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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안병무 선생의 삶과 민중 사상의 현재성

이 글은 [연대대학원신문] 152호(2007년 4월)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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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의 삶과 민중 사상의 현재성

 

 

 

안병무 선생의 삶과 사상

 

선생은 1922년 평안도에서 출생했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간도에서 보냈고, 해방이 된 이후 서울에 와서 공적 활동은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95111월 피난 중에 월간지 야성(野聲)을 창간했는데, 선생의 공식적인 글이 처음으로 발표된 곳이 일인 잡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바로 이 책이다. 독일 유학을 다녀온 뒤, 19697월 두 번째 잡지 현존(現存)을 발행하였는데 이 책은 19808, 113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됐다. 그 사이 1973년 한국신학연구소의 설립과 동시에 세 번째 잡지인 󰡔신학사상󰡕을 창간한다. 이 책은 본격학술지로서 현대신학을 소개하고 한국적 신학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해 오면서 20073월 현재 136호까지 발행되었다. 그리고 198812월 선생은 마지막이자 네 번째 잡지인 󰡔살림󰡕을 창간한다.

이상의 매체들은 선생의 신앙적, 신학적 현실 참여의 주요 공간이었고, 그의 사상의 흐름을 시기구분 할 때 주요한 계기를 이룬다. 아웃사이더적인 예언자적 참여를 통해 계몽적 변화를 꿈꾸었던 야성의 시대의 실험은 동지적 집단의 내적인 분열로 좌절한다. 유학을 다녀온 뒤, 그 계몽적 실천의 좌절을 실존주의적 내면성의 발견을 통해 돌파하고자 했던 현존의 시대 1가 이어지는데, 이는 1975민중을 발견하게 되면서 반독재 투쟁에 나선 현존의 시대 2(현존적 민중의 시대)로 전환된다. 선생은 이를 전향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그만큼 이 변모는 그의 사상적 편력에서 결정적인 함의를 지닌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이 절정에 이르고, 그의 민중신학이 대중적으로 가장 폭넓게 회자되던 시기인 1988년 선생은 인간 중심적 타자성의 탐색을 존재 중심적 타자성으로 확대하려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죽임의 체계를 넘어서는 살림의 상상력이라는, 선생의 마지막 사상적 흐름의 특징을 담고 있는 살림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상에서 보듯 선생의 참여의 주된 양식은 이었다. 선생은 수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현재까지 발굴된 총 편 수는 918편이고, 이 글들은 선생의 저작으로 현재까지 출간된 28권의 단행본(순수 저작 7권을 포함) 속에 대부분 재수록되었다.

한편 선생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회. 선생은 끊임없이 제도화된 교회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교회를 모색하였다. 선생은 목사가 아니었으나 최소한 세 개의 교회(향린, 갈릴리, 한백)와 한 개의 여성수도자회(디아코니아자매회)를 설립하였고, 설교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주목할 것은 선생의 참여의 주된 양식인 수많은 글들의 대부분은 바로 이들 교회의 설교, 에서 시작한 것들이다.

선생의 사상은 이와 같이 몇 차례의 변모를 통해 발전해왔지만, 전체적으로 이 막힌 시대의 자폐성과 대결하면서 독설 같은 을 퍼부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지닌다. 다만 시대의 자폐성에 대한 이해가 변화되었다는 점이 그의 사상과 실천을 시기구분하는 근거이다. 한데 선생의 시대 이해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모는, 앞서 말했듯이, ‘민중의 발견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선생의 민중 사상의 전개는 민중신학이라는 한국적인 비판적 신학운동을 낳았다. 아래에서는 선생의 바로 이 민중 사상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이 시기는 한국 지성사에서 민중이 화두가 된 시대로서 각각의 지식 범주에서 다양한 민중론이 제기된 때였다. 한데 선생의 민중론은 이들 동시대의 민중론의 함의를 많은 부분 공유하고 있지만, 독특한 요소 또한 내포하고 있는데, 나는 바로 이 독특성에서 오늘 우리에게 유의미한 민중 담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안병무의 민중 사상, 그리고 우리 시대 민중론의 가능성

 

선생은 자신의 민중론적 전향의 계기를 전태일 사건이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민중이 자신의 신학의 테마로 처음 등장한 때를 1972년이고, 그 글이 예수와 민중이라고 회상한다. 한데 실은 이 글은 예수와 오클로스라는 제목으로 1979년 발표된 것으로, 선생의 민중론인 오클로스론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이론화한 글이다. 그리고 선생이 민중을 처음으로 신학적 주제로 언급한 글은 민족민중교회.

이 글은 1975년에 발표된 것으로, 민중신학의 출발점이 된 두 편의 글 중 하나다(또 하나는 서남동의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 안병무의 글과 함께 기독교사상19754월호에 게재되었다). 1974년 이른바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배후조종자 혐의로 실형을 받은 김찬국 김동길 두 교수가 1975년 가석방되자, 이를 환영하는 기독교교수협의회가 주관한 3.1절 예배의 설교 겸 강연 원고로 제출된 것이다.

이 시기를 계기로 선생은 본격적으로 반독재투쟁에 참여하여, 1976년에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실형을 받았고, 두 차례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1975.61980.8).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존이 강제폐간된 것도 그의 반독재투쟁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선생이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는 독일에서 기금을 지원받아 당시 해직된 진보적 지식인들이 민중론을 토의하고 발전시키는 연구공간이 되었다. 또 한국신학연구소가 발행하는 학술지 신학사상은 민중신학을 포함한 민중론이 발표되는 주된 매체였다. 이러한 민중론적 공론장의 형성이 당시 민중론들이 대체적으로 유사성을 띠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한데 선생은 처음부터 민중오클로스로서 명명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오클로스는 신약성서에서 민중에 해당하는 고대그리스어인데, 특히 마르코복음의 용법에 주목하면서 선생은 이 용어를 쓰고 있다. 사실 이 용어의 용례에 관해 사전들은 고대그리스어에서,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특별한 함의를 갖지 않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맑스주의 신학자 다가와 겐조(田川建三)1968년에 제출한 학위논문에서 마르코복음에서만은 이 용어가 특별한 사회학적 함의를 지닌다고 처음 주장하였는데 이를 학계에선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는 세리, 병자, 매춘녀 등, 당시 사회의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적 대중을 일컫는 용어였다는 것이다.

한데 아마도 서남동 선생을 통해서 그의 주장을 소개받은 안병무 선생은 다가와의 견해를 발전시켜 독특한 민중론을 전개하였다. 우선 선생은 오클로스를 귀속공간을 박탈당한 대중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당시 선생은 이 말의 함의를 예각화하여 이해하지 못했지만, 귀속공간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주체화되는 데 심각한 장애를 갖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들의 탈주체적 체험은 합리적 사유과정을 통해 의식화되는 것이 쉽지 않은, ‘배제의 상흔을 몸에 각인한 존재들이다. 그러한 상흔은 그들로 하여금 왜곡된 자아를 형성하게 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언어를 심하게 굴절시켜 놓았다. 하여 그들은 언어를 박탈당한 존재에 다름 아니며, 성서의 실어증걸린 이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노동자의 주체화 프로그램 같은 합리적 프로그램과는 다른, 보다 치유적인 주체화 프로그램이 선행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의 민중론은 주체화의 문제를 전면에 세운 일반 민중론에 비해 고통의 문제에 더욱 민감하다.

한편 선생의 오클로스는, 마르코복음의 대중인 것만이 아니라 예수의 대중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다가와를 넘어선다. 그것은 신학연구사적인 전문적 논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 얘기하기에는 부적절하지만, 결론만 얘기하면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를 논할 수 있는 방법론적 가능성을 민중론을 통해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연구사에서 획기적인 공로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생은 이 역사적 연구에서 초점을 예수 개인이 아니라 예수 사건으로 전환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개체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예수와 오클로스의 상호성이 역사의 예수 연구의 주제라는 것이다. 사건 속에서 예수가 오클로스로 인해 깨달음을 얻고, 오클로스가 상흔을 극복하게 되는 예수와 민중의 자아의 서사가 바로 복음서 속의 예수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생은 민중의 주체화에 관한 다른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 구원론적 틀로 전개된다.

안병무의 이러한 민중론은 그의 동시대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단일대오적 민중의 주체화를 강조했던 반독재민중운동 담론의 시대가 지나고, 하나로 환원시킬 수 없는 고통에 병들고 뒤틀린 자아들로 넘쳐나는 민주화의 지구화의 분열증적 시대의 담론 속에서 민중을 고민해야 하는 우리에게 선생은 민중신학을 포함한 민중론의 담론적 과제의 매우 중요한 하나를 제안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