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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직업으로서의 정치인

[한겨레신문] 2012.3.1 '야!한국사회' 칼럼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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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정치인

 

 

 

한때 나는 목사가 직업이라고 주장했다. 직업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 성직론에 관한 기독교계의 일반적 이해에 맞서고 싶었다. 게다가 필요할 땐 법익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성직이라 하여 탈세를 정당화하는 모순적 태도 때문에 목사를 탈신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기독교도들이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의 태도 또한 신자로서의 태도만큼이나 숭고해야 함을 말하고 싶기도 했다. 해서 모든 직업은 성직이고, 모든 성직은 직업임을 애써 강조했다.

그런데 직업이 특권화되는 시대가 되었다. 자본주의라는 종교에서 직업은 성직이 되고 있다. 직업이 없는 이는 직업이 있는 이를 선망하고, 직업은 그 자체 내에서 위격이 세분화되고 있다. 그 위격 간의 상향이동을 가로막는 진입장벽이 높아졌고, 하향이동은 심각한 존재의 위기로서 체감되고 있다. 하여 사람들은 상향이동을 위해 자본주의라는 종교에 더욱 신실한 자가 되고자 열정을 다하고, 하향이동을 회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반면 사향종교가 되고 있는 개신교의 목사는 위격이 급락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질 낮은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가고, 직업 선택에서 밀린 자들이 목사가 되려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많은 목사들 또한 그런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목사가 직업이라고 애써 주장하는 것은 이젠 허망한 소리에 지나지 않다.

한데 요즘 나는 정치인을 보며 직업에 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1987년 이후의 민주화 과정은 가치의 측면이 과소 관철된 반면 절차의 측면이 과잉 관철되었다. 하여 제도의 절차성의 핵심에 포진한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의 위격은 격상되었다. 물론 언제라고 국회의원이 특권화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냐마는, 최근의 민주적 제도화 과정에서 많은 정치인 가운데 가장 위격이 상승한 이들이 국회의원이 아닐까 한다.

최근 공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풍경을 보면서 정치인들이 그 직업을 사수하기 위해 혹은 새로 진입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격전을 벌이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 직업이 보장해주는 특권이 큰 만큼 실패에 대한 응징도 크기에, 직업으로서의 국회의원이 되는 일에 존재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직업의 사회생태학에서 보면 상식적인 일이겠다. 그렇기에 적지 않은 이들이 해서는 안 될 일에 손을 대기도 하고, 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존에 최우선을 두는 전쟁을 치루는 것이겠다.

한데 그럴수록 그 직업은 개인 혹은 집단 이기주의에 빠질 우려가 크다. 그 특권적 직업이 가져야할 성화된 도덕성이나 공공적 감각보다는 자신의 생존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는 직업의 논리에 몰두하곤 한다는 것이다.

특권이 많을수록 그것에 대한 사회적 감시도 강화되어야 하고, 그 직업에 있는 이들일수록 더 높은 공공적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특권적 직업을 쟁취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그러한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가용자원을 투입하여야 하니, 그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보상을 받아야 경쟁을 위한 소요비용을 채울 수 있는 구조에서 공공적 감각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가능한가?

결국 정치인이라는 직업은 특권화된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는 한 공공적 가치를 갖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구조의 개선을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정치인의 특권을 제약하는 일이다.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그 특권화된 직업의 장본인들 자신이 그 직업에 높은 도덕적, 공공적 가치를 부여하는 노력이 선행하는 것이다. 이번 총선이 그런 노력을 과시적으로 보여주는 선례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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