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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크리스마스의 예수에 관한 민중적 기억을 찾아 - 리차드 A. 호슬리,

이 글은 [당대비평] 9권 2호 (2001)에 실린 서평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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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예수에 관한 민중적 기억을 찾아

리차드 A. 호슬리, 크리스마스의 해방(다산글방, 2000)

 

 

  



자본주의의 축적 전략에서 시간의 중요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런 평가는 생산 뿐 아니라, 소비의 맥락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소비공간으로서의 시간의 위력을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무대는 바로 크리스마스 절기 때이다. 호슬리가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미국에서 연간 소비되는 재화의 약 40%가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에 팔린다고 한다.[각주:1] 여기에 영화, TV 프로그램 등 비물질적인 문화적 재화의 높은 상업성을 염두에 둔다면, 자본의 왕성한 식욕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자본에게 선사된 신의 축복의 날임에 분명하다. 그만큼 크리스마스는 전세계적인 소비의 욕구를 최고조로 진작시키는 친자본적인 시간 장치가 되었다.

호슬리의 책 크리스마스의 해방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가 어째서 자본가의 탐욕스런 얼굴로 재현되었는가? 세계의 다른 한편에서는 빈곤의 현실이 대중을 향해 더욱 혹독한 저주의 재를 뿌리고 있는데, 어째서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의 무대는 지나친 풍요와 과도한 소비의 날개로 뒤덮여 있는가? 이러한 문제인식 아래서, 신학자로서 호슬리는 그리스도교의 예수 이해 과정에 주목한다. 특히 성서 전문가로서 그의 관점은 그리스도교의 예수 탄생 담론의 해석사를 문제시하고 있다.

근대적 사유가 출현한 이래, 신학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의 하나는 합리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사유의 침공으로부터 어떻게 신학을 방어하고 변증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성서학이 취한 대표적인 방어 전술은 전략적 후퇴영역분리로 약술할 수 있다. 전자가 방어 가능한 지점까지 후퇴해서, 그곳에 진지를 구축함으로써 합리주의적 사유와 동일한 무기로 일전을 벌이는 전략이라면, 영역분리는 도무지 근대적 사유로 재구성할 수 없을 경우, 성속의 분할을 기정사실화하여, 합리주의의 공격을 빗겨가는 전략을 말한다. 실존 인물 예수의 재현에 관한 역사비평학적 연구에서 모든 설화적 요소들을 제거하고(역사적 연관성을 찾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 역사적 확실성(authenticity)의 인증이 비교적 용이한 예수의 말에만 주목하는 것은 전자에 속한다. [각주:2]이러한 텍스트에 대한 문헌비평적 연구의 정교함은 어느 학문 영역보다 결코 모자라지 않을 만큼 정평이 나 있다. 한편 예수 탄생 설화같은 것은 일찍부터 신화로 규정되면서 그 역사적 가치를 폐기당했다. 그리고 대신 이 텍스트는 신학계에서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의미로서 전유되었다.

1980년대 말경, 대학원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예수 탄생설화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발견한 사실에 하나는, 놀랍게도 이 방면에 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었다물론 그것은 역사적 연구 대상으로서의 위상을 박탈당한 텍스트들의 일반적인 운명이었지만. 레이먼드 브라운(Raymond E. Brown)메시아 탄생[각주:3]만이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6백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에서 그는 구약정경, 구약과 신약의 외경과 위경 텍스트들, 그리고 그밖의 많은 동시대의 유다교 문헌들 속에서 메시아 사상에 관한 논의들을 마태오와 루가복음서의 메시아 탄생 설화와 연관짓고, 또 그 차이를 조명하고 있다. 이후 이 주제를 다루는 어떤 연구도 이 책을 참조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기념비적인 저술로서 평가받게 된다. 한데 민중신학을 하는 우리의 안타까움은, 비교 대상 텍스트간의 메시아 사상만을 조명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수 텍스트가 예수 메시아 운동의 문헌적 산물임이 분명한데도, 사상만이 고려될 뿐, 하나의 사회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는 이 책에서 비교자료로 활용된 다양한 문헌적 텍스트들과 동시대 사회운동들간의 연관성에 대해 거의 어떤 관심도 기울이고 있지 않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심지어는 마태오와 루가복음서를 다룰 때조차도 마치 사건이 없는 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각주:4]

그 몇 년 후(1990년대 중반경) 누군가의 소개로 메시아[각주:5]라는 책을 구하게 되었다. 1987년에 조직된 제1프린스톤 심포지엄의 메시아 연구들을 묶은 6백 쪽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에는 무려 25명의 메시아 사상에 관한 유명한 연구자들의 논문이 들어 있어, 최근의 예수 연구사에 관한 책을 쓰고 있던 당시 내게는 더 없이 좋은 안내서였다.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 책으로 내가 얻은 보람이란, 브라운 식의 메시아 연구는 단지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고, 현대의 많은 연구자들에게서 유다 메시아 사상에 대한 입장이 얼마나 제각각인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브라운보다 더 많은 문헌들을 참조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브라운 이후 십여 년간 축적된 연구 성과를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처럼 여겨질 뿐, 여기서도 설화적 텍스트에 대한 시각은 브라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단지 심포지엄 참여자 가운데 호슬리만이 대중운동과 연관된 메시아주의의 흔적을 찾아보려 애쓰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학생 때 성서학 학술 저널들을 훑다가 우연히 호슬리의 크리스마스의 해방의 서평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은 마친 오래 기다렸던 연인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25천 원이 수입의 전부였던 당시, 유학 중이던 친구를 통해 19천 원이나 되는 책을 구입한다는 건, 휴유증을 고려할 때,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당시(1988년경) 그의 글들을 묶어 책[각주:6]을 만들려고 번역하던 한 동료에 의하면, 그때 호슬리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고 할 정도니,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아직 한국 학계에는 아주 생소한 학자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미국행 여행비자조차 거절당한 내가, 아직 그의 학술적 이력이나 연구자로서의 위치를 채 알기도 전에, 그에게 주목했던 것은 그가 예수를 동시대 민중운동과 연계시켜 다루려 했던 몇 안 되는 학자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종교사회학 연구자였던 탓인지 그의 연구 방법은, 당시의 내 눈으로도, 성서학과 역사학과 사회학 등이 어우러진 새로운 시도로 여겨졌기에, 예수 연구의 역사학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하나의 돌파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역시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의 해방, 이 분야 최고의 저작으로 공인되다시피 한 브라운의 책과 비교한다면, 후자가 기존의 관점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 일종의 연구의 집대성과 같은 성격의 책이라면, 호슬리의 것은 방법론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이고, 주장 또한 기성의 학설을 크게 뒤집는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 혁신적 저서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빈약한 근거에 기반한 모험적 시도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 책의 시도는 너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책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예수 탄생설화를 대중적 민중운동의 텍스트로서 읽으려 한데 있다. 앞서도 시사했지만, 성서 연구사에서, 성서의 설화 가운데 신화로 분류된 텍스트는 역사적 개연성이 전혀 없다는 전제를 은연중에 깔고 있다. 하지만, 호슬리는 현대 민속지학의 장르론을 소개하면서, 설화의 세 요소(신화전설민담) 중 신화와 전설은 사람들에게 사실로서 여겨지는 이야기라는 점을 주지시킨다.[각주:7] 더욱이 세계의 영웅 이야기를 비교 연구한 민속지 학자들의 연구를 참조하면서, 그는 예수 탄생 설화가 신화라기보다는 전설에 더욱 가깝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것은 신화보다 좀더 역사적 연관성이 많은 이야기라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 탄생설화의 허구적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동시대 대중의 예수에 대한 이해가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어 있으며, 따라서 텍스트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뜻한다. 하지만 그는 설화의 장르론에서 더 이상의 역사적 암시를 읽으려 하지는 않는다. 단지 신화 혹은 전설이라는 것이 역사적 연구의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1보론참조). 그의 역사적 접근은 텍스트 내용의 세세한 부분까지를 정교하게 비평하는 데서 나타나며, 그 안에서 대중의 염원과 대중적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읽음으로써 그의 역사학적 연구 결과가 도출된다.

이것이 이 책의 2/3를 이루는, ‘유아기 설화의 역사적 맥락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진 제1부와 2부의 내용이다. 1부의 두 장은 지배자들, 그리고 제2부의 세 장은 대중을 다룬다. 제목에서도 암시되듯이 그 내용들은 탄생설화가 역사적 맥락을 담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지배자들을 다루는 장들에서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지배자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졌는지를 말하고 있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텍스트의 내용 속에 역사적 맥락이 담겨 있다는 주장이, 실제로 동시대 지배자들인 유다의 통치자 헤로데, 혹은 대사제들, 심지어 로마의 황제까지도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지배권력이 예수의 탄생 소식에 접하자 놀라고 두려워 허둥댔다는 대중의 믿음이 탄생 설화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이 텍스트 속에서 우리는 탄생 설화를 구술하는 대중의 예수 이해의 정치적 지향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제2부는 탄생 설화 속에서 동시대 대중의 억압 상황과 염원을 찾아내려 한다. 그리고 그 속에도 역시, 설화 구술자들의 예수운동적 주장과 전망이 얽혀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거기에는 로마제국과 봉신국 지배자들의 정치사회적 지배구조로 인한 대중의 박탈로부터의, 그리고 가부장제적인 성 억압적 제도와 관념으로부터의 해방 염원이 메시아 탄생 설화의 주된 역사적 맥락임을 주장한다.

호슬리가 로마 제국 지배의 폭력성을 말할 때, 그의 머릿속에는 현대의 미국이 떠오르고 있다. 그는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미국이 자행한 폭력의 구조화와 대중의 해방 염원이, 예수 시대 로마 제국의 팔레스틴 정복과 괴뢰정부에 의한 위임 지배, 그들에 의해 자행되는 과도한 폭력과 착취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대중의 피의 절규 및 메시아 대망과 유비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의 미국은 고대 로마보다 더욱 교묘하고 더욱 파괴적으로, 그리고 더욱 철저한 착취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7).

책의 결론부 격인 제8해방의 이야기해방의 해석학은 앞장에서 시도한 자신의 유비를 해석학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새로운 역사학적 연구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먼저 그는, 왜 근대의 합리주의적 성서학 방법론이 역사학적 논의를 보다 발전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는지를 서구신학의 해석학적 지향을 통해 정리하는 것으로 이 논의를 시작한다. 그의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주장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아메리카 개척기의 성서 해석자들은 예수 탄생 설화를 유럽의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의 이야기로 읽었지만, 인디언을 향한, 그리고 흑인과 여성을 향한 해방의 텍스트로서 읽으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동의의 해석학(hermeneutics of consent)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자신들의 상황을 중심으로 텍스트 읽기를 수행하는 해석 방식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비성찰적 읽기 패턴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들이 속한 사회나 그들의 타자는 그들 자신의 성서 읽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태적 읽기(수평적 차원)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독서자인 그들이 자신의 상황의 그늘 속에서 예수 텍스트에 대한 철저한 역사비평적 분석을 유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서 텍스트의 내용이 독서자인 주체에게 미치는 영향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또한 정태적(수직적 차원)이다. 그리하여 서양(북아메리카) 백인 남성의 읽기 전략이 성서 해석사에 의식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결과가 현대의 성서 연구사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은 결국 철저한 역사적 읽기를 회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호슬리는 역사비평을 더욱 철저히 수행해야 함을 말한다. 그것은 역사비평학이 이른바 거리두기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식으로 읽는 서양의 성서 해석자들로 하여금 자기 중심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한다는 주장이다. 얼핏보면 이것은 역사비평을 철저하게 적용하기만 하면, 예수의 텍스트가 해방적 텍스트로서 재현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가진 낙관주의자의 주장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예수에 대한 역사비평학이 성서를 자기 중심적으로 읽으려는 태도에 대해 해체적인 효과가 있다는, 역사비평학의 정치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역사비평학은 성서 해석사에서 권력의 제도적 발현체로서의 그리스도교 체제에 대한 해체적 차원을 갖는다는 것이다.[각주:8]

아무튼 그는 이러한 읽기를 통해 오늘날의 세계를 읽는 새로운 관점이 획득될 수 있다고 본다. 그가 동태적 유비(dynamic analogy)라고 부르는 개념은 바로 이것을 말해 준다. , 현대의 미국과 고대 로마를, 소모사 같은 미국의 하수인과 팔레스틴의 헤로데를, 중남미의 고난당하는 대중과 예수 시대 대중의 질곡의 현실을, 그리고 오늘날과 그 당시의 해방적 민중운동을 유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서와 오늘 여기를 유비적으로 엮는 착취와 저항의 시각에서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자본주의적 소비의 축제로부터 크리스마스가 해방되게 한다는 의미의 재구성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인으로부터 타자화된 제3세계 대중의 눈에 의해 조명된 세계가 예수 탄생 설화를 읽는 미국인인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동태적(수평적 차원)이며, 역사비평학을 통해 조명된 고대의 예수 텍스트 속의 민중의 해방적 이야기가 현대인인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동태적 차원(수직적 차원)을 갖는다.

 

20세기 내내 침체되어 있던 예수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가 특히 영미 학계를 중심으로 부흥하는, 커다란 전환기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리 학계에도 여러 연구자들이 그 현상을 소개하고 있고, 대표적인 저서들이 속속 번역 출간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호슬리도 이젠 그리 낯설은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연구 방법이나 주장 등은 거의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가장 급진주의적인 학자의 하나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그가 사회학자로서 사회과학적 이론을 폭넓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이유일 듯싶다.[각주:9]

그는 성서의 예수 텍스트 속에서 예수의 말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읽어내는 혜안을 가졌다. 문제는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무수히 그런 시도를 했음에도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결국 성서학 연구 전통에서 그것을 밝혀낼 만한 이론적 무기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타학문과의 학제간 연구에 귀를 기울였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호슬리는 이 점에서 가장 뚜렷한 성공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예수 연구자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특히 그는 한편으로는 텍스트 내부의, 숨겨진 해방의 수사학들을 찾아내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집합행동에 관한 사회이론들과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예수운동을 대중적 사회운동의 하나로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크리스마스의 해방을 포함한 그의 여러 저술들은 바로 이러한 집요한 탐색을 반영하고 있다. 먼저 예수 동시대의 민중운동들에 대한 면밀한 연구들[각주:10]이 있었고, 예수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로서 잘 알려진 타이쎈(G. Theissen)의 문제작인 예수운동의 사회학[각주:11]의 이론적 보수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갈등론적 사회이론과 예수운동 연구의 만남을 모색하였으며,[각주:12] 크리스마스의 해방에서 탄생설화 속에 반영된 대중적 메시아운동의 흔적을 조명한 후, 대중적 민중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연구서를 출간하는 데 이른다.[각주:13] 또한 최근 그는 고고학을 활용하여, 이전까지 주로 문헌 속에서 대중적 전승을 읽어내려 했던 시도들을 보완하는 새로운 이론적 모색에 들어섰다.[각주:14] 이 모든 저술에서 그의 공통된 관심은 대중적 사회운동으로서 예수운동을 보려는 데 있고, 그 방법적 가능성에 대한 탐색에 모아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저술들이 모두 대단히 도발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동시에 학계의 진지한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해방을 포함하여 위에서 언급한 연구들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점 중의 하나는, 그가 예수 시대의 대중 현실을 점증하는 궁핍화로서 이해하고, 거기에서 해방적 실천의 주된 계기를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각주:15] 우선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어느 한 측면을 과도하게 강조한 결과다. 실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여, 정반대의 주장, 점증하는 풍요로서 동시대 경제적 맥락을 보려는 견해 또한 많은 유력한 연구자들에게서 수용되고 있다.[각주:16] 어쨌든 호슬리와 같은 점증하는 궁핍화론이 내포하는 더 심각한 문제는 예수운동의 문화적 차원을 간과하게 한다. 특히 일상 권력과의 투쟁의 차원이 그의 연구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분명 예수 텍스트는 고난의 수사와 해방의 수사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 아니라는 점을 그는 혼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고난의 심화는 곧바로 대중적 저항의 행위화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고난이 저항의 행위화로 곧바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대중의 집합행동을 다루는 수많은 연구들은 그 사이를 메우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호슬리는 찰머스 존슨(Charles Johnson)의 이론을, 그 기능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채, 활용함으로서 그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한데, 그에게서 대중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벌어지는 상징의 의미화의 차원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가령, 탄생 설화가그것이 신화든 전설이든형성되는 데에는 대중의 구술 행위가 절대적인 요소였다. 어떤 점에서 저자는 단순한 필사자 정도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구술적 영향사는 중요한 것이다. 이때 대중의 구술 행위는 예수에 대한 그들의 집합적 기억의 산물이며, 이것은 예수 텍스트가 예수와 대중간의 상호주관적 소통의 결과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미 호슬리가 말하는 동태적 유비가 의미화 과정에 개입한다. 예수 탄생 설화는 바로 이러한 예수에 대한 대중의 기억과 그것의 창조적 재현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대중의 집합적 기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문화적 상징이라는 그릇인 것이다. 그 속에서 경제적 갈등이 함축되어 있고, 그 속에서 예수라는 메시아의 이미지가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화적 상징체계는 대중의 일상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하여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대중의 기억 속에서 예수 메시아의 탄생 이야기가 문화적 상징 코드의 어떠한 요소를 변형시키려 하고 있는지, 또 어떠한 요소에 기대어 예수를 재현하고 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호슬리의 이 책이 예수 탄생 설화의 역사성에 관한 가장 위대한 저서의 하나이고, 가장 참신한 방식의 대안적 모색의 하나이기도 하며, 또한 그리스도교 담론에 대한 가장 신랄한 문제제기의 하나라고 평하는 데 망설일 생각은 전혀 없다.

  1. 이 글에서 나는 그의 주장을 다룰 때 쪽수 대신 ‘장’을 표기할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번역본을 책이 아닌, 한글 파일로 읽었기 때문에 불가피했음을 밝힌다. [본문으로]
  2. 왜냐면, 19세기까지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학적 연구의 피할 수 없이 명백한 결과의 하나는, 설화적 텍스트의 역사적 재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세기 성서학은 (역사적 물음을 괄호친) 문학적 방법을 개발하는 데 치우쳤고, 역사비평학을 고수할 때조차, ‘사건이 배제된 말’에서만 질문을 계속할 뿐이었다. 결국 역사적 접근은 더욱 빈약해졌고, 그것은 신학적 비평학의 패러다임을 교체하지 않고서는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었다. 그런 점에서, 비록 연구 방법은 부재했으나, 새로운 인식론적 시좌를 가졌던 제3세계 신학들의 ‘역사적 물음’은 서양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그들 중심의 연구사적 전통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20세기 말에 비로소 활발하게 전개된 타학문과의 학제간 연구는 이러한 제3세계로부터의 심각한 도전에 대한 서구 연구자들의 자기 반성적 성찰의 흔적을 담고 있다. [본문으로]
  3. The Birth of the Messiah. A Commentary on the Infancy Narratives in the Matthew and Luke (Doubleday, 1979). [본문으로]
  4. 사실 이것은 브라운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그 당시까지 학계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는 예수 연구서 가운데 예수의 활동을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주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문으로]
  5. James H. Charlesworth (ed.), The Messiah. Developments in Earliest Judaism and Christianity (Fortress, 1992). [본문으로]
  6. 이 책은 《예수시대의 민중운동》(한국신학연구소, 1990)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 엮음집은 호슬리와는 연구 방법이나 견해에 있어서 거의 공통점이 없는 페르디난도 벨로(Fernando Belo)의 글을 마치 총론격되는 위치에 넣어버리는 착오를 범하고 말았다. [본문으로]
  7. 몰론 전설이나 신화는 그 내용이 사실적 구성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내용이 허구적일수록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더욱 확고히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임재해의 《민족설화의 논리와 의식》 (지식산업사, 1992)에 수록된 〈설화의 존재양식과 갈래체계〉 참조. [본문으로]
  8. 이에 대하여는 김진호, 〈‘탈교회적 주체’의 신앙을 향해―‘역사의 예수’ 담론의 정치성〉, 《진보평론》 7 (2001 봄) 참조. [본문으로]
  9. 호슬리의 견해와 그 방법 및 그에 비평적 평가에 관하여는, 나의 책 《예수 역사학》 (다산글방, 2000)의 제11장 〈1세기 팔레스틴 민중운동들의 통시적 연계성―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10. 주6)의 책에 실린 논문들과, John S. Hanson과 함께 집필한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Popular Movements in the Time of Jesus (winston Press, 1985). [본문으로]
  11. G. Theissen, (종로서적, 1981; 독일어 원본은 1978). [본문으로]
  12. 《예수운동. 사회학적 접근》 (한국신학연구소, 1993; 영어 원본은 1989). [본문으로]
  13.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Popular Jewish Resisiance in Roman Palestine (Fortress Press, 1993). [본문으로]
  14. Galilee. History, Politics, People (Trinity Press, 1995)와 Archaeology, History, and Society in Galilee. The Social Context of Jesus the Rabbis (Trinity Press, 1996) [본문으로]
  15. Edward P. Sanders, 〈예수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논쟁〉, 《시대와 민중신학》 3 (1996) 참조. [본문으로]
  16. 이런 견해를 펴는 대표적 연구로는 F.G. Downing, Jesus and the Threat of Freedom (SCM Press, 1987); Burton Mack, A Myth of Innocene (Fortress Press, 1988); Richard Betey, Jesus and the Forgotten City. New Light on Sepphoris and Urban World of Jesus (Eerdman's, 1991) 등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