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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육체에 새겨진 남성성의 기억을 해체하라

이 글은 [이대대학원신문](2003)에 실린 글입니다.

오래 전에 쓴 글이어서 이런 게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교회 건축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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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에 새겨진 남성성의 기억을 해체하라

 



수잔 제퍼드(Susan Jeffords)하드 바디. 레이건 시대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남성성(Hard bodies: Hollywood masculinity in the Reagan era, 1993/ 한글 번역본 2002)은 남성 육체에 관한 영화의 재현 양식을 통해 한 시대의 욕망의 흐름을 읽어낸다. 람보로 상징되는 근육질 육체, 하드 바디(hard bodies)는 레이건으로 상징되는 강한 국가주의라는 다른 하드 바디와 연동되어, 미국 대중문화와 국가 사이의 특별한 소통의 코드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외부의 적인 소련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부의 소프트 바디(여성, 혹은 일탈자 등)를 향한 압도적 힘의 우위에 기반을 둔 배타성의 정치로서 구체화된다.

이 책은 지난해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개인과 사회 내지는 국가가 육체의 기억을 매개로 서로 연동된다는 문제인식은 우리 사회를 보는 안목을 한층 넓히는 효과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최근 번역 출간된 부르디외(Pierre Bourdieu)남성 지배(La Domination Masculine, 1998/ 한글 번역본 2003)육체의 사회학에 관한 중요한 이론적 성과를 우리에게 소개해준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여성의 다이어트 열풍이 못지않게 남성의 근육질 육체를 향한 열망 또한 거세다. 이러한 남성의 하드 바디에의 강한 욕구는, 미국에서 그랬듯이, ‘상처받은남성성을 공세적으로 복원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한다. 지난해에 번역 출간된 디트리히 슈바니츠(Dietrich Schwanitz)남자: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Männer: Eine Spezies wird besichtigt, 2001 / 한글 번역본 2002)이 주장하고 있듯이, 남성 지배적인 문명은 비남성만이 아니라 남성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상처를 가하는 자해의 장치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러한 일반적인 문명론적 관점을 넘어서,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예속 상황은 가족을 지키는 데 실패한 나약한 아버지들을 양산하였다. 특히 글로벌 자본 체제(global capital system)와 글로벌 웨펀 체제(global weapon system)의 공세가 가속화되는 지구화의 덫에 걸려든 오늘의 한국 사회는 남성성을 전례 없이 훼손시켰다.

여기에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소수자 담론들에 의해, 남성 지배를 정당화해온 전통적인 기재들, 부르디외에 따르면 학교, 교회, 가족, 심지어 육체를 통한 기억의 메커니즘이 적나라하게 해부되면서, 그리고 부성(父性)을 향한 소수자 운동들의 강력한 법률적 규범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면서, 전통적인 남성다움은 자랑스런 존재의 기억이 아니라 마초적인불온성의 흔적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소비자본주의의 발흥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즉 소비의 주된 대상이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이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마초성은 격하의 대상이 된 것이다. 자본은 이제 소수자를 동원하여 체제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사회 통합의 장치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기든스(A. Giddens)친밀성의 구조변동: 현대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The Transformation of Intimacy. Sexuality, Love, and Eroticism in Modern Societies, 1992/ 한글 번역본 2001)에서 자본주의적 제도의 급진화 과정이 마초적 남성성의 격하와 여성적 친밀성의 강화로 특징짓는 구조 변동에 관여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성 육체의 '하드 바디'적 성격은 성적 매력을 부각시킴으로써 마초성을 은폐하면서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참여민주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걸면서 등장한 한국의 현 정권이나 그 주변의 개혁 주도 세력이 사회의 도덕성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파시스트적 태도를 종종 드러내는 것은, 상대방을 악의 축이라고 단정하면서 자신에게 신학적 정당성을 배타적으로 부여하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자들과 다르면서도 유사하다. 유사한 점은 진리를 독점하려는 태도이고, 다른 점은 후자가 자신의 하드 바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식민주의적 열등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의 이른바 개혁적 마초주의는 은은한 하드 바디적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참여민주주의와 보다 걸맞는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최근에 출간된, 가족을 소재로 하여 남성성을 조명하는 일련의 저술들은 바로 이런 과제를 향해 날을 세운다. 권명아의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2000), 정유성의 따로와 끼리 남성 지배문화 벗기기(2001), 이득재의 가족주의는 야만이다(2001),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2003)이 그 대표적 저술이다.

이 책들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남성 지배 문화는 타자는 물론이고 남자 자신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는 점, 그러한 자기 파괴적 문화의 주된 재생산의 장치의 하나가 가족/가족주의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족(주의)의 해체가 필요하다는 점 등이다. 전인권의 저작에서 보다 잘 드러나듯 그러한 가족주의는 어린 시절의 일상적 경험 속에서 육체의 기억으로 새겨진다. 그러므로 내 안의 아버지를 살해하라는 명제는 육체에 새겨진 사회적 무의식과의 전쟁 상황으로 돌입하겠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전쟁 선포다. 그리고 이 저서는 우리에게 가족에 관한 육체의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 참여민주주의의 중요한 무대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