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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박성준의 (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이란? 민중신학의 한국신학으로의 정립을 위하여)를 읽고

이 글은 박성준의 한국민중신학회 제2차 정기총회 발제원고에 대한 논평으로, 한국민중신학회 회지인(1994.12+1995.1 합본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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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이란?민중신학의 한국신학으로의 정립을 위하여(박성준)를 읽고

 

 

 

 

민중신학은 본질적으로 한국적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민중신학이 한국적신학임을 주장하는 유일한 신학이 아니고, 민중신학에 대한 주된 비판의 하나가 과연 한국적이냐?’라는 것임을 염두에 둘 때, 특히 민중신학의 평가와 전망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전통에 대한 대안적이지 못한 비판이 공론화된 상황에서, 민중신학의 한국적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를 최소한 (실천)이론적 수준에서 점검해 보는 것이 당면한 시기적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박성준의 민중신학회 제2차 정기총회에서의 발제글 민중신학에서의 한국적이란?”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는 아마도 이 글에서 한국적이라는 기표를 둘러싼 무수한 담론(적 실천)들에 일종의 교통정리를 의도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민중신학의 한국적규준을 실천이론적 차원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글에 대한 나의 이러한 평가가 옳다면, 나는 그의 취지에 공감한다. 또한 이제부터 논의할 것이지만, 그가 제안한 규준에서 민중신학의 전망을 위한 중요한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민중신학계에서 그의 논의가 보다 발전적으로 토의되길 기대하며, 그의 규준에 대한 내 나름의 보완을 제시코자 한다. 박성준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우리의 현실의 삶을 한국적을 규정하는 주요한 규준”(16)으로 제안한다. 그에 의하면 이 명제에는 오늘’, ‘한국’, ‘우리라는 시간성’, ‘공간성’, ‘집단성 내지는 공동체성에 대한 이해가 함축되어 있다. 사실 어느덧 우리 사이에는 산업중심주의로 인한 급속한 문화혼합 현상에 대한 일종의 반문화 현상인 복고주의를 한국적인 것의 회복의 관점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시각에는 시간의 단절이라는 비역사적인 폐쇄성을 전제한 관념주의적 발상이 게재되어 있다. ‘오늘이라는 말은 시간의 연속성을 전제한다. ‘오늘과거라는 지평과 미래라는 지평이 만나는 무대다. ‘오늘위에서만 과거는 의미화될 수 있고, ‘오늘을 통해서만 미래는 그 실체성을 획득한다. ‘오늘그 자체는 과거미래의 지평융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실천의 각축장이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한국적의 규준은 시간성으로 해석된 실천이론적 규준이다. 한편 우리는 종종 단절된 공간으로서의 한국을 한국적인 것의 규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 역시 공간의 단절이라는 비사회학적인 폐쇄성을 전제한 관념주의적 발상을 안고 있다. ‘한국(‘여기’)국가적(전국적/일국적)인 콘텍스트뿐 아니라, ‘세계적(global) 콘텍스트와 지역적(regional) 콘텍스트가 응축된 공간, 즉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관계성의 공간’, ‘연속성의 공간이다. 이 관계 설정을 둘러싼 다양한 실천들의 헤게모니적 절합 속에서 한국은 규정된다. 요컨대 한국이라는 한국적의 규준은 공간성으로 해석된 실천이론적 규준이다. 마지막으로, ‘오늘여기라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실천들은 범주화, 집단화된 실천주체를 상정한다.

우리라는 이 실천주체의 집단화, 범주화는 오늘여기라는 시간성과 공간성의 실천적 구성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늘 새롭게 시간성과 공간성을 창조하는 역사의 실천적 주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라는 한국적의 규준은 실천주체의 관점으로 해석된 실천이론의 규준인 것이다. 따라서 박성준의 민중신학의 한국적의 규준은 시간성과 공간성 및 실천주체의 문제를 포괄하는 개념화에 대한 시사일 수 있으며, 단순한 상황신학적 특성을 넘어서 보편적인 해방적 신학(17)으로서의 민중신학적 해석학을 전망케 해 준다. 다만 그가 대문자 M으로 시작되는 민중을 해설하는 부분(21~2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공간적 관계성이 고려되기보다는 국가적(일국적) 단위의 공간적 폐쇄성을 암시한 것은, “우리의 현실의 삶과 그 삶 속에 교직된 전통문화의 맥과 무늬와 결까지를 포함한 총체적 삶으로부터 한국적의 내용과 형식을 귀납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17)시간적 연속성에 대한 통찰과는 대조적으로 아쉬운 점이며 보완되어야 할 점이라 판단된다. 이와 같은 폐쇄적 공간관은 일국적/전국적 변혁이라는 낡은 공간관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활세계와 자연세계(환경)를 포괄하는 변혁의 총체성을 왜곡시킨다. 박성준은 이러한 한국적의 규준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서남동 신학의 수용을 통해 밝힌다. 서양-백인 문화로부터 아시아 문화신학으로의 전위와, 계시의 하부구조를 지니는 신학으로의 전위, 이 두 전위가 바로 한국적의 규준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그는 한 가지를 더 첨가 하는데, ‘저항성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것과 얼핏 균형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이 세번째의 것을 여기서 굳이 언급한 것은, 서남동 신학에서 저항성(아마도 정치적 저항성을 중심으로 하는)을 무장해제시키려는 해석()에 대한 그의 경고가 아닐까? 서남동 신학의 해석에 무지한 나로선 이 논의에 개입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이 문제는 논외로 하고, 앞의 두 가지에 대한 내 소견을 늘어 놓고자 한다. 원칙적으로 나는 이 두 전위에 대해서 동감한다. 하지만 앞에서 제시한 규준의 세 차원의 문제제기(시간성, 공간성, 실천주체)를 보다 발전적으로 풀어 나간다는 관점에서 볼 때, 서남동 신학의 수용 문제도 단순한 지지의 표명을 넘어서 비판적인 재해석이 필요할 듯싶다. 먼저 첫 번째의 것, ‘서양-백인 문화신학으로부터 아시아 문화신학으로의 전위라는 표현에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불완전한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서양-백인 문화신학라는 말은 서양-백인-남성 문화신학이라는 표현과 동의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응하는 아시아 문화신학은 아시아-황인-여성 문화신학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시아-황인아시아-황인-여성으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부장적 문화는 서구적 특성으로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개념에는 성 해방이라는 함의를 살리는 보완이 요청된다. 서양-백인의 대립어를 굳이 아시아로 한정시킬 이유가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경우 반식민주의적인 세계적 연대 문제를 몰각할 여지를 안고 있다. 서양-백인(-남성)아시아(-황인)와 대립시키는 구도에는 단순 지리적 대립의 관점, 즉 서구적 지성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 요컨대 반지성주의로 이해될 소지를 안고 있다. 나의 판단으로는, 이러한 문제는 서양아시아라는 물리적 의미의 단순 지리적 개념화로 빠질 위험성을 위의 표현이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서남동의 서양-백인 문화신학으로부터 아시아 문화신학으로의 전위라는 명제는 식민주의적 신학 담론에서 반()식민주의적인 신학 담론으로의 전위라는 관점에서 보완, 재해석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계시의 하부구조를 지니는 신학으로의 전위에 대해서 보자. 여기서 하부구조라는 말은 민중의 해방운동을 지칭하는 수사어이다(최형묵, 민중신학적 정치경제 윤리의 모색(1), 신학사상 1993 겨울, 172). 그러므로 이 말은 (성서) 계시의 바탕에 깔린 민중의 해방운동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인 듯하다. 그런데 하부구조라는 표현에는 일반적으로 근본구조라는 함의가 깔려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의 두 번째의 전위를 둘러싼 대중적인 오해 내지는 과잉해석의 경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계시가 근본적이냐 하부구조(민중운동)가 근본적이냐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의에서, 양자 모두 실천적 이론화에 역기능을 해 왔다. 따라서 나의 판단으로는 계시의 역사성을 민중당파적으로 해석하는 신학으로의 전위라는 관점으로의 보완,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박성준은 서남동의 이 두 전위를 한국적의 규준과 연관됨을 설명하기 위해 대문자 M의 민중을 논술한다. 가장 한국적인 함의를 갖는다는 대문자 M의 민중은 이 두 전위를 통해 신학적으로 잘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Minjung에 더 성실하고 더 천착할수록 세계의 민중, 보편적 minjung에로 나가는 길은 더 넓어진다(22)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서 세계한국이라는 공간은 질적으로 단절되어 있음이 전제된다. 하지만 양자의 단절의 측면과 연속의 측면은 각기 일부의 현상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단절과 연속을 개념화하는 관계라는 함의가 민중 개념화에 활용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나는 이 글을 맺음하면서 시공간적 관계성과 실천주체의 문제를 포괄하는 민중과 사회구성체의 개념화의 필요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전에 나는 사회구조와 실천주체간의 관계를 고려한 개념화로서 민중을 규정한 적이 있다(역사 주체로서의 민중, 신학사상1993 ). 이 글에서 나는 민중을 특정 사회구성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구조 속에서 이 모순적 구조를 극복하려는 역동적인 형성적 실체이며 하느님나라 운동의 역사적(현실적) 구현태(具顯態)로 규정하였다. 이때 사회구성체의 모순구조를 극복하려는 집합의지 또는 하느님나라를 지향하는 에토스를 민중당파성이라고 하고, 사회구성체의 모순구조를 극복하려는 경향을 변혁적(‘하느님나라 지향적’)이라 정의했다. 민중당파성은 곧 민중형성의 논리라는 것이다. 민중은 하느님나라 운동의 주체로서 민중당파성을 형성논리로 하는 일종의 변혁적인 정치연합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천주체의 개념화에는 사회의 시공간적 구조화의 개념이 미분화된 상태로, 전제만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러한 민중 개념화를 전제할 때, 사회구성체를 시공간적 관계성의 차원에서 규정하는 것은, 그리고 이를 신학적 용어로 풀어쓰는 것은 향후 민중신학의 진정한 한국적 신학을 향한 과제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