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야! 한국사회) 2011년 2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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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찾는 이들을 위한 조언
재작년의 일이다. 압구정동에서 노방전도 하는 교인들로부터 주보를 받았다. 고급종이에 칼라로 인쇄된 화려한 소책자다. 웬 주보가 이렇게 두터운가 했더니, 새로 등록한 교인명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족히 수백 명은 돼 보였다. 주보이니, 필경 지난 한 주간에 등록한 교인이겠다.
지금보다도 더 교회가 탄핵의 대상이던 때다. 신문, 잡지, 단행본, 심지어 방송에서조차 교회에 대한 비판적 기조의 담론들이 유포되고 있었고, 저 화려한 주보의 주인공은 이런 지탄을 한 몸에 ‘받아 챙기던’ 교회였다.
그럼에도 그 교회는 여전히 한 주에 수백 명의 새 교인이 생겼다. 이런 사정은 다른 대형교회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반면 중소형교회들은 사정이 다르다. 2005년 인구센서스에서 교인수 감소가 확인되었던 그 실제는 대형교회가 아닌 중소형교회들에서 체감되고 있었다.
교회에 대해 온갖 비판으로 설레발 쳤던 내게 한 목사가 말했다. 모두가 외면하는 곳에서 소리 나지 않게 일하는 사람이 제일 많은 종교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비율을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러한 개신교회나 목회자가 다른 종단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언론이 제기하는 교회의 문제들은 주로 대형교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교인수 감소의 가장 큰 피해는 중소형교회가 겪고 있고, 심지어 훌륭한 일에 헌신하는 작은 교회들 대다수도 그러한 위기에 처해 있다. 아울러 이들 훌륭한 목회자와 교회들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고, 그이들이 헌신적으로 해오던 일도 대단히 어려운 사정에 놓여 있다. 물론 대형교회들에 비해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중소형 교회들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교인수 감소는 그 문제들에 대한 사회적 처벌의 맥락에서만 해석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깊이 있는 분석과 토론이 필요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교회를 찾는 이들이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이유는 존재의 안전에 대한 갈망과 관련이 있다. 어느 시대나 사회적인 불안이 신앙을 선택하는 동기가 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끝없이 치솟고 있는 추세다. 정가에서 복지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는 것도 사회적인 불안에 대한 공포의 반영일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 특히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그러한 사회적인 안전에 대한 욕망을 신앙상품으로 개발하는 데 있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종교집단이다. 신학자로서, 그리고 비록 삼류였지만 목회자였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자기 존재의 위기에 대한 위로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위로가 삶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고, 한국의 대형교회가 이룬 신앙상품의 효능에 대해 폄하할 생각도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위기 치료제로 개발된 대형교회적 신약(新藥)은 그 부작용에 대한 경고 없이 처방⋅활용되었고, 다른 교회들, 심지어는 다른 종단들에까지 무분별하게 유포되었고 있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임에 분명하다.
한국교회가 개발한 불안에 대한 신앙상품은 ‘자기중심적’이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 심지어는 이웃에 대한 공격성을 강화시키기까지 하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기 성공주의와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자본주의와 잘 맞물린다. 더욱이 최근 들어 업그레이드된 변형 상품은 중상위 계층적 특이성을 지닌다. 이것 역시 자본친화성을 극대화한 신자유주의적 사회모델과 잘 부합한다.
하여 종교적 위안을 받고픈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좋겠다. 이웃 없는 종교보다는 이웃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서 고달픈 삶의 위안을 덜어내는 종교를 찾기를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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