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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일상적 파시즘과 탈근대적 실천

이 글은 [당대비평] 14(2001 봄)에 실린 글입니다.

임지현 선생의 글에 대해, 지면토론한 글로, 임지현의 발제글과 다른 토론자 4인(김동춘, 김철, 박한무, 고갑희)의 토론문도 [당대비평](2001 봄)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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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파시즘과 탈근대적 실천

 

 

 

 

최근 한국의 지식사회에 일상적 파시즘’, ‘미시권력’, ‘미시파시즘등 일정 정도 유사한 함의의 논점들이 제기되어 비교적 폭넓게 회자되고 있다. 이것은 (근대적) 주체라는 문제설정이 내포하고 있는 자기 중심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역사적 반성을 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혁명적 희망이 분출하던 1980년대를 경유한 한국의 인식론적 지형에서 당대적 성찰로서의 적실성을 갖는다. 다행히도 이 생경한 주제가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현재까지의 이 논의의 커다란 성과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문제의식을 담는 이론적 성찰이 빈약한 우리의 지성사적 지형에서 적지 않은 비생산적인 오해와 대화의 단절이 초래되기도 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상적 파시즘 등의 논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기 준거성을 사유의 중심부로 가져왔다는 데 있다. 그것은 푸코가 말한 바, 구조화된 권력의 그물망속에 자기 자신 또한 얽혀있다는 문제인식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권력이란 하나의 중심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편재된 정치제도적 장치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수없이 많은 삶의 일상적 지점에서 무차별적으로 발생되고 행사되며, 동시에 서로 얽히고설킨 연결망을 이루고 있는 자기 중심적이며 배타적인, 일종의 행위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권력의 작동은, 흔히 생각하듯, 억압적인 형태로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은 주체를 자발적 공모자로 생산해냈으며, 그런 점에서 권력과 주체는 서로 적극적으로 연동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흔히 제기되는 비판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첫째, 일상적 파시즘론 등은, 주로 근대적 의미에서의 해방적 실천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민중운동진영의 정당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나아가, 무수한 지점에서, 심지어는 내면의 태도에까지 파시즘적 칼날을 들이대는 무차별적 비판이란 결국 저항의 지점을 분산 또는 와해시킴으로써 해방적 실천 자체를 무력화시킬 위험이 있다. 둘째, 인식론적으로, 끝없이 계속되는 비판의 논리는, 사실상 규범적 준거를 해체함으로써, 저항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일상적 파시즘론 등은 지적 허무주의의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 셋째, ‘경계 없는비판이 내면의 파시즘을 들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또한 파시스트적 암초에 걸려 있다. 즉 일상적 파시즘론 등은 권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 함의를 갖고 있지만, 그 문제제기 방식 자체가 권력적 언술이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일상적 파시즘론을 제기한 선구자의 한 사람인 임지현 선생을 향해 쏟아진 많은 찬사와 함께, 이곳저곳에서 날아든 파상적인 비난들은, 비록 대개는 부적절한 독해와 근거가 빈약한 주장들로 점철되었지만, 그 근저에는 위와 같은 혐의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위의 세 가지로 약술한 비판점들이 꼭 적절한 것이었다고 보지는 않지만, 임지현 선생의 주장 자체가 그런 비난으로부터 결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세 번째 비판은, 지난해 1222일에 열렸던 당대비평이 주최한 일상적 파시즘 토론회에서도 거의 모든 지정토론자들에게서 제기되었다. 물론 임지현 선생 자신도 그런 논리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임 선생 자신이 발제글에서 고백했듯, 일상적 파시즘론을 탈근대적 맥락에서 사유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나의 관점을 먼저 말하는 게 좋겠다. 나는 탈근대를 근대의 시간적 이후라는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근대성에 내재된 근대에 대한 비판을 극단화하는 태도와 관련시키는 입장에 동의한다. 요컨대, 탈근대는 근대 이후에 오는 다른 인식론적 시대의 범주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근대가 존재하지 않는, 사라져버리는 순간, 탈근대적 문제설정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근대가 있으므로 탈근대는 존재하며, 근대가 왕성한 세력으로 자기 구성 원리를 더욱 확고하게 구축하는 한에서 탈근대는 더욱 유의미한 것이 된다. 이런 시각에서 나는 정치사회적 제도로서의 파시즘과 일상적 파시즘의 위치를 통해 서로의 관계를 규정짓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전자가 근대적 문제설정을 전제한 것이라면, 일상적 파시즘론은 탈근대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자가 정치제도적 차원이라면, 후자는 담론적 지평을 갖는다. 그러므로 둘은 일정한 대응관계를 갖지만, 동시에 다른 패러다임에서 사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구조주의는 언어와 무의식과의 연관성을 읽어냄으로써 인간 행위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 도달했다. 탈근대적 문제설정은 이러한 인식론적 성과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상적 파시즘 주장을 탈근대적 맥락에서 본다는 것은, 그러한 권력의 그물망 속에 우리 자신도 불가분 얽혀있다는 것이며, 그것의 극복은 의식적 행위의 선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그러한 선택의 준거로서 제기된 규범적 지식 자체도 파시즘적 욕구와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상적 파시즘론은, ‘파시즘을 비판하는 너희도 파시스트적이다라는 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의 파시스트적 욕구를 발견하는 자기 준거적 문제제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비판에서 말한 바, 이러한 문제제기는 지적 허무주의의 소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김상환 교수의 말대로, 니힐리즘은 탈근대적이라는 문제설정의 결과가 아니라 그 출발점이다. 탈근대적 사상가들은 초월을 기각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초월론(초월의 외재성)을 기각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해체론의 정치성은 근대적 초월론과는 다른 맥락의 자기 초월(내재적 초월)의 시각을 제출하여야 했고, 내가 보기엔 후기 푸코의 자아의 테크널리지를 비롯하여, 유목, 탈주, 표류, 순례 등의 은유적 개념어들의 등장은 이런 맥락을 갖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첫 번째 비판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모색될 수 있다.

탈근대가 근대를 전제하면서도 동시적이라는 것은, 탈근대적 문제설정은 근대의 대체물이 아니라는 함의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탈근대적 실천은 근대적 문제설정에 기반한 해방의 정치학을 대체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유의미한 것이고 동시에, 그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차이의 정치연대의 정치를 결합시키려는 몇몇 이론가들은, ‘차이가 충분히 존중되면서도 동시에 어느 지점에서 차이의 봉합을 고려한다. 여기서 봉합은 연대의 원리에 대한 선험적 원칙을 전제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필연적 논리가 아닌 우발적인 논리에 의해, 차이들간의 해방적 연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대의 정치는 차이간의 평등한 연대를 기축으로 한다 하더라도, 어느 지점에선 탈근대적 도덕(이런 용어가 부적절한지도 모르겠지만, 편이상 이렇게 쓰기로 하겠다)을 유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서 여전히 탈근대적 저항의 지점이 발생한다. 끝없는 해체요 탈주다. 목적지 없는 표류며 순례다. 비판의 비판이며, 비판의 비판의 비판이며, 비판의 비판의 비판의 비판이 요청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일상적 파시즘론의 미덕이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