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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후쿠시마’와 서울시장 선거

[한겨레신문](2011.10.13)의 '야!한국사회'에 실린 칼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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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와 서울시장 선거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7개월이 지났다. 사고 직후,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이 사고로 1986년에 발생한 체르노빌 사고보다 5배나 많은 100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보도를 내놓았다. 그 방사능 유출의 양은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170, 체르노빌 사고의 13배나 된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여 ‘2011311일의 후쿠시마는 인간의 기술이, 그 활용의 동기와 관계없이, 최악의 파괴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결정적인 시대적 징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시사적 의미를 지닌 사고들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원전사고만큼이나 강한 느낌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런데 독일과 스위스를 제외한 어느 나라도 후쿠시마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더욱이 한국의 대통령은 바로 그 사고가 있던 때에 아랍에미레이트연합과 맺은 원전 수출 기공식에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그 직후 원전을 더 늘릴 것이고, 수명이 지난 고리 원전 1호를 재연장하는 계획안을 발표했다.

한국의 시민사회도 그 점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다. ‘후쿠시마 이후원전은 더 이상 환경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님이 널리 각인되었음에도 환경단체를 제외한 어디에서도 이 문제는 지지하게 사유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지난 9월 말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연구소가 원자력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토론회를 가진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기획이었다. 비록 이 토론회에서는 충분히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원전 문제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모색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의 생각을 얘기하자면, ‘후쿠시마 이후의 가장 중요한 문제제기의 하나는 발전지상주의를 근원적으로 탈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폭과는 달리 원전은 발전욕망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한데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시대보다도 더욱 독한 발전 질병에 걸려 있다. 그토록 발전에 미쳐 있던 지난 권위주의 시대에도 이웃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민주화 시대 우리사회에는 공공적인 것이 국가제도에서 사회 구석구석까지, 심지어 사람들의 내적 욕망에까지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현 정부와 서울시가 심각한 부채에 휩싸이게 된 것도 결국은 발전 질병의 결과 아니었던가. 당국이 가졌던 국가발전 전략을 시민의 발전 욕망과 야합시키는 과정에서, 가뜩이나 거품으로 가득한 부동산에 대한 과잉투자를 초래하였다.

일본의 저명한 반핵평화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원전에 관한 정보의 부재를 비판했다. 이는 전문가집단과 정부가 정보를 독점한 결과 시민사회는 원전의 문제를 발전의 상징으로만 이해했고 그 위기를 성찰할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문제제기가 함축되어 있다.

물론 한국의 민주주의도 그 점에서 유사하다. 발전을 위한 갖가지 정책 아이템에 관한 정보를 국가와 전문가집단이 독점하면서 발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유혹만이 난무한 정치로 일관된 것이 한국의 민주주의 아니었던가. 시민사회는 그러한 뻥튀기된 욕망을 향유하면서 민주주의적 권리행사를 남용한 것 아닌가. 하여 나는 후쿠시마 이후, 원전 문제를 포함하여 우리의 욕구들과 얽혀 있는 일체의 발전지상주의에 대한 근원적 재검토를 시작하는 성찰의 계기로서 받아들일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제 곧 서울 시장 선거가 있다. 발전지상주의적 정치로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이들은 결코 민주주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또한 선거국면의 정치적 메시지는, 네거티브 폭로정치가 아니라, 발전지상주의로 난도질된 시정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들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