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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 안병무의 ‘오클로스론(論)’을 중심으로

이 글은 [예수 민중 민족. 안병무 박사 고희기념논문집](1992)에 게재된 것입니다.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 안병무의 오클로스론_예수 민중 민족. 안병무 박사 고희기념논문집(199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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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안병무의 오클로스을 중심으로

 

 

 

1. 머리말 : 민중신학 민중론의 현 단계와 그 과제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 민중상황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서 태동하였다. 이 신학적 성찰은 민중 당파적 가치 지향을 토대로 하는 실천적관심을 내포한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이 1980년대적 인식지평[각주:1] 위에서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명료화함으로써 변혁적 신학으로 귀결하는 것은 자연스런 발전경로라 할 수 있다.

변혁적 신학은, 1970년대 민중신학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민중 당파성을 견지하면서도, 그것이 지식인의 정서적종말론적 열망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당파성과 현실 사회변혁에 기능적인(혹은 기능적이라고 믿는) 과학적 사회이론, 특히 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과의 결합을 모색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각주:2] 그러므로 변혁적 신학은 민중 당파적 변혁이라는 존재론적 전망에 기초하여 현실적인 것[각주:3]을 추구한다: 변혁되어야 할 사회에 관한 현실적 인식’, 변혁 방식에 관한 현실적 인식’, 그리고 변혁 주체에 관한 현실적 인식.

이 글은 민중신학의 민중론에 관심한다. 민중신학자들은 습관적으로 민중을 역사의 주체라고 불러왔다.[각주:4] 이를 1980년대적 용어로 다시 말하면 민중은 변혁의 주체라는 것이다.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민중신학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소외론적 관점[각주:5]이고, 다른 하나는 계급론(모순론)적 관점[각주:6]이다. 전자의 입장은 민중을 고난의 담지자라는 소극적 측면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로부터의 소외라는, 모두를 포함할 수도 있고 극소수만을 포함할 수도 있는 애매한 민중개념은 역사(변혁) 주체로서의 민중을 단지 선험적으로만 단정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계급이론적 민중개념은 보다 진일보한 개념화이다. ‘계급동맹으로서의 민중이라는 관점에서 비로소 민중은 역사(변혁)의 주체로서 규정될 수 있는 사회학적 위치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민중 형성(formation) 요인을 민중 구성(structure) 논의와 동일시하는, 그리고 구성적 관점의 우위 하에서 민중을 규정하는 민중개념의 구성론적 단순화를 범해왔다. 구성적 차원의 논의가 객관적 사회구조와 관련된 것이라면, 민중 형성에 관한 논의는 민중주체성의 형성에 기능하는 사회적 조직화 등의 요인에 관련된 논의이다. 양자는 어느 정도 상호 관련성을 갖지만 동시에 어느 하나를 다른 것에로 환원시킬 수 없는 자율성을 보유한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의 민중 이해는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이 아니라 역사의 필연적 귀결로서의 민중이라는 환원론적이며 정태적인 비실천적 개념으로 와전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각주:7] 그러므로 계급이론적 민중 개념화는 보완 계승되어야 한다.

나는 이 글에서 민중신학 민중론의 계급론적 재구성을 제안하며, 이를 위해 그 성서적 기초를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둔다.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은 1세대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로서 독특한 실천적 함의를 갖는다. 반면 안 교수의 오클로스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실천적 함의에 동의할 수 없었던 2세대 민중신학자들은 계급적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계급론적 민중개념을 위한 성서적 기초를 제시하기 위하여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계급이론적 관점에서 재고할 것이며, 아울러 계급적론 민중 개념의 성서적 기초를 대안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2. 안병무 교수의 오클로스론과 그 실천적 함의

 

안병무 교수가 민중신학의 성서적 기초로서 전개한 독특한 예수론인 오클로스(οχλος)1970년대 초 또는 중반에 시작하여 1980년대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의 실천적 숙고의 귀결이었다.[각주:8] 여기서는 논의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안 교수의 오클로스론을 다루고 그 실천적 함의를 요약해 보고자 한다.

 

안병무 교수의 오클로스론의 형성

 

신약성서에서 오클로스의 용법은 이미 서구신학자들의 안테나에 포착된 것이다. 오클로스라는 어휘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예수 전승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나타난다.[각주:9] 오클로스는 주로 익명의 예수 주변의 사람들을 묘사할 때 등장한다. 이들은 말씀의 청중이고 기적의 목격자이며, 그리고 하느님나라 선포의 수혜자, 특히 그 나라의 선취적 사건으로서의 기적의 수혜자인 무명의 사람들이다.[각주:10] 그런데 마태오복음루가복음에서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라오스(λαος)가 있다. 실제로 이 두 복음서에서 라오스와 오클로스는 질적으로 구별된 집단을 나타내지 않고 혼용되어 사용된다. 여하튼 서구신학자들은 복음서 연구에서 예수의 이러한 무명 대중에 대하여 언제나 부차적인 관심만을 기울였다.

한편 마르코복음에는 라오스가 단 두 번, 그것도 구약의 인용문에서만 등장한다.[각주:11] 반면 마르코복음을 대본으로 하여 쓰인 마태오복음루가복음은 많은 곳에서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를 라오스로 바꾼다. 마르코복음이전의 그리스도교 문서인 바울 서신들에서 오클로스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각주:12] 󰡔70인역성서󰡕(LXX)에서도 별로 사용되지 않는 용어였다.[각주:13] 요컨대 오클로스는 마르코복음에서 예수의 대중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용된 용어다.[각주:14]

오클로스가 이렇게 마르코복음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 주목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일본의 급진신학자인 다가와 겐조(田川建三)가 있다. 그는 자신의 학위논문을 토대로하여 발전시킨 1968년의 책 󰡔원시 그리스도교 연구󰡕[각주:15]에서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는 세리, 병자, 창녀, (천민의) 어린이 등과 같은 사회의 최저변층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면서, 특정한 성격을 가진 하나의 행동주체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오클로스 용법은 마르코복음이 예수의 제자들을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입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각주:16] 요컨대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는 마르코복음저자의 편집적 계획에 따른 것이다.[각주:17]

안 교수도 마르코복음의 이러한 오클로스 용법에 주목한다. 그는 1975민족, 민중, 교회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오클로스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각주:18] 1979년의 예수와 오클로스마가복음을 중심으로에서 비로소 체계화된 하나의 신학적 논리로서 오클로스론을 전개한다. 그런데 그는 이 글에서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를 단지 편집사적으로 보는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예수와 관련시킨다는 점에서 다가와와는 구별된다. 실제로 󰡔신약성서󰡕 외에서 라오스가 히브리어 콰할(qahal)의 번역어로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의미하는 데 반해 오클로스는 무소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집단이라는 양자간의 사회학적 차별화를 전제한다면 마르코복음의 용법이 다른 복음서의 용법에 비해 보다 사실적인 기반을 갖는 것 같다.[각주:19] 하지만 그는 이런 약한 근거를 제외하고는 여기에서 어떻게 마르코복음의 독특한 용법이 역사적 예수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바로 그 어간에 안 교수는 해석자(마르코)와 전달자(민중)의 문제에 주목한다.[각주:20] 그리고 1980년대를 전후로 하여 전달자의 언어인 민중언어에 대하여 탐구하게 된다.[각주:21] 예수에 관한 최초의 전승은 구전 형태였으며, 그것은 민중언어였다는 것이다.[각주:22]

안 교수는 마가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각주:23]라는 글에서 이러한 민중언어에의 관심을 오클로스론과 결합시킨다. 민중언어인 예수전승의 특징은 그것이 형식상 이야기체[각주:24]라는 것이다. 이야기로서의 예수전승[각주:25]은 민중(=오클로스)을 통해서 마르코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마르코복음의 삶의 자리와 역사적 예수의 삶의 자리는, ‘민중의 고난이라는 점에서 서로 유비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의 유비와 전승의 연속성을 연관시키는 매개로 이야기체라는 전승 형식의 발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런데 여기서 안 교수 특유의 독창적이고 기발한 신학적 상상력이 동원된다.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면서 그는 민중의 이야기가 유언비어[각주:26]라는 방식을 통해 전달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예수사건의 전승모체라는 탁월한 논문[각주:27]에서 그는 이야기체인 예수 전승이 유언비어방식으로 예수에게서 마르코복음에로 전해졌다는 것을 밝힌다. 이를 위해 그는 유언비어의 일반적 성격[각주:28]마르코복음의 이야기와 비교한다. 양자간의 상응을 증명해 냄으로써 마르코복음의 이야기는 유언비어로서 전승된 예수 전승의 역사적 핵을 내포하며, 그 핵은 예수와 더불어 고난당한 민중의 현장과 관련이 있다. 이로써 안 교수의 오클로스론은 완성된다.

 

안병무 교수의 오클로스론의 실천적 함의

 

안병무 교수의 오클로스론은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 용법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와 오클로스가 더불어 벌인 사건[각주:29]을 밝혀냈다. 이것은 거꾸로 예수의 오클로스 사건이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 사건에서 재현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의 오클로스나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 양자는 사회의 경제, 정치, 문화적 분배과정에서 총체적으로 소외된 최악의 박탈계층으로서 사회적 고난의 담지자이고, 예수를 통한 해방을 염원하며, 예수와 더불어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예수의 오클로스가 역사적 예수와 더불어 예수사건의 공동주체였다면,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는 부활한 예수와 더불어 예수사건의 공동주체인 것이다. 즉 사회적 고난과 오클로스 당파적 해방이 이 두 사건의 연속성을 입증한다.

그런데 안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연속성은 바로 오늘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국의 민중사건 속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 (한국의 민중사를 통해인용자 주) 죽은 듯 했다가도 다시 살아나서 불의에 대항하는 민중의 소리를 듣는다. ‘여기에서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저들 속에 현존한다는 것을 안다[각주:30](강조는 인용자). 그것이 예수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표명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 사건들 속에 무소부재하신 하느님이 개입하셨음은 자명하기 때문이며,[각주:31] 역사의 예수와 오클로스가 더불어 일으킨 그 사건 속에서 민중사건의 연속성은 (예수의 이름이 공공연히 고백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난의 현장에서 벌어진 민중 해방의 에토스를 통해서 보증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사건은 민중사건의 원사건이다.

안 교수는 이러한 민중사건의 중단 없는 발현을 화산맥은유로 나타낸다. 민중사건은 마치 화산맥처럼 중단 없이 도도히 흐르고 있으며 역사의 계기 계기마다 표면으로 폭발분출한다는 것이다.[각주:32] 이러한 안 교수의 예수사건으로서의 민중사건에 대한 해석은 그에게 있어서 민중사건이 존재론적 사건이며 역사의 필연적 법칙으로서 이해되었음을 시사한다.

 

 

 

 

전달자 : 오클로스

전달방식 : 유언비어

 

 

 

 

 

 

 

 

 

히브리 민중사건

(출애굽 사건)

예수의

오클로스 사건

마르코복음

예수사건

한국의 예수사건

(전태일 사건)

 

 

 

 

 

 

 

 

원사건

 

 

 

 


그는 이 민중사건을 하느님이 벌이는 선교라고 말한다.[각주:33] 물론 이 하느님의 선교는 역사 밖, 피안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의 이 사건의 주체가 필요하다. 이 주체가 바로 민중이다. 민중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사건인 민중사건을 벌인다. 이것이 바로 안 교수가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말할 때의 의미인 것이다. 즉 민중은 역사의 존재론적 주체요 예수와 더불어 사건 속에서 메시아[각주:34].

이때 안 교수의 민중이란 다름 아니라 예수사건 속의 오클로스와 동의어 또는 이들을 중심에 둔 집단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타율적 무소속성을 사회적 특징으로 하는 집단이 민중(의 핵심)이라는 것이다.[각주:35] 예컨대 프롤레타리아트 같은 집단은 민중이 아니거나 민중의 주변부에 위치한다. 또한 민중은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인되는 실체도 아니다. 요컨대 이들은 1980년대 한국사회 논의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에 따른 변혁주체론과는 처음부터 길을 달리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민중이 역사의 존재론적 주체라는 관점은 민중에게 고난을 야기시키는 근거가 구조화된 체계임을 전제한다. 그래서 안 교수는 이것을 구조악이라고 표현한다.[각주:36] 이 구조악은 다름 아닌 ()의 사유화 체계.[각주:37] 이 체계는 민중을 끊임없이 죄인으로 재생산하여 을 분담할 권리를 박탈하는 배제의 논리죄의 체계[각주:38]와 관련된다.

안 교수는 공의 사유화체계죄의 체계는 시공간적으로 구조화된 체계로 본다. 그렇기에 민중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사유화된 공의 회복사건인 민중사건의 존재론적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구조화되었다는 사실에서 민중사건의 타도의 대상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왜곡된 체계임이 암시된다. 이런 왜곡된 체계의 ()생산자로서 역할을 하는 지배자들, 그리고 지배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많은 비민중은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각주:39] 이런 관점에서 안 교수는 김지하의 ()과 단()의 변증법이라는 시어를 차용한다.[각주:40] 즉 민중사건은, 인간을 타도의 대상으로 두지 않고 인간 행위의 구속(拘束) 요건이 되는 구조를 변혁하는 데 중점을 둠으로써, 폭력의 순환고리를 끊는 사건이라는 것이다.[각주:41] 비민중은 구원받기 위해 지금까지 자신들이 누리며 살아왔고 봉사해온 체계의 논리로부터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회개(=전향, 메타노이아, μετανοια)의 의미이다.[각주:42]

안 교수는 자신과 같은 신학자는 민중이 아니라 비민중으로서 민중을 억압하는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고 본다. 그러나 민중사건을 통해 회개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탄생한 것이 민중신학이라고 본다.[각주:43] 안 교수는 이렇게 탄생한 민중신학의 실천적 과제를 민중사건의 증언이라고 말한다.[각주:44] 따라서 민중신학의 역할은 민중을 계몽하여 민중사건에 참여케 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에 의하면 민중신학이 증언해야할 내용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사건이며, 이를 신학화하여, 이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섭리의 차원임을 입증해내는 것이다. 또한 민중신학이 증언해야할 대상은 민중이 아니라 회개하여야 할 대상인 비민중이다. 물론 이런 증언의 과제는 민중신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중문학’, 민중사회학’, 민중경제학등등 여러 학문영역에서 벌어질 수 있으며, 신학적 실천뿐 아니라 사회의 여러 실천 영역에서 분담하여 담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비민중이 민중적 실천을 한다는 것은 민중과의 동일화를 의미한다. 민중의 눈으로 역사와 사회(그리고 신학자는 성서)를 봐야 하며(의식의 동일화),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의 삶과 언어를 공유해야 한다(삶의 동일화).[각주:45] 민중의 삶의 특징이 고난()에 있으므로 후자는 고난을 공유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낮아짐의 동일화인 것이다.[각주:46]

이러한 안 교수의 민중론, 그리고 이의 성서적 기초인 그의 오클로스론은, 1970년대 초 또는 중반 경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 초 또는 중반에 절정에 이른, ‘현장으로!’라는 기치 아래 이루어진 이른바 지식인의 하방운동과 묘하게도 시기상 상응한다. 아마도 그의 민중론 및 오클로스론은 이러한 경향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이며, 이러한 경향 가운데 민중 계몽적일특성[각주:47]을 전제하는 동시에 동일화론에 기초한 일종의 하방품성론[각주:48]을 기능적으로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안 교수의 민중론의 실천적 의의는, 첫째로 민중사건을 신학적 핵심 주제로 삼음으로써 1970년대 이후 급격히 활성화되던 민중의 실천을 신학적으로 논증하며, 둘째로 비민중의 민중사건에의 참여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이러한 실천에 가담하는 비민중의 실천적 지향점을 명확히 하는 데에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안 교수는 민중의 실천에는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는 반면 비민중의 실천에는 구체적인 실천 윤리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그는 결국 민중을 역사의 존재론적 주체, 그리고 비민중 특히 지식인을 역사의 실천적 주체로 보는 셈이 된다. 여기서 비민중의 실천은 역사 변혁에 변수로서 작용하는 실천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위한 실천이다. 그러므로 민중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안 교수의 민중신학의 민중론은 실천이론으로서 발전할 수 없었다. 아마도 이것은 민중 자신에 의한 민중운동이 미미한 수준에 있고 비민중에 의한, 특히 지식인에 의한 민중운동이 운동의 주축을 이루던 시기의 인식 수준[각주:49]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1980년대의 변화된 상항은 민중 자신에 의한 민중운동의 실천 잠재력이 강화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각주:50] 그리하여 1980년대 민중신학의 지평에는 비민중의 실천론에 비해 민중의 실천론이 보다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 것이다. 그러므로 안 교수의 민중론을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의 민중론은 실천이론의 결여로서 인식되게 된다. ‘과학성의 결여’, ‘소시민적 당파성에 의거한 경험주의등을 문제 삼은 청년 활동가들의 1986년의 문제제기[각주:51]는 바로 이런 민중신학의 민중론, 특히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안 교수의 민중론에 있어서 실천론의 결여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각주:52]

이러한 문제제기를 넘겨받은 제2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당시 새로이 대두하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론적 패러다임을 수용하여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적 민중론의 재구성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두 가지 점에서 문제점이 나타나게 된다. 첫째로, 위와 같은 실천적 함의를 가지는 안 교수의 오클로스론을 거의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신학적 재구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전제라 할 수 있는 성서적 기초를 제시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둘째, 구성론적 논의의 우위 하에서 마르크스주의적 패러다임을 사용함으로써 구조 환원론적(경제 환원론적) 오류에 빠지게 되어 또 다시 실천이론으로서의 성공적인 재구성에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적 민중론의 계급론적 재구성을 위한 성서적 기초를 위해서는 안 교수의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인 오클로스론을 계급론적 패러다임을 활용하여 재고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사용할 계급론적 접근은 구성론적 관점과 형성론적 관점이 결합된 형태이어야 할 것이다.

 

3. 오클로스론의 계급론적 재검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가와와 안병무 교수는 마르코복음에서의 오클로스의 용법에 주목함으로써 이 텍스트의 민중성을 검증할 수 있었고, 여기에 안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운동의 민중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양자가 오클로스를 관찰하는 방식은 두 가지 비교점에 치중하고 있다. 하나는 다른 복음서들과의 용법 비교로서 여기서는 오클로스와 라오스의 비교이며, 다른 하나는 마르코복음내의 비교로서 오클로스와 제자들의 비교이다. 이 둘은 특권 대 비특권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로 만나는데, 전자에서는 사회적 비특권을 상징하는 수사어로, 그리고 후자에서는 예수운동 또는 마르코공동체에서의 비특권을 상징하는 수사어로 전용되는 오클로스를 발견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용어는 사회학적 함의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학자는 마르코복음의 구조 속에서의 오클로스를 간과하고 있으며, 오클로스의 사회적 함의를 구체화하는 데에 실패하였다.[각주:53] 내가 보기에 이 두 문제점은 서로 관련되는데, 마르코복음내에서의 오클로스의 용법을 보다 정교하게 물음으로써 그 사회학적 실체를 재구성하는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서 마르코복음의 오클로스 용법을 역사적 예수가 주도한 운동에 적용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각주:54]

 

⑴ 「마르코복음에서의 오클로스

 

안병무 교수의 오클로스론은 마르코복음서의 오클로스 용법을 통해 양식비평가들이 실패한 역사적 예수운동을 재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양식비평의 한계 아래 구속되어 있다. 즉 안 교수는 전승단위는 짧다라는 양식비평의 대전제에 구속되어 마르코복음서의 오클로스를 추적하고 있다. 하지만 현지조사를 통한 인류학자들의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전승형식은 언제나 짧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각주:55] 또 긴 단위의 구전의 경우 (계급/계층적, 지역적, 생태학적 측면 등에서) 다원적인 전승주체들에 의해 전승되지만,[각주:56] 이런 요인들에 의해 무한정하게 자유로이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변형요인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의도적인 요소가 보다 많이 개입되는 구전의 문서화 과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요컨대 편집과 전승은 엄밀하게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편집은 많은 경우에 단순히 전승에 내재하는 가능성들의 실현일 뿐이다.”[각주:57] 전자 또는 편집자는 자유로운 창작자가 아니라 전형에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전승을 재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코복음서에서 사용된 오클로스의 용법을 보는 데는 개별 텍스트(양식비평식으로 말하면 短話’,pericope)에서의 용법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불완전하고 전체 구조(문학적 콘텍스트) 속에 스며있는 전형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편집사가들은 마르코복음서의 지리적 구성에 주목하였다.[각주:58] 여기서의 주요 초점은 예루살렘과 갈릴래아에 있으며, 이를 통한 결론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마르코의 편집적, 전승사적 자리에의 추적에 있다.[각주:59] 그러나 타이쎈은 복음서의 지방색(Lokalkoloritforschung)에 관한 한 논문에서 마르코의 지리적 언급들이 역사적인 것일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각주:60]

마르코복음서는 예수운동을 지리적으로 (두 단계가 아니라) 네 단계로 구분하는데, 나는 이것이 예수운동의 대중활동의 네 단계와 상응한다고 본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각주:61]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본 문

~1,14

1,14~3,6

3,6~9,30

9,30~16,8

예수운동의 대중활동 거점

베레아

갈릴래아 촌락회당

갈릴래아의 호숫가

(성전)

 

여기서 제1 단계는 마르코의 편집적 구성에서 덜 중요하게 취급되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운동의 연속성이 시사되어 있다. 마르코복음서 뿐 아니라 네 복음서 여기저기에서 연속성을 시사하는 단편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개연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예수운동의 전개는 제2 단계부터인데, 위에서 시사하였듯이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갈릴래아와 예루살렘만을 구분한다. 하지만 나는 마르코복음서에서 갈릴래아에서의 활동단계는 명백히 둘로 구분되어 있다고 본다. 36절을 전후로 해서 대중활동의 주요 무대가 촌락의 회당에서 호숫가[각주:62]로 변화되며, 오클로스가 호숫가의 대중집회의 주요대중으로 등장한다.[각주:63] 반면 회당 안에서는 오클로스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구성과 관련하여 오클로스의 사용빈도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각주:64]

 

 

2단계

3단계

4단계

예수운동의 대중활동 거점

갈릴래아 촌락회당

갈릴래아의 호숫가

(성전)

오클로스의 빈도

2

회당 안에서는 0

21

회당 안에서는 0

성전 안: 6(회당에서는 0)

성전 밖: 8(회당에서는 0)


그러므로 마르코복음서에서 오클로스는 다가와나 안병무 교수의 발견처럼, 창녀, 세리, 병자, 날품팔이 등으로 특징되는 사람들일 뿐 아니라, 회당 안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갈릴래아 호숫가단계에서 예수운동의 주요 대중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코복음서의 네 단계의 지리적 구성이 역사적인 것처럼, 이 구성과 긴밀히 결부된 오클로스 용법은 예수운동의 역사적 전형성을 시사한다고 본다.[각주:65]

 

오클로스의 계급적 실체

 

(촌락)회당 안에서 오클로스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우선 회당의 촌락에서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묻는 것이 필요하다.

회당이 무엇에서 유래하였고 언제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는지, 그리고 그 발전과정은 어떠했는지에 관하여 확정된 설은 없다.[각주:66] 하지만 주후 1세기 경에는 회당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L. Sonne)은 예수 당시 팔레스틴의 대다수의 도시들과 규모가 큰 촌락에는 회당이 있었다고 말한다.[각주:67] 복음서 정보에 따르면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인 나자렛에도 회당이 있었다(마르6,1~2). 아마도 예수시대 촌락회당은 왠만한 취락 밀집지역에는 존재했던 것 같다. 촌락회당은 촌락의 예배와 종교교육의 장이었을 뿐 아니라 일종의 사법기구의 기능을 하였던 것 같다.[각주:68] 그러므로 촌락회당의 중심부는 곧 촌락의 규범적 질서의 중심부였다.

그렇다면 촌락의 지도력을 행사한 세력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전통적으로 고대사회에서 촌락은 농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부장적 공동체였다. 즉 지연적 요인과 혈연적 요인이 고대 농경사회의 촌락을 규정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이 양자의 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는 각 사회의 특수성에 속한다. 그러나 고대농경사회의 촌락 형성과정은 이상의 내적 요인뿐 아니라 외적 요인과 필연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즉 촌락간의 관계로부터 국가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국가에 대한 예속성이라는 요인이 촌락형성에 매개된다.[각주:69] 그러므로 촌락의 규범적 질서는 위의 내적, 외적 요인, 및 그런 요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 제도들과 상관관계을 맺고 있다.[각주:70]

예수시대 팔레스틴의 경우, 규범적 질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적 중심으로 하는 -부정의 체계였다.[각주:71]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그 이데올로기적 중심성 만큼의 정치적 중심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각주:72] 예루살렘의 정치적 지도력을 행사하던 세력인 이른바 산헤드린 체제는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의 대부분, 그리고 이두매 지방의 일부지역 정도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 같다.[각주:73] 더구나 교통이나 통신망, 인쇄술 및 대중매체 등이 원시적이던 시기에 보편적 교육체계는 부재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팔레스틴 사회의 촌락까지를 통합할만한 이념체계가 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각주:74] 요컨대 1세기 팔레스틴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부정의 체계는 성전의 상징적 중심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촌락 단위에서 이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구가 존재하여야 한다. 나는 이 역할이 촌락회당에 의해 담보되었다고 생각한다.

마르코복음 36~7절에는 예수일행의 촌락회당에서의 활동이 바리사이와의 결정적인 충돌 및 바리사이와 헤로데 체제와의 결탁으로 귀결하였음이 언급되어 있다. 마르코복음서에 따르면 이 사건 이후 예수일행은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회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서 헤로데 체제란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통치자 안티파스와 그 휘하의 관료조직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마도 헤로데 체제는 관할영역 각 지역에 세워진 요새들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통제기구를 가지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헤로데의 관료기구가 촌락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각주:75] 만약 이러한 가정이 성립한다면 촌락의 지도력은 바리사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들이 촌락의 헤게모니 집단이 될 수 있는 물적, 정치적 요인이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촌락의 헤게모니 세력일 가능성이 있는 대지주는 팔레스틴의 경우 부재지주로 특징지워진다(마르12,1~12). 즉 촌락의 사법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대농경사회의 부의 원천이 농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인근이나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농경사회에서 부의 집산지는 도시였다. 1세기 팔레스틴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하나의 주된 이유는 식민지배의 특수성과 맞물려 있다. 즉 팔레스틴의 식민지 상황은 식민지 지배국 정세의 급변과 예속국 지배층의 다원성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는 정보의 유통이 빠른 도시로 모여든 대지주집단이 그렇지 않은 대지주집단에 비해 생존조건이 유리했다는 것이다.[각주:76] 더욱이 헬레니즘 제국들의 식민지배 시대에는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사이를 잇는 중개무역으로 인한 상업적 부의 축적 가능성이 넓어짐에 따라 대지주는 도시에서 상업활동에도 참여했다. 따라서 팔레스틴의 대지주는 경향적으로 부재지주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프톨레미 제국의 식민지배 이래 농업 생산력의 계기적인 발전[각주:77] 및 상업 및 수공업의 활성화[각주:78]는 소자산가적 계층의 대두를 초래하였고, 이는 촌락에서 농민계급에서 상향분화한 세력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바리사이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는 사실 및 바리사이가 소자산가적[각주:79]이라는 사실은 상향분화한 소자산가 계층과 바리사이즘과의 상관성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나는 바리사이즘은 이 시기에 상향분화한 계층의 세계관이 종교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향분화한 소자산가 집단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갖게 되는 과정은 지배계급으로부터 일정한 자율권을 확보받기 위한 계급투쟁의 과정과 맞물려 있었으리라.[각주:80]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요인에 의해 바리사이는 촌락회당의 지배집단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촌락회당의 규범체계는 지배이데올로기인 -부정의 체계, 성전-회당기구에 의해 매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촌락회당의 규범체계는 촌락회당 질서에 통합된 사람들을 체제내화시키는 지배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였으며, 소자산가적 계급/계층의 계급이데올로기 구현의 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본래의 물음에도 돌아가보자. 오클로스가 촌락회당 안에서 발견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런 정-부정의 체계에서 배제된 이들을 의미한다. 타이쎈은 1세기 팔레스틴 사회가 사회적 무근성(sozialer Entwurzelung)으로 특징지워진다고 주장한다.[각주:81] 이는 당시 사회에서 비자발적인 요인에 의해 촌락에서 이탈하게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음을 전제한다. 이런 관점을 택하면 오클로스가 타율적 무소속성으로 특징지워진다는 안병무 교수와 다가와의 주장은 그 사회학적 타당성을 갖는다.

오클로스는 주로 (토지점유/소유) 민계급에서 비자발적 요인에 의해 농경지에서 이탈하게 됨으로써 경제적으로 가장 열악한 위치로 전락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러한 농경지로부터의 이탈은 촌락회당체제에서의 배제를 의미하며, 이는 -부정의 체계에서의 배제를 의미한다. 성전체제와 회당체제가 연결되는 지점인 정-부정의 체계에서의 배제란 이데올로기적으로 촌락공동체 규범체계에서의 배제뿐 아니라 민족공동체로부터의 배제를 의미한다. 이들 가운데 신체적, 정신적 질환이 많았던 것도 이런 사회적 무소속성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농민계급에서 하향분화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사회의 가장 천대받던 유형의 직업들인데, 이들 직업은 일시적이거나 혹은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이거나 혹은 통념상 가장 비도덕적인 것들이다. 그리하여 대체로 이 직업들은 생계나 건강을 유지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직업 복무기간이 짧았을 것이다. 한편 오클로스는 노동력 성수기에는 위와 같은 유형의 직업을 가졌지만, 비성수기나 명절같은 특정한 시기에는 에는 구걸이나 사회적 강도떼[각주:82]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오클로스는 하나의 계급이라고 할 수 없고, 대체로 (토지점유/소유) 농민계급에서 하향분화한 사회적 극빈층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예수운동에서의 오클로스의 위치

 

여기서 우리는 오클로스가 예수운동의 호숫가단계에서의 주요 대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즉 촌락회당 안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주요 대중은 회당체계에 편입된 사람들 가운데 피지배권에 속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토지점유/소유) 농민계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안병무 교수의 오클로스론이 강조하는 바인 예수운동의 주된 대중은 배타적으로 오클로스라는 견해는 단지 제3 단계와 제4 단계에만 타당하다.[각주:83] 4 단계에 오클로스가 주된 대상인 이유는 이러하다. 농경지에 긴박되어 노동으로부터의 여가를 가질 수 없었던 토지점유농민계급은 순례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순례 가능한 사회적 집단은 노동으로부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집단이거나 토지에의 긴박에서조차 배제된 집단일 것이다. 따라서 성전에서의 대중활동 단계에서도 오클로스가 예수운동의 주된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운동의 초기국면에서 오클로스가 있는 호숫가로 가지 않고 촌락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것은 자발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촌락회당에서 호숫가로의 대중활동거점의 전이는 외적인 상황 전개에 강제된 것이다. 즉 촌락회당의 헤게모니 집단인 바리사이가 당시 팔레스틴 사회의 공안당국과 결탁하여 반예수 전선을 펴게 됨에 따라 예수일행은 더 이상 촌락회당 안에서 활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운동의 대중이 오클로스이었다는 것은 타당성을 상실한다. 오히려 예수운동의 대중은 당시 사회의 피지배계급 일반이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4. 맺음말을 대신하여 : 90년대 민중신학 민중론의 심화를 위하여

 

80년대 민중신학의 민중론은, 1970년대 민중론의 소외론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극복하고 계급론적 민중론의 복원을 시도했다. 민중적 사회과학에서 공유하게된 민중개념인 이른바 계급/계층 동맹으로서의 민중론이 민중신학 민중론의 1980년대적 특징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민중론은 계급론과 동일한 설명변수를 가짐으로써, 양 개념상의 혼란을 야기한다. 즉 변혁적 개념화의 요구에서 민중의 개념화의 시도가 이루어졌다면, 변혁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말과 플로레따리아뜨가 변혁의 주체라는 말은 중복모순된다. 또한 계급적 실천론만 가지고는 사회의 다양한 실천을 포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민중의 재개념화가 필요하다.

사회적 적대들의 환원불가능한 다원적 실존이 1990년대를 맞는 우리들의 현실인식이다. 이러한 다원적 사회적 적대들은 그때그때마다 헤게모니 절합을 형성한다. 이때 헤게모니적 절합의 중심이 사회적으로 피지배적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상응할 때 나는 이 헤게모니 절합을 민중이라고 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민중은 사회의 그때그때마다의 특수성에 관련된 변혁적 실천의 존재양태이며, ‘민중적 당파성은 이 절합에 있어서 헤게모니의 내용을 이룬다. 이때 민중적 당파성의 효용성은 이 헤게모니 절합의 대중적 성격에 비례한다. 그런데 만일 이 헤게모니 절합의 헤게모니의 내용인 민중적 당파성계급적 당파성으로 구현된다면, 민중은 계급동맹이 된다.

나는 예수운동이 전략집단이 생산수단의 소유/점유자 계급출신으로, 1세기 팔레스틴 사회의 주요 생산자계급 출신이며, 이들의 실천이 자신들의 계급적 위치와 상응하는 계급적 실천임을 주장한 바 있다.[각주:84] 그리고 이 글에서 예수운동의 주요 대중은 오클로스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피지배층 일반이라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운동은 민중운동이며, 예수운동의 민중당파성이 계급당파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운동의 민중론은, 내가 시론적으로 제안하는 바, 1990년대를 맞이하는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로서 타당성을 갖는다.



  1. 1980년대의 인식지평의 변화에 관하여는 조희연․김동춘, 「80년대 비판적 사회이론의 전개와 ‘민족․민중사회학’」, 한국사회학회 엮음, 󰡔한국사회의 비판적 인식―80년대 한국사회의 분석󰡕 (서울:나남, 1990), 26~38쪽 참조. 여기서는 “70년대 반주류적 사회연구의 주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 지향적 학문’은 80년대를 경과하면서 민족적․민중적 학문으로 명료화되”었다고 보면서, “이 과정은 실천적 지향에 있어 (소시민적 지향에 대립하는) 변혁적 지향과 민족(해방운동)적 지향을 내적으로 담보해가고 방법론적 기초에 있어 정치경제학적(혹은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을 자기화해 가는 시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고 말한다(26쪽). [본문으로]
  2. 이런 점에서 이 과정을 ‘민중신학과 마르크스주의 관계설정에 관한 고민의 가시화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최형묵, 󰡔사회변혁운동과 기독교신학󰡕 (서울:나단, 1992), 3~4장 참조. [본문으로]
  3. 나는 ‘현실적’이라는 말의 개념을 마르크스적으로 이해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현실적인 것’(Wirklichkeit)은 ‘구체성’이 배제되지 않는 ‘추상적’ 실체이며, 단순한 경험의 소산인 ‘현상’(Erscheinung)의 배후의 개념이다. 특히 ‘현실’과 ‘현상형태’ 사이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명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적 역사법칙론이 ‘세계사적 보편법칙’이나 ‘일반법칙’이 아니라 ‘방법론적 일반원리’임을 입증하고 있는 유재건의 글 「역사법칙론과 역사학―최근 소개된 역사적 유물론에 관한 논의」, 󰡔창작과 비평󰡕 (1988 봄)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이점에서는 1970년대 민중신학과 1980년대 민중신학 사이에 기본적인 차이가 없다. 더 나아가 소위 ‘민중경제론’, ‘민중사회학’, ‘민중사학’, ‘민중 문학’ 등의 민중 지향적 학문들 모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개념 규정에 대해, 한편으로는 개념 규정의 부당성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개념화를 시도한다. 전자의 경우는 프로레타리아와 구별짓기 위한 전략적 언술로 보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소외론적 관점의 채택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소외론적 방법이 마르크스주의적 모순론적 방법과 대립된다는 점에서 위의 두 가지는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소외론적 방식은 한완상의 민중론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민중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보아야 하며, 이 관계는 정치․경제․문화적 범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중 정치적 관계가 민중구성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안병무, 김용복의 민중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단 한완상의 즉자적 민중과 대자적 민중의 구별은 자신의 민중개념의 비실천성을 극복하려는, 소외론적 민중론의 중요한 관점이지만, 민중신학자들은 이 점에서 대하여는 견해 표명이 불확실하다. 한완상의 소외론적 민중론에 관하여는 그의 책 󰡔민중사회학󰡕 (서울:종로서적, 1984); 한상진, 「‘민중사회학’의 이론 구조와 쟁점」, 󰡔민중의 사회과학적 인식󰡕 (서울:문학과 지성사, 1987), 24~27쪽 참조. [본문으로]
  6. 계급론적 관점에서의 민중 개념화는 2세대 민중신학자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김창락은 민중을 모순론에 의해 규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규정 여하에 따라 단일 계급 혹은 다계급 연합으로 규정할 수 있는 신축적인 원칙을 제시한다(김창락, 「신학함에 있어서 민중의 의미」, 󰡔80년대 한국 민중신학의 전개󰡕 <서울:한국신학연구소,1990>, 129~30쪽 참조). 강원돈은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을 ‘예속성’에 두면서, 주요모순의 외연을 계급동맹체로서의 민중으로, 그리고 그 내포를 기층무산대중으로 설정한다(강원돈,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기독교의 실천전략」, 󰡔신학사상󰡕 58<1987 가을>, 635~36쪽 참조). 이 점에서 그는 박현채의 민중론과 일치한다(박현채, 「민중의 계급적 성격 규정」, 󰡔한국사회의 계급 연구󰡕 <서울:한울,1985> 참조). [본문으로]
  7. 변혁주체에 관한 구성론적 논의 우위의 관점이 갖는 문제점에 대하여는 김동춘, 「남한사회변혁론 연구의 제문제」, 󰡔경제와 사회󰡕 6(1990 여름), 40~46쪽 참조. 한편 한완상은 1980년대 한국 사회학의 계급환원론적 경향성이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추상적인 메타이론으로 전락함으로써 ‘적합성’의 위기를 초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는 한완상, 「90년대 한국사회학의 진로―‘전통’과 ‘정통’의 비적합성을 지양하며」, 󰡔한국 현실, 한국 사회학󰡕 (서울: 범우사, 1992)를 보라. [본문으로]
  8. 안 교수가 ‘오클로스’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처음 거론한 것은 아마도 1975년 김찬국, 김동길, 두 교수의 출소를 기념하는 3.1절 기념예배에서 행한 그의 설교에서였을 것이다(「민족, 민중, 교회」, 󰡔기독교사상󰡕 <1975.4>). 하지만 오클로스론에 함축된 그의 인식의 계기는 1971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이었다(안병무,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980년대 한국 민중신학의 전개󰡕, 25~6쪽). 한편 안 교수의 오클로스론의 완성은 1984년 10월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주최로 열린 「한국기독교 100년 기념 신학자 대회」에서의 발제논문인 「예수사건의 전승모체」(󰡔1980년대 한국 민중신학의 전개󰡕에 수록)에서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9. οχλοs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174회 나오는데, 이 가운데 요한묵시록 4회, 사도행전 22회를 제외하면 모두 복음서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는 R. Morgenthaler, Statistik des Neutestamentlichen Wortschatzes (Zürich: Gotthelf-Verlag, 1982), 127쪽 참조. [본문으로]
  10. Meyer, “οχλοs”, TDNT V, 586쪽 [본문으로]
  11. 7,6; 14,2. 한편 어떤 사본들(A, D, L, W, Θ, Ψ, f1.13, m, syh 등)에서는 11장 32절에서도 나오지만 이는 모두 5세기 이후의 사본들로, 이독임이 분명하다. 다가와 겐조(田川建三), 김명식 옮김, 󰡔원시그리스도교 연구󰡕 (서울:사계절, 1983), 119쪽 참조. [본문으로]
  12. 반면 라오스는 「로마서」에서 8회, 「고린도전서」에서 2회, 「고린도후서」에서 1회, 「필립비서」에서 12회 나온다. [본문으로]
  13. LXX에서 라오스는 1,350회 정도 등장하는 반면, 오클로스는 50회 정도 등장한다. [본문으로]
  14. 「마르코복음」의 의도적인 ‘오클로스’ 사용의 근거를 잘 정리한 글로는 송창정,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연구」, 한신대학 신학대학원 1990년도 석사학위논문, 19~20쪽 참조. [본문으로]
  15. 주 11) 참조. [본문으로]
  16. 같은 책, 119~24쪽 참조. 이러한 설명에는 제자들이 특권층이라는 전제가 있다. 이 점은 안병무 교수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단 안 교수는 특권적 존재로서의 제자상을 (마르코공동체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공동체에로 소급시킨다. [본문으로]
  17. 이점에서 안병무도 같은 입장을 피력한다. 안병무, 「예수와 오클로스」, 󰡔민중과 한국신학󰡕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9). 이것은 본래 「예수와 민중―마가복음을 중심으로」이라는 제목으로 󰡔현존󰡕 106(1979.11)에 실린 것이다. [본문으로]
  18. 위의 주 8)을 보라. [본문으로]
  19. 위의 주 8)을 보라. [본문으로]
  20. 「전달자와 해석자」, 󰡔현존󰡕 101(1979.5) [본문으로]
  21.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 󰡔현존󰡕 108(1980.1~2) [본문으로]
  22. 그런데 서구 그리스도교에 와서 민중 언어에서 유래한 성서의 예수 이야기는 민중을 이반한 언어, 지배층의 언어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서구에서 신학을 공부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지배층의 언어로 성서를 읽어왔다. 그러므로 안 교수는 성서를 바로 읽기 위해서는 민중과의 더불어 삶을 통해서 민중언어를 습득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본문으로]
  23. 󰡔민중과 한국신학󰡕, 151~84쪽. 이 글은 원래 「민중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신학사상󰡕 34(1981 가을)에 실렸던 것이다. [본문으로]
  24. 그에게 있어서 ‘이야기체’라는 형식은 양식사학의 아포프테그마(Apophtegma)와 대응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 양자는 모두 ‘사건(=상황묘사) +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포프테그마는 사건을 이차적인 것으로, 단지 말씀을 담아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케뤼그마 우월주의’를 반영하는 개념인데 반해, 안 교수의 ‘이야기’는 이를 역전시킨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건이 있었다”는 그의 말은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이야기’ 개념에 대한 이러한 전술적 적용은 서남동(「민담의 신학-반(反)신학」,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한길사, 1983>)과 김창락(「이야기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 󰡔신학사상󰡕 64<1989 봄>)에게서도 나타난다. [본문으로]
  25. 김창락은 이것을 보다 체계화하여 예수전승으로서의 「마르코복음」의 이야기성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이야기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의 학문적 기초를 놓으려 한다(김창락, 같은 논문 참조). 그는 이야기를 사건의 언어적 재현으로 보면서, 「마르코복음」 자체는 이런 이야기들로 구성․편집되었음을 입증해낸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이야기’의 전승과 구연에 관한 사회인류학적 논의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충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컬리(R.C. Cully)의 구전 전승에 관한 인류학적 문제제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An Approach to the Problem of Oral Tradition”, VT 13<1963>). 또한 롱(B.O. Long)은, 아프리카의 구전 전승을 현지조사방법에 입각하여 연구한 피네간(R. Finnegan)에 영향을 받으면서 󰡔구약성서󰡕의 구전전승을 비교사회인류학적(Cross-Socio-Anthropology)으로 연구하여 고전적인 양식비평을 재고케 하였다(“Recent Field Studies in Oral Literature and their Bearing on OT Criticism”, VT 26<1976>). [본문으로]
  26. 유언비어를 다루는 학자들은 아직 이에 관한 통일된 견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유언비어가 ‘비공식적 대중매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루머<비공식적 대중매체>에 관한 연구」, 󰡔정신문화연구󰡕 <1986 봄>). 요컨대 유언비어는 (구전을 포함한) 비공식적인 매체를 통해 대중이 공유하게 되는 정보의 ‘전달 방식’이다. 유언비어에 관한 다양한 견해에 대하여는 원우현 엮음, 󰡔유언비어론󰡕 (서울:청람논단, 1982)을 참조하라. 한편 ‘유언비어’를 성서 전승 연구에 도입할 것을 제안한 선구적인 글로는 Ernest L. Abel, “The Psychology of Memory and Rumor Transmission and Their Bearing on Theories of Oral Transmission in Early Charistianity”, JR 51(1971)을 보라. [본문으로]
  27. 앞의 주 8) 참조. [본문으로]
  28. 여기에 동원된 유언비어 일반론은 이상희의 「유언비어의 생태학」, 원우현 엮음, 󰡔유언비어론󰡕 (서울:청람논단, 1982)의 논의에 의존한다. 이상희는 억압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민중의 유언비어에 초점을 두고 유언비어의 특성을 정리한다. 한편 대중매체가 극단적으로 발달하고, 지배블럭의 대중매체 조작이 다양하게 (상당히 성공적으로) 시도되는 현대사회에서 유언비어는 보다 다원적인 계층성과 당파성을 가질 수 있다. [본문으로]
  29. 이것을 우리는 ‘예수의 오클로스 사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본문으로]
  30. 안병무,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현존󰡕 71(1976), 9쪽. [본문으로]
  31. 안병무,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9), 133~34쪽 [본문으로]
  32. 같은 글, 133쪽 [본문으로]
  33. 같은 글, 138쪽 [본문으로]
  34. 안 교수는 서구신학자들은 예수를 ‘인격’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의 실천을 물을 때 개인의 ‘인격’에 대한 물음에서 ‘더불어 일으킨 사건’에 대한 물음으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이것은 예수사건의 동역자인 민중을 물을 때도 개개인의 인격을 묻지 말고 예수와 더불어 일으킨 사건을 물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교수의 민중론에 대한 비판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점을 배제한 채 민중의 메시아성을 비판한다. 김지철, 「민중신학의 성서 읽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 󰡔신학사상󰡕70(1990 여름)과 「예수의 민중성―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 󰡔장신논단󰡕6(1990) 및 성종현, 「예수와 오클로스」, 󰡔신약총론󰡕 (장신대출판부,1990) 참조. 이 두 학자는 민중신학의 성서 읽기의 비과학성에 대한 많은 가치 있는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 교수의 민중론을 비판하는데 있어 징후적 독해를 했어야 했다. [본문으로]
  35. 「예수와 오클로스」, 103쪽. [본문으로]
  36. 󰡔민중신학 이야기󰡕, 199~202쪽. [본문으로]
  37. 안병무, 「하늘도 땅도 공이다」, 󰡔신학사상󰡕 53(1986 여름); 󰡔민중신학이야기󰡕,202~18쪽. [본문으로]
  38. 안 교수는 예수 시대에는 ‘정결법’이 이러한 기능을 했다고 본다. 안병무, 「예루살렘 성정체제와 예수의 대결」, 󰡔1980년대 한국 민중신학의 전개󰡕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0), 376쪽 참조. 그런데 ‘배제의 논리’로서 실제의 ‘정-부정의 체계’는 안 교수의 정결법을 넘어 확장되어 적용될 수 있다. 벨로(F. Belo)는 고대이스라엘의 상징체계를 오염(pollution)의 체계(P 계열의 문서)와 부채(debt)의 체계(E와 D계열의 문서)로 나누어서 이것이 생산․재생산되는 과정으로 이데올로기적 층위(instance)가 정치․경제적 층위와 절합(articulation)되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해석한다. F. Belo, Matthew J. O'Connell (tr.E), A Materialist Reading of the Gospel of Mark (Maryknoll, NY.:ORBIS BOOK, 1981), 37~59. 벨로의 이러한 시도의 자료적 배경은 주로 예레미아스(J. Jeremias)의 책인데(󰡔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8>), 이 책은 광대한 자료의 단순한 나열로 정-부정의 사회구조를 묘사한다. 다만 정-부정의 논리가 사회적 가능성과 제약성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해 줄 수 있다. 말리나(Bruce J. Malina)는 인류학적 연구 성과를 방법론적으로 도입하여 정-부정의 사회체계를 보다 체계화된 문화이론으로 설명한다. 그의 책 The New Testament World―insights from cultural anthrogoly (Atlanta:John Knox Press, 1981) 참조. 한편 이러한 ‘죄의 체계’는 그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논리를 거역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체제의 소외자들이 죄인이 아니라 이 체제의 중심부 구성원들인 죄인인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 전도가 일어난다. [본문으로]
  39. 사회구조가 인간의 행위유형을 결정한다는 이러한 관점은 구조가 구조를 낳는다는 식의 논리와 연결된다. 안 교수가 ‘구조악’을 사탄으로 상징되는 은유어의 사회학적 실체로 본다는 사실은 그가 이와 같이 구조를 존재론적 실체로 보고 있다는 것과 관련된다. 이런 논리는 그가 구조악의 변혁주체로서의 민중을 존재론적 실체로 규정하는 것에로 이어진다. [본문으로]
  40. 「마가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84쪽. [본문으로]
  41. 여기에는 프로레타리아트 중심의 변혁론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변혁론에 대한 그의 비판이 전제되어 있다. 아마도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변혁론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대자의 살해 및 숙청 등의 관행을 목도한 어린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서 이해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
  42. 안병무,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갈릴래아의 예수―예수의 민중운동󰡕 (천안:한국신학연구소, 1990), 202~219쪽 참조. [본문으로]
  43. 안병무의 책 󰡔민중신학 이야기󰡕의 첫째 장인 「민중을 발견하기까지」를 보라. [본문으로]
  44.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전개󰡕 참조. [본문으로]
  45. 안 교수는 민중언어인 ‘이야기’를 신학의 주요 소재로 다루다가 신학 형식에까지 도입한 것은 ‘민중의 신학화’뿐 아니라 ‘신학의 민중화’를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가가 어떠하든 간에) 󰡔민중신학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다. [본문으로]
  46. 서남동은 이것을 “나락의 한(恨)과의 완전한 일치”라고 말한다. 예컨대 장일담의 민중해방 실천은 소위 인륜상실자들의 소굴에 들어가서 그들과 마음과 삶을 일치하는 겸험을 밑바탕으로 한다. 이에 대하여는 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 󰡔민중신학의 탐구󰡕, 79쪽 참조. [본문으로]
  47. 안 교수는 이와 관련해서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변혁 프로그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하여는 「예수와 오클로스」, 103쪽 참조. [본문으로]
  48. 예컨대 ‘민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고 지식인은 자신의 소위 먹물 근성을 씻어버리라’는 식의 품성론. [본문으로]
  49. 조희연․김동춘, 「80년대 비판적 사회이론의 전개와 ‘민족․민중사회학’」, 25~26쪽 참조. [본문으로]
  50. 임영일은 198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한 특징으로 ‘노동계급’의 실질적 변혁주체로의 대두를 든다. 그에 의하면 1980년대에는 도시빈민이나 노동여건이 보다 열악한 중소기업 등의 저연령 여성노동자에서 대기업의 20대 후반~30대의 남성노동자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한다. 임영일, 「한국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성장」, 󰡔신학사상󰡕 64(1989 봄) 참조. [본문으로]
  51. 한국기독청년협의회(최형묵), 「민중신학의 발전적 계승과 전망」, 󰡔해방의 그날까지󰡕 (1986.4); 한국기독학생총연맹, 「현 단계 기독교 운동의 모색」, 󰡔민주장정󰡕 (1986.6) 참조. [본문으로]
  52. 최근 안 교수는 「마태오복음」 연구에서 민중의 실천윤리를 강조한 바 있다. 어쩌면 이러한 그의 새로운 착상은 1980년대 이후의 민중운동에 따른 민중적 실천론의 인식 전환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안병무,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신학사상󰡕 78(1992 가을) 참조. 그는 여기에서 ‘의’(義, δικαιοσυνη)와 같은 민족적 개념이 마태오의 민중적 성격과 결합하고 있음을 논증한다. [본문으로]
  53. 안 교수와 다가와가 발견해낸 오클로스의 사회적 특성이란 ‘타율적 무소속성의 존재’라는 사실뿐이다. [본문으로]
  54. 안 교수가 마르코의 용법에서 역사적 예수가 주도한 운동을 추론해내는 방법론적 방식은 ①예수운동의 전승 주체가 오클로스이고, ②전승 형태가 이야기체이며, ③전승 방식이 유언비어라는 것을 통해서 이다. ①이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문제라면, ②와 ③은 문학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앞에서 인류학의 연구 성과에 힘입은 구전문학 연구의 발전을 통해 문학적인 문제가 해명될 수 있음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역사적 정보는 좀더 보완되어야 한다. [본문으로]
  55. B. Long, 앞의 논문, 쪽. [본문으로]
  56. 이러한 다원성은 전승의 변형을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본문으로]
  57. G. 타이쎈, 「사회학적 문제에 대한 연구사적 고찰」, 󰡔원시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22쪽. [본문으로]
  58. 켈버(W. Kelber)에 따르면, 로마이어(E. Lohmeyer, Galiläa und Jerusalem ) 가 그 선구자이며, 라이트푸트(R.H. Rightfood, Locality and Doctrine in the Gospel ), 막쎈(W. Marxen, Mark in the Evangelist ), 그리고 자신이 그 계보를 잇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마르코복음서의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용법이 대립적이며, 이 대립적 용법에서 마르코공동체의 역사를 추론해낼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하여는 W. Kelber, The Kingdom in Mark (Philadelphia: Fortress, 1974)를 보라. [본문으로]
  59. 역사적 예수연구사에서 자유주의적 연구경향의 종지부를 찍은 학자인 슈미트(K.L. Schmidt)는 마르코복음서의 지리적, 연대기적 언급들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였다(Der Rahmen der Geschichte Jesu ). [본문으로]
  60. 「복음서들에 나타난 지방색 연구」, 󰡔신학사상󰡕 66(1989 가을) 참조. [본문으로]
  61. 예수운동의 네 단계 국면과 마르코복음서의 지리상 구성에 관하여는 나의 글 「예수운동의 전개」, 󰡔함께 읽는 신약성서󰡕 (천안:한국신학연구소, 1992) 참조. [본문으로]
  62. 호숫가에 ‘ ’이 붙은 것을 주의하라. 여기서 ‘호숫가’는 갈릴래아 호수를 말하는데, 호수 주변 일반이 아니라 호수의 비도시지역으로 한촌 지역을 의미한다. 즉 치안의 공백지대를 뜻한다. [본문으로]
  63. 마르코복음서에서 예수운동의 대중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①주어의 명시 없이 동사의 복수3인칭 형태, ②πολυs(60회), ③οχλοs(37회). 이 가운데 앞의 두 경우는 마르코의 지리적 구성과는 무관하게 사용된 반면, 오클로스는 이 구성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는 김진호, 「지지자들을 통해서 본 예수운동 연구―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990년도 한신대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96~98. [본문으로]
  64. 이 도표는 나의 글 「예수운동의 참여자들―그들의 사회적 성격과 예수운동에서의 역할」, 󰡔함께 는 신약성서󰡕에 실린 것을 옮겨놓은 것이다. [본문으로]
  65. 이것의 역사성에 대하여는 나의 석사학위 논문과 󰡔함께 는 신약성서󰡕에 실린 나의 두 글 「예수운동의 전개」와 「예수운동의 지지자들」을 보라. [본문으로]
  66. W. Schrage, “συναγογη”, TDNT 7, 810~813. [본문으로]
  67. L. Sonne, "Synagogue", IDB 4, 478~80. [본문으로]
  68. 같은 논문, 491. [본문으로]
  69. E. 울프, 󰡔농민󰡕 (서울:청년사,1978), 25이하.; 원시국가의 진화에 관하여는 그 진화의 주된 동기를 통합에 강조점을 두는 입장과 전자에 강조점을 두는 입장이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엘만 서비스, 󰡔원시시대의 사회조직󰡕 (서울:삼지원,1986)이 있으며, 후자의 대표적 저서는 M. Fried, The Evlution of Political Society (NY:Random House, 1967)이 있다. 최근 후자의 입장에서 이 두 가설의 종합이론을 강조하는 주목할만한 학자인 조나단 하스의 󰡔원시국가의 진화󰡕 대우학술번역 총서 20, (서울:민음사, 1989)를 참조하라. 한편 요나단 하스의 진화론적 원시국가 형성론을 초기 이스라엘의 국가형성에 적용한 책으로는 F. Frick, The Formation of the State in Ancient Israel (Decatur,GA: Almond,1985)이 있다. [본문으로]
  70. 레드클리프 브라운은 친족체계의 규범과 제도의 유기적인 연관을 밝혀냈다(김용환 옮김, 󰡔원시사회의 구조와 기능󰡕 <서울:종로서적,1986>). 이러한 그의 연구의 관점은 사회통합의 관점에서만 추구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인 보수주의가 개재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인류학자인 울프는 지배와 예속의 위계적 관계를 전제하면서 규범과 제도의 구조적 연관을 밝힌다(앞의책 참조). [본문으로]
  71. 말리나(B.J. Malina)는 고대농경사회의 보편적 규범 원리인 ‘정-부정의 체계’를 예수시대 팔레스틴에 적용하는 탁월한 책을 저술했다. 그의 책 The New Testament World―Insights from Cultural Anthropology (Atlanta:John Knox Press, 1981)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72. 벨로(F. Belo)와 안병무 교수는 바로 이점을 간과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이 1세기 팔레스틴 사회의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적 제층위의 모순이 중첩곳으로 봤다. F. Belo, Matthew J. O'Connel(Eng. tr. from the French), Materalist Reading of Gospel of Mark (NY:Orbis Book, 1981); 안병무, 「예수와 성전체제와의 대결―마르코복음 11장 15~18절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58(1987) 참조. [본문으로]
  73. 산헤드린 지배체제에 관하여는 S. Safrai, “Jewish Self-government”, CRINT 1, 377~419 참조. [본문으로]
  74. 마르크스주의의 고전테제인 지배이데올로기론은 성립되지 않음을 논증하고 있는 김성건의 논문 「종교사회학과 이데올로기 이론의 만남―맑스와 베버 이후의 시도들」, 󰡔사회학연구󰡕 6<1990>) 참조. 그러나 유팔무 교수는 청년기 마르크스의 저작인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래한 ‘지배이데올로기’에 관한 고전적 개념에 대한 김성건 교수의 비판에 공감하면서도, 만하임(K. Mannheim)의 제기한 이데올로기론의 확대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지배이데올로기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구분하고 고전적 ‘지배이데올로기’를 제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사회통합의 이데올로기적 메카니즘으로 존재했음을 지적한다. 유팔무, 「이데올로기 분석과 비판의 방법론」, 󰡔경제와 사회󰡕 10(1991 여름) 참조. [본문으로]
  75. 무리한 비교일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의 지방관료조직은 고려시대까지도 확립되지 못하였다. [본문으로]
  76. 식민지 팔레스틴의 일반성과 특수성에 관하여는 「식민지 팔레스틴의 사회구조와 민중의 항쟁」,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함께 보는 민중신학 4 (서울:나단, 1992) 참조. [본문으로]
  77. M. Hengel, Judaism and Hellenism (Philadelphia:Fortress Press, 1974), 39~47 참조. [본문으로]
  78. 이는 프톨레미 제국 시대의 문서인 제논 파피루스를 통해서 시사된다. 제논 파피루스에 관하여는 P.Schäfer, "The Hellenistic and Maccabean Preiods", IJH, 572~73 참조. [본문으로]
  79. J. 예레미아스는 바리사이가 도시와 농촌의 소자산가들로 구성되었음을 밝혀냈다(󰡔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한국신학연구소,1988>, 330.339). [본문으로]
  80. 하스몬 왕국 시절에 일어난 민중저항투쟁은 바리사이들이 주도하여 전개된다. 이러나 헤로데 대왕 시절 바리사이의 일부 엘리뜨들이 산헤드린에 편입되는 것을 계기로 바리사이의 주류는 체제권 내로 편입된다. [본문으로]
  81. G. 타이쎈,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원시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참조. 또한 그는 당시 사회를 사회적 아노미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사회학적 문제에 대한 연구사적 고찰󰡕, 같은 책 참조). [본문으로]
  82. R.A. 홀슬리는 E.J. 홉스보움(󰡔의적의 사회사󰡕 <서울:한길,1982> 참조)의 연구를 1세기 팔레스틴에 적용하여, 사회적 강도떼(social banditary)는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민중의 비의식화된 저항조직이라고 본다(「고대 유다의 도적떼와 반로마 항쟁」,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서울:한국신학연구소,1990>). [본문으로]
  83.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제4단계에서도 오클로스가 주된 대중이었다. [본문으로]
  84. 김진호, 「예수운동의 혁명성 문제―지지자들을 통해서 본 예수운동 연구(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서울:나단,1992)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