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11.1.11) 칼럼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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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당한 소, 돼지를 향한 애도
한 회의에서 박영대 소장(우리신학연구소)이 낯선 제안을 했다. ‘살처분 되는 소와 돼지가 일백만 마리를 넘었다. 종교인들이 애도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알기는 했어도 그다지 관심 없이 지나쳤다. 가끔씩 ‘살처분’이라는 살벌한 용어가 귀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돌아보면 그것에 대해 길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긴 생각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다. 조류독감 위기론이 한참일 때 인류의 대규모 사육체계가 재앙을 낳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내가 일하는 연구소를 통해 글과 강좌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1억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날 수도 있다는 대재앙설이 나돌던 때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한데 박 소장이 말한 것은 죽임당하는 소와 돼지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조금이나마 고민했던 것의 초점은 인간이었는데, 그는 동물을 얘기하고 있었다. ‘아차, 그렇구나. 닭이, 소와 돼지가 학살당하고 있구나. 우리가 바로 살육자이구나.’ 현기증이 일었다.
신문에서 농부인 전희식 씨의 글을 읽었다([한겨레신문] 2011.1.9). 살육당하 소와 돼지를 대표해서 늙은 소 한 마리가 연설하는 형식의 글이다. 이 소는 소의 생태와는 무관하게 체중만 늘리게 하는 배합사료와 남발하는 항생제들로 저항력이 약화될 대로 약화된 신체가 전염병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고발한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 [조류독감]은 이른바 도구적 개발주의와 축산업혁명을 더욱 극단화시킨 지구화의 폐해를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습지를 파괴하고, 생산성에만 치중하는 산업논리가 축산업메커니즘을 추동하는 세계, 공공성을 상실한 백신 수급 시스템 등으로 조류독감 바이러스의 변이 가능성이 극대화되었다고 한다.
전희식 씨의 글에서 학살 현상에 관한 생생한 묘사는 수치심 없이는 읽을 수 없다. “도살장으로 끌려가 컨베이어벨트 쇠갈고리에 걸려 빙글빙글 돌면서 바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을 그들은 알 겁니다. 목숨이 다 끊이지 않은 채로 머리가 잘리고 사지가 조각납니다.”
이것은 구제역에 감염된 동물을 죽이는 장면이 아니다. 특정 지역에 의심 가는 소나 돼지 등이 있으면, 인근 지역의 모든 가축은 이렇게 싹쓸이 학살을 당한다. 요 며칠간 매일 10만 마리를 그렇게 살처분했다고 한다. 구제역이 전염성이 대단히 높은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전체 축산업을 망치게 할 수도 있으니 예방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이유다. 실은 청정국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산업논리가 우선한 결과라는 점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것은 가축을 키우는 농부의 관점도, 그 고기를 먹는 소비자의 관점도 아니다. 원활한 수출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산업의 관점이다. 그리고 이 논리를 생각 없이 동의해온 우리는 그 종범이다.
축산업 수출이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물론 그것과 연관된 피해는 좀더 클 수도 있다. 또 축산 가구의 몰락은 더 큰 사회적 문제로 확산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살처분이라는 손쉬운 방식이 피해를 막는 제일 값싼 대책일지도 모른다.
이날 우리는 이 회의에서 불교와 가톨릭, 개신교, 그리고 가능하면 원불교까지, 3~4개 종단의 비판적 단체들이 주도하여 우리의 탐욕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살육에 대해 사과하고 그 주검들을 애도하는 행사에 합의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전문들로부터 듣고 우리의 탐욕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점검하는 기회를 갖기로 했다. 우리 대부분이 무감각했던 것, 그러는 사이에 자행된 살육, 그것을 속죄하는 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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