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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한국교회의 선교, 이제 성찰의 시간이다

이 글은 분당샘물교회의 단기선표팀의 아프간 피랍사태를 맞아 [연세대학원신문] (2007.9)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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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선교, 이제 성찰의 시간이다




 

피랍 초기, 한 명이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던 날 나는 피랍자가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 꿈을 꾸었다. 그날 새벽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깬 나는 생각의 균형을 잃어버렸다. 격앙된 심정에서 교회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고 말았다. 몇 시간 후 이메일 한 통을 받았고, 나는 얼른 그 글을 삭제했다.

이후 한동안 약간의 수면 장애를 겪었다. 밤마다 이 사태에 대한 기사들을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목사로서, 민중신학자로서 뭔가를 말해야겠기에 정보를 검색하고 생각을 정리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공적으로 몇 번의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피랍자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 탓에 생각을 더 진전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사유의 사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8월 28일 밤 모 일간지 기자로부터 아프간 피랍자들의 신병인도 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12명이 석방되었으며, 그 다음날 나머지 7명이 석방됨으로써 이 사태는 43일 만에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겠다. 그러나 동시에 두 사람의 죽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튼 이제는 성찰의 시간이다.

이 사태에 대해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기독교 선교의 문제점에 관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공격적 선교’, 곧 개종을 목적으로 하는 선교가 불가피한 것이냐는 물음이다. 현대 선교학에서 이러한 태도는 더 이상 논의될 수 없을 정도로 구태의연하다. 일부 반지성주의적 흐름을 제외한 서구사회의 기독교 일반은 이미 공격적 선교를 지양한 지 오래다. 한데 한국기독교의 절대다수는, 알다시피, 공격적 선교 일색이다. 왜 한국기독교가 특히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길게 언급한 바 있고, 여기서 이야기할 지면이 없으니 그 사실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만 줄이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이러한 공격적 선교가 최근 해외선교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략 1990년대 이후 급속하게 팽창한 현상이다. 이때 주요 선교지는 사회주의권, 중부아프리카, 그리고 아랍권이다. 왜 한국교회가 해외선교에 갑자기 몰입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들이 나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 내에서 심화된 교회의 위기. 특히 양적 성장의 위기를 해외선교를 통해 돌파하려는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해외 선교를 열정적으로 하는 교회들이 대체로 양적 팽창에서도 성공하고 있다. 이러한 성공사례들이 회자되며 점차 크건 작건 한국교회 전체가 해외선교팀을 조직하는 데 분주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해외 선교 붐은 공격적 선교 일색이다. 그것은 해외선교에 대한 선교학적 성찰의 결핍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피선교지에 대한 지역학적 고민이 전무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지의 사회구조, 갈등양상, 문화 등에 대한 고려 없이 선교가 수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는 ‘소통’이 아니라 ‘정복’을 지향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선교프로그램은 선교주체의 우월감을 강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며, 이를 통해 한국기독교의 위기가 수반하는 자존성 해체의 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바로 이점이, 앞서 말한, 내적 위기를 외적 행위를 통해 돌파하려는 전략이라는 주장의 근거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 아프간 피랍 사태는 조금 더 복잡하다. 왜냐면 이들 피랍자들이 한민족복지재단 소속 선교팀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민족복지재단을 설립한 분당샘물교회는 한국교회 대다수의 선교태도인 공격적 선교를 지양하고자 하는 개혁적 흐름의 선봉에 있다. 요컨대 개종 중심의 선교 대신 봉사 중심의 선교를 주장함으로써 그 위상이 격상되고 많은 신자들을 불러 모울 수 있었던 교회라는 것이다. 하여 이 선교팀은 병원과 유치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도록 기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파견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선교 컨셉이 일상화된 신앙적 아비투스 자체를 지배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좀 더 면밀히 따져보아야 하지만, 이들의 아프간에서의 행보에 관한 기사들 속에서 공격적 선교의 습성이 새로운 선교 컨셉 속에 모순적으로 얽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편, 한민족복지재단이 신흥 해외선교기구여서 현지 코디네이터를 자체조달하지 못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곳에서 이미 수년간 활동했던 대표적인 공격적 선교기구인 인터콥의 현지지원에 의지해야 했다면, 그러한 모순적 결합은 더욱 현저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민족복지재단 선교팀의 피랍 사태는, 비록 그 기구가 공격적 선교를 지양하려 했음에도, 여전히 ‘공격적 선교의 자기 파괴적 결과’라고 하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 공격적 선교를 보다 철저히 지양해야 하는 과제를 향후 한국기독교의 선교적 숙제로 간직하게 된다.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단기선교’라는 최근 선교프로그램의 주도적 관행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피랍된 선교팀도 10일짜리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이런 단기선교 참여자들은 현지인과 소통할 능력이 최소인 존재들이다. 이들의 활동이 가능하려면 현지에서 잘 짜인 선교프로그램과 숙련된 코디네이터가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우발적인 위험 사태가 매우 적은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단기선교팀들은 앞다투어 극도의 위험지역으로 파견되고 있다. 또한 현지의 선교프로그램이나 현지 코디네이터의 숙련도에 있어서도 외국의 잘 짜인 평화운동 기구들보다 훨씬 뒤쳐져 있다. 한민족복지재단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판단된다. 보다 나은 선교관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실현시킬 능력이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한국교회는 단기선교라는 일종의 어드밴쳐 게임을 통해 참여자들의 신앙적 충성심을 증폭시키려는 위험한 놀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한민족복지재단처럼 개혁적 선교관을 가진 기구도 여기서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분당샘물교회의 봉사 중심의 선교로의 전환은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에서 중요한 선례라고 본다. 하지만, 그들이 의도했건 아니건, 여전히 여기서도 내적 위기의 외부화를 통한 극복 전략은 수정되지 않았다. 선교는 피선교지 현지인과의 대등한 소통을 통해 수행되는 삶의 나눔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의 나눔의 진정성을 견지하지 않는 선교는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