에 따라 말함과 들음이 비대칭적으로 배치된다. 하여 일상적인 대화의 룰에서 말함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변선환이 권력의 문제를 신학화하려는 민중신학과의 동맹을 제안한 것은 자신의 선교신학의 한계지점에 대한 자기 비판적인 성찰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좀더 근원적으로 문제를 살필 필요가 있다. 대화는 사람 대 사람 사이의 권력의 문제로 한정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과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 나아가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리차드 로티에 의하면 보스니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세르비아인은, 인간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는 비존재화된 대상을 학살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토록 잔인한 살상을 거리낌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처럼, 존재는 비존재적 대상을 마음대로 사용할, 나아가 파괴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로서 주체화된 인간과 비존재로 대상화된 상대의 문제, 나아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물, 인간과 그밖의 모든 것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들음의 문제는 훨씬 난해한 지평으로까지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존재의 말/소리를 듣는 것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현주 목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말한 한 일화가 있다. 언젠가 용문사에 갔다가 그곳의 1천년 된 은행나무를 보며, 그 잎사귀에게 말은 건넨다. 그리고 잎사귀끼리 말을 주고받는 얘기를 듣는다. 그가 이러한 대화를 통해 깨달은 것은 한 살 먹은 잎사귀는 그 나무의 몸과 연결되어, 실제로는 일천 한 살지기 잎사귀라는 점이었다. 여기서 그는 자기가 자신의 자녀와 분리된 몸이면서 또한 연결된 몸이며, 나아가 인류 전체와도 연계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성찰에 이른다.

그의 책에서 읽은 것을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집에서 키웠던 진돗개 얘기를 들려주었다. 틈만 나면 사고치는 그 녀석 때문에 동네의 원성이 자자했다. 해서 개목거리로 단단히 묶어두면서 개에게 말했다. ‘이건 네 잘못이야. 네가 사고만 치지 않았더라도 넌 자유로웠을 테니까.’ 한데 그는 곧 깨달았다고 한다. 그건 개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개의 자연스런 생태였고, 개짓을 사람들이 소화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또한 거기에 사람들에게 설득하기보다는 손쉽게 묶어두는 것으로 자신에게 닥칠 비난을 회피하려 했던 자신의 얄팍한 기회주의가 한몫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개의 자연스런 행동이 사람에게 위해를 가했다. 이럴 때 그 해결 방법은 항상 사람 편에서 구상된다. 오래된 생래적인 습성을 억제하기 위해 묶어두는 것이다. 그것은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기 위해 성대 수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인간이 비인간적 존재를 대하는 하나의 은유다. 비인간적인 존재란 소통이 불가능한 혹은 극도로 제약적인 대상임을 의미한다. 이럴 때 대화란 일방적인 한편의 말과 선고(宣告)로서 수행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겐 그 말이, 무리한 것이든 아니든, 따르든가 아니면 심판을 받는가의 문제만이 선택지로 남는다. 물론 소통이 안 되니 그것은 선택지도 아니다. 일방적인 발화자의 판단과 선고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말이 불통하는 대상과의 대화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항상 권력에 의해 일방향적으로 결정된다.

한데 흥미롭게도 기독교의 신관, 신과 인간의 관계는 거의 이런 식이다. 신은 말하고, 인간은 들을 뿐이다. 여기서 인간은 둘로 갈린다. 들을 수 있는 존재인 기독교도와 듣지 못하는 존재인 비기독교인이다. 이때 후자는 비존재로 간주된다. 하여 선교는 듣지 못하는 존재가 강제로 듣게 하기 위해 강권을 발동한다. 선교의 무례함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나온다. 상대방이 비존재로 대상화되었기에 무례한 침해가 무례함으로 각인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듣지 못하는 존재인 동식물, 기타 대상들을 대하는 기독교적 태도로 연장된다. 제도화된 기독교 신앙은 무의식적으로 대화를 권력관계의 연장으로서 인식한다.

해서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권력을 추구했고, 힘의 게임을 통해 선교를 수행했다. 종교교육의 일방향성은 바로 이러한 대화관에서 유래한다.

반면 이현주 목사는,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반권력적인 대화론을 편다. 그것은 일종의 신앙의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면 소통 불가능한 대상을 행해 대화할 때조차 발화자는 상대의 소리를 듣는/들으려는 품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의 리처드 로티에 의하면, 대상을 비존재화하는 담론구조를 문제제기함으로써 지양될 수 있다. 결국 종교교육은 종교적 담론이 누군가를 나아가 무엇인가를 비존재로 취급하고 일방적인 자신의 주장에 따라 그(/)을 마음대로 하려는 태도를 반성하고 지양하게 하는 것에 관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 글에서 종교교육의 문제는 대화적이어야 하고, 그것은 기다림과 들음을 교육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에 관한 논의로서 구체화하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기다림과 들음의 문제를 방해하는 주된 요소가 바로 소통 장애의 문제인데, 그것은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소통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은 권력관계에서 발화자로 주체화된 이의 윤리학, 들리지 않는 타자의 은폐된 언어를 듣기 위한 품성적, 제도적 노력과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종교교육은 바로 이러한 윤리를 교육하는 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교육의 공교육에 관하여

 

이제 글을 마무리하는 대목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종교교육에 관한 논점을 제시하겠다. 종교교육의 공교육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헌법상의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공교육에서는 종교교육이 금지되고 있다. 이때 종교교육을 금지하는 취지는 종교적 교육’, 즉 종파 중심적 교육이 일상화될 때의 종교 자유에 관한 인권을 보호하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취지는 과연 잘 지켜지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경우 사학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하고(18%), 전체 사학 가운데 종교계 사학의 비중이 거의 24.5%에 달한다. 그리고 종교계 사학 가운데 개신교계 사학이 무려 72.4%나 된다. 한데 가장 일방적인 종교적 교육(종파적 교육)을 수행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개신교계 사학들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종교계 사학들의 경우 건학이념에 따른 종교교육이 허용되고 있다. 즉 종교계 사학들이, 종교 간의 화해와 건강한 시민사회적 신앙교육의 차원에서 종교교육을 수행하기보다는, 종파 중심적 교육을 수행한다고 해도, 그리하여 헌법상의 종교 자유에 관한 인권을 위반하고 있다고 해도 종교계 사학들의 건학이념을 보호한다는 취지 때문에 그러한 종교계 사학들은 예외공간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비단 학교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 글이 전제하고 있듯이, 종교교육이 실행되는 곳은 학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얼마 전 한 시민단체가 공공장소에 설치된 종교홍보물의 철거를 요구하는 공문을 해당 지자체들에 발송한 적이 있다. 이것은 특히 고속도로상의 옥외광고물에 관한 것인데, 지난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기금마련을 위해 지자체가 특별법을 제정하여, 고속도로 상에 옥외광고물을 설치하였고, 여기에 모 기독교계 기업이 선교문구를 담은 옥외광고물을 설치한 데서 비롯된 사건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한기총은 그 선교문구(가령, “Jesus love you” 같은)들은 공공적 성격을 지니는 계몽적 문구이므로 종교자유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럼에도 개신교의 일방적이고 배타적인 선교관행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문구를 다른 시각에서는 공공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결혼식, 장례식, 일반 가족관계, 직장활동 등 일상생활 곳곳에서 기독교의 무례한 일방적 포교를 체험한 이들의 시선에서 옥외광고물에 적힌 그 평범한 종교적 문구가 결코 공공적인 계몽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교회에서 실행되는 종교교육이 지나치게 종파성을 띠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종교성을 드러내는 어떤 행위도 공공적인 함의가 들어 있지 않다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사회에서 종교가, 특히 개신교가 사회의 공공적 가치와 얼마나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종교교육에서의 공공성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종교교육을 공교육화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종교계 사학만의 종교교육은 종교교육을 협애화하여 종교적 교육(종파 중심적 교육)에 편향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이러한 현실은 선교학이나 종교교육학으로 하여금 다종교, 다문화상황을 반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종교교육에 개입할 여지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종교, 다문화사회에서 종교교육을 공교육화하는 것은 종교 간의 대화에 관한 학문이나 종교의 사회적 위치에 관한 학문의 역할을 종교교육에서 한층 강화하는 요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선교학과 종교교육학이 종파 중심적 신학에 치우치기보다 시민사회내의 공론의 장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기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이 사회적인 공공적 가치를 더 많이 담아낼 수 있도록 자극할 것이고, 종교적 표현의 자유의 문제가 인권 침해와 갈등을 일으킬 때 그것을 조절하는 사회의 지적 감수성을 보다 성숙하게 할 것이다.

하나 더 언급하자면, 오늘날 지구화 현상이 매우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망이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으로 다중화되어 형성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안전과 행복은 더 이상 국경 내의 문제로 한정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훨씬 복잡한 문화적 접속과 종교적 관계가 필요해졌다. 또한 지구온난화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인간간의 문화적 종교적 접속의 차원을 넘어선다. 모든 타자화된 것과의 관계 재설정을 요청되는 것이다. 실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타자화된 것과의 관계 재설정의 문제는 종교간 문화간 대화주의의 한계지점을 넘어서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왜냐면 대화에 필요한 언어를 갖지 못한 존재는 동물이나 식물, 기타 자연물 같은 비인간적 존재들만이 아니라, 권력관계에 의해 지배적인 언어감각에서 소외된 비인간화된 인간들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각 종교 전통은 이러한 관계 재설정에 필요한 깊은 성찰의 흔적들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인류의 다양한 유산 가운데 종교가 갖는 가장 유용한 것들에 속한다. 하지만 종교의 권력화 과정에서 이러한 성찰들은 신앙 전통 속에서 유배당하였다. 권력화를 지향하는 성공의 도구로서 신앙의 요소들이 재구성되었고, 근대는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가 이러한 신앙의 도구화를 추동한 주요 세력으로 부상한 시대였다.

종교교육의 공교육화는 종파 중심적 교육을 지양하고 모든 존재/비존재와의 대화를 기반으로 하는 유배된 전통을 복원하는 제도적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이현주 목사에게서 그러한 되살아난 전통의 한 결을 살필 수 있었다. 법륜 스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종교교육에 관한 성찰을 모색하는 다른 글은 또 다른 전통의 복원을 발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성찰들에 의존해서 종교교육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사회에서 종교가 가치 있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제도적 모색에 관한 것이다. 종교는 우리 사회의 공공성을 깊이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전망하게 하는 내적 자산을 갖고 있다. 그것을 이 글은 기다림과 들음의 대화성에서 보았고, 비인간화된 존재들의 은폐된 소리를 듣는 신앙의 영성으로 해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