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한국 기독교, 지금이 성찰의 기회다

이 글은 [아웃사이더] 12호(2003. 3-4 합본)에 실린 글입니다.


----------------------------------




한국 기독교, 지금이 성찰의 기회다

 

 

1

 

미국의 대 이라크 공격이 시작됐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개전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미 대통령 부시는 이 전쟁은 이라크 국민이 아닌 후세인 개인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임을 분명하게 말하였다. 문뜩 알카에다와 빈 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에서 아프간의 사상자가 얼마였는지 알고 싶어졌다. 인터넷을 대충 뒤졌는데 내 둔한 실력 탓인가 그것에 관한 정보는 보이질 않았다. 다만 8백만에서 1천만 명에 이르는 아프간 난민이 발생했고, 그들의 삶은 죽음보다 결코 낫지 못하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앨빈 토플러는 최첨단 무기에 의해 오차가 최소화됨으로써 민간인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는 이른바 깨끗한 전쟁을 인류에게 선사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2003년의 전쟁은 이 낭만적 미래주의자의 장미빛 꿈에 얼마나 다가갔을까? 나는 아프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거나 죽음 같은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리라는 악마적 상상력에 사로잡힌다.

그날 저녁 한 공중파 TV에서 기획한 좌담회를 시청했다. 사회자를 포함해서 패널들의 주된 관심은 이 전쟁에서 우리의 득실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게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지에 치우쳐 있다는 인상을 나는 지울 수 없었다. 천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날 것이 예상되는 전쟁을 보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공중파 TV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주판알 튕기는 모습을 방영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런 얘기는 청와대 밀실에서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공중파 TV는 희생자가 얼마나 생길지, 그들을 위한 지원 대책과 방해 요인은 어떤 것이 있을지,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 등등의 토론을 방영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한데 슬프게도 내가 바라는 토론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나는 별로 아이디어가 없다. 또한 부끄럽게도 주판알 튕기는 패널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대해 나는 나름의 할말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국제적 역학 관계를 분석하고 추론하고 그 힘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문제는, 희생자의 고통을 떠올리고 함께 아파하고 내가 가진 자원이 그들에게 어떻게 나눠질지를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익숙한 일상화된 사유 패턴이었던 것이다. 전쟁은 이미 우리 자신, 아니 내 안에서 이미 일상화되어 있었다.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도 평화를 논할 때도 자유를 염원할 때도 힘의 숭배자라는 무의식적 자의식을 경유해서만 그러한 숭고함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아메리카주의는 아메리카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도 활력 있게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하기 싫은 더러운 자화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야 말았다. 내가 무의식처럼 내 안에 각인된 종교적 아비투스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흉물스러운 자화상에 우리의 종교적 담론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우리의 종교적 제도에 격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힘의 숭배자로 우리의 신앙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장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최근 수 차례에 걸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개최된 이른바 기독교적 평화 집회를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우리의 종교적 제도가 나은 전형적인 신앙 행위의 귀결이며, 또한 이 집단적인 신앙 행위 속에는 우리의 종교 제도를 더욱 힘의 숭배 신앙으로 재구성하는 실천이 함축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2

 

111일과 19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 기도회’, 29일 부산과 대구에서 각각 동일 명칭으로 개최된 기도회, 그리고 3.1절을 기해 여의도에서 열린 구국 금식기도회’. 최근 기독교 보수주의 엘리트들이 주도한 이 대형 집회들은 무엇보다도 각 집회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대대적인 대중동원 능력을 시의적인 정치 현안에 맞추어 보여주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물론 기독교의 대중 동원의 규모로 수만 명이라는 수가 깜짝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수십 배나 되는 대중이 동원된 사례는 한국 기독교 신앙 형성사에서 그리 낯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시의적인 정치 현안에 기독교가 개입하고자 했다는 사실도 그리 드문 현상은 아니다. 주목할 것은 기독교 보수주의 엘리트들, 대규모 대중집회, 그리고 시의적인 정치 현안,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결합된 사례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드문 현상이라는 데 있다. 사실 참여의 문제를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해석해왔던 급진주의적 기독교 운동이나 개혁적인 태도를 가진 기독교 세력은 끊임없이 정치적 현안에 대해 공공연히 입장을 표명해왔지만,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조직화된 대중이란 특히 최근에 와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동안 보수주의적인 기독교 주류 세력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 게임에 깊이 관여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공적인 신앙의 형태에서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비교적 충실히 견지해왔다. 그런데 위의 세 요소의 결합의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원칙이 수정되고 있는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 사실이 이 기도회에 대해 내가 주목하는 점이다.

정교분리의 신앙이란 서양 근대 기독교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정교분리 신앙및 그와 한 쌍을 이루는 신앙의 자유원리는 낡은 종교 문화에 대항하는 근대적 부르주아지와 근대적 교회간의 동맹의 원리였고, 근대적 신앙은 이러한 원리를 신앙의 요소로 내면화함으로써 성공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주의가 교회 내적이고 수도자적인 금욕주의를 세속화/일상화함으로써 서구 사회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는 막스 베버의 이해는 결국 정교 분리 신앙의 내면화/형성 과정이 서양 근대 사회의 형성과 서로 맞물려 있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신앙의 원리는 단지 시간적 차원에서만 기독교인의 일상에 개입했던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동시에 그것은 공간적인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즉 기독교 담론은 비서구 사회들과 서구의 전근대가 등가물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고, 선교란 그러한 생각을 피선교민에게 내면화/형성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정교분리 신앙을 내포하는 근대적 기독교는 서구인이든 비서구이든 간에 자신의 과거를 증오하고 부르주아지적 근대 속에서 신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이때 신은 부르주아지적 이상의 종교적 판타지를 담고 있었고, 이것은 교회적 신앙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도 이러한 근대 기독교적 포교와 넓은 의미에서 맞물려 있다. 다만 선교사들의 절대 다수가 유럽인이 아니라 미국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미국의 문명화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는 종교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 한국의 선교에서 특기할 사항이다. 요컨대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 중심의 질서관을 역사적 모범형으로 인식하게 하는 종교적 장치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충실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곧 충실한 미국의 하위 시민이 된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월드컵, 노사모 신드롬 등으로 달아오른 2002년의 한국 사회는 미국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결코 하나로 수렴되는 현상은 아니었지만, 담론 지평은 이것들을 실제보다 과도하게 단일한 코드로 연계시켰고, 사람들은 당연히 이 현상들이 서로 엮어진 것처럼 이해했다. 요컨대 반미 분위기는 사뭇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함으로 지각되었던 것이다.

이에 기독교 보수주의 엘리트들은 심각한 위기 의식을 가지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기도회를 주도한 이들의 일련의 발언은 그들이 더 이상 과거처럼 정교분리 신앙 속에 안주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우리 주장을 적극적으로 펴겠다.”(길자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신임회장) 북한이 파 놓은 땅굴이 몇 개나 된다느니 남한 내 고정간첩이 수만에 이른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돌출 발언은 이들이 위기 의식에 얼마나 허둥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전국적으로 고조된 반미 정서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환상은 공산화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했던 것 같다.

‘100주년 기념사업회사무총장 김경래는 나라가 어려운 상황이니 한국에 반미 세력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미국과 전 세계에 알리려는 의도에서 이 기도회들이 기획되었다고 말한다. 기도회 주체 측이 제공한 보도자료에 의하면, 우리 사회가 전쟁의 폐허에서 이만큼 살게 된 것은 다 미국 덕택이며 주한 미군은 우리 사회의 공산화를 막는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반미 촛불 집회가 자칫 미국을 자극해 주한 미군의 철수에 이르게 될 것을 그들은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요 인물의 하나인 김홍도는 111일 집회의 기도에서 외신기자들과 미 대통령 부시와, 미국의 상하원 의원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고 하면서, 한국의 대중 앞에서 영어로 기도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이들이 미국의 이미지와 신의 이미지를 오버랩시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위상이 실추된다는 것은 곧 신앙의 위기였고, 그러므로 이제까지 자신들의 신앙적 정초였던 정교분리 신앙을 수정하는 선택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교분리 신앙을 수정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한 가지 요인을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이미 1970년대 이래 미국의 기독교계에서 나타났고, 1990년대 중반 뉴트 깅그리치가 이끄는 공화당의 의회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현 부시 정부의 탄생과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악의 축개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부시의 극단적인 이분법은 기독교 보수파들의 전형적인 세계 인식의 틀을 보여준다.

이러한 미국적 기독교의 추세는 늘 그렇듯이 한국 기독교 보수파들에 의해 그대로 모방되었다. 장로 대통령 만들기나 한사랑 선교회의 대표인 김한식이 대선에 출마한 것은 그러한 시도에 속한다. 그리고 이번 기도회는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공공연하게 정치적 의사표시를 위해 결집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보수주의 그룹의 정치 세력화는 미국에 대한 선망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다.

 

 

3

 

이렇게 최근 일어난 일련의 기도회를 기독교가 정치 세력화하는 징후로서 읽는다면, 이제 기독교 신앙의 실천적 지향은 곧바로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여기서는 보수주의적 기독교의 실천적 지향에 대하여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하여 살펴보자.

기독교 신앙에서 평화란 희생자의 관점에서 가해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핵심은 평화를 희생자의 시선에서 이야기한다는 데 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이 주장하던 팍스크리스티아나, 곧 예수의 평화다. 이런 신앙에 기초하여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일체의 전쟁 자체를 거부하였다. 그것은 군대 자체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한데 이러한 신앙 개념은 사실 팍스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에 대립항으로서 제시된 것이다.

팍스로마나는 아우구스투스가 스페인과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했을 때 원로원이 그를 기리는 아우구스투스 평화 제단을 설립한데서 유래한다. 독일의 성서학자 클라우스 뱅스트는 이 재단 위에서 희생자는 연기처럼 사라져갔다고 말한다. 요컨대 평화를 기리는 이 제의에서 사람들이 도래한 평화를 환호하면서 축제를 즐길 때, 군대의 칼날에 난도질당한 희생자의 처절한 운명은 망각의 강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평화 제의는 희생자를, 그 고통과 피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세네카는 이 제의를 통해 기억된 통치자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제국적 질서의 평형 상태를 일컬어 팍스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라고 명명했다.

즉 팍스로마나는 권력의 중심인 로마에 의해 시작되고 유지되며 귀결되는 평화이며, 그러한 압도적 힘에 의해 지탱되는 평화가 없다면 세상은 야만과 혼돈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주장을 함축하는 평화다. 그런 점에서 평화를 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공공선을 대표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물론 그러한 공공선의 유일 담지자는 압도적인 힘의 담지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팍스로마나는 진리를, 도덕적 당위를 자신과 일치시킨다.

요컨대 팍스로마나가 통치자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평화라면, 그것의 기독교적 대립항인 팍스크리스티아나는 희생자의 시선에서 제기되는 평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국과 기독교간의 평화주의적 신념을 둘러싼 긴장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이완되어 갔다. 우리는 기원후 2세기 후반 유력한 일단의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팍스크리스티아나와 팍스로마나가 (대립 관계가 아닌) 유비적 관계로 재해석되는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가령 기독교 선교 과정에서 군대에 이미 입대한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생함에 따라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소극적으로 군대를 허용하게 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세기도 못돼서 기독교가 제국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하게 되자, 이러한 소극적인 허용은 적극적인 허용으로 둔갑한다. 교회는 타자화된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고 닥치는 대로 살생하는 폭력의 화신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최근 팍스로마나와 비견되는 팍스아메리카나를 보게 된다. 평화의 반대편에 있는 혼돈의 원인을 악의 축으로 설명하고, 평화를 그것의 제거로 보는 시각이 오늘날 평화의 사상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부시의 정부와 그 배후의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은 악의 요소를 제거하고 세상의 질서를 이룩하는 이행의 주체로서 미국을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 공공선을 담지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과 불가분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 엘리트들도 이러한 팍스아메리카나를 신봉한다. 이들의 북한에 대한 증오심은 악의 축이라는 부시의 규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리고 주한미군은 이 악의 요소로부터 한반도 대중을 지켜주는 방패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북한과의 대화란 있을 수 없고 오직 군대만이 그들의 야욕을 분쇄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힘의 미학을 믿으며, 미국의 압도적인 힘이 공공선을 위해 사용되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두 번째로, 보수주의적 기독교의 한국 민주화에 대한 태도를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의 민주화는 근대화와 더불어 발전했다기보다는 근대화의 결과로서 활성화되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돌진적(rush-to) 성격을 띠던 1980년대 전반까지 한국 사회의 근대화는 강압적인 성장주의 정책을 통해 실행되었으며, 이때 국가는 신성화된 권위주의적 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 교회 또한 초고속의 성장을 구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신앙은 성장주의적으로 강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성장주의적 신앙은 종교적 성화 구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종교적 성화 구조와 권위주의적 체제의 정치사회적 성화 구조가 서로 등가적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등가 관계를 갖는 국가와 종교라는 두 주체의 연동은 근대화라는 한국의 시민종교를 대중의 인식 속에 안착시키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담론 지형은 일체의 성화 구조에 대해 과도하게 비판적인 경향을 드러냈다. 이와 함께 민주화 담론이 활성화되었다. 민주화란 관계 구조가 수직적 네트워크에서 수평적 네트워크로 이행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제 과정을 가리킨다. 이것은 기독교를 필두로 하는 수직적 네트워크 유형의 시민사회 영역이 퇴보하고, 소수자의 주체화가 현저하게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소비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유력한 소비자 계층을 중심으로 개인적 주체화가 촉진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의 신앙의 위기를 가져왔다. 교회의 성장 추세가 반전된 것만이 아니라, 많은 교회들이 적자예산을 편성해야 했고, 교인 충성도가 급속도로 이완되는 것을 경험했다.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이미지가 극도로 악화된 점이 문제였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저술들이 대중매체의 환영 속에 시장성을 얻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은 대중매체로부터 외면당했다. 실제로 대규모의 시국 기도회들도 비판적으로 맞받아친 온라인 매체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매체들로부터 무관심의 냉대를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에 관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기의 예수 전승은 유대교의 전능자적 신성에 대한 도전자로서 예수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신이 인간이 됐다는 것은 신성 모독이었고, 그것은 거룩한 신 이미지의 해체를 의미했다. 다가와 겐조(田川健三)는 복음서의 예수를 역설적 반항자로 묘사한다. 그것은 일상화된 의미의 권위주의적 코드들을 교란시키는 존재로 예수가 기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특유의 말인 비유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예수의 비유들은 발화자에게서 완성된, 꽉 채워진 어떤 것이 아니라 수용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과정을 향해 열려진 것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런데 교회의 신앙은 얼마 되지 않아서 예수가 해체하고자 했던 바로 그 이미지로 예수를 그려냈다. 그것은 예수와 대중간의 수평적 대화 관계에 관한 예수 전승을 수직적 권위 구조로 재설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아가 교회의 신앙은 신과 세계라는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담론 틀 속에 교회를 중계자로 설정한다. 위계는 신-교회-세계로 3층화되었다. 또한 교회는 내적으로 직제에 따라 다시 위계화되는 수직화된 관계구조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신앙 담론 구조는 탈성화되고 민주화가 급속도로 진척되는 사회에서 대중적 기반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에 대한 기독교의 실천은 한국 사회의 재위계화, 재성화(resanctification)를 추구한다.

 

 

4

 

현재 한국 사회는 급속한 압축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현재의 지구화는 글로벌 자본 체제와 글로벌 웨펀 체제의 두 얼굴을 하고 차례로 한반도에 거칠게 상륙하였으며, 급속한 변화의 내적 계기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위기 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2003년의 상황에서 교회는 위기 의식에 처한 한국 사회의 또 하나의 주체다. 교회가 정치 세력화하는 것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골방에서 은밀하게 정치 게임을 하기보다는 공론의 무대 위에서 다른 주체들과 대화하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현재 한국 사회의 공론의 장에서 가장 대화에 서투른 존재 중의 하나다. 그러면서 과거에 쌓아왔던 힘을 바탕으로 세 과시에 몰두하는 양상이다. 게다가 그 모습이 힘의 미학에 치우쳐있다거나 권위주의를 추구하는 등, 위기에 대해 천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글에서 두 가지로 생각해본 이러한 천민성은 모두 신앙의 왜곡을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은 뿌리깊은 교회의 현상이다.

위기는 성찰의 기회다. 교회는 사회 현상에 개입하고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에 앞서 자신의 왜곡된 신앙을 돌이켜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 기독교 보수주의 엘리트들의 선동은 현재 신앙의 성찰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방해물이다. 그렇다면 먼저 그들의 허구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성찰을 위한 첫 단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