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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 민중의 죽음

[한겨레신문]의 <야!한국사회>에 실린 칼럼원고(201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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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중의 죽음

 

17일 아침, 휴대폰 문자로 부고를 들었다. 그다지 가까웠던 것도 아닌데, 착잡한 심사가 하루 종일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마치 그 죽음에 연루된 공범자가 된 느낌이었다.

생전에 그는 많은 말을 쏟아냈다. 그 중에는 대화의 흐름을 끊는 뜬금없는 말이 많았고, 세상의 종말에 관한 황당한 얘기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우악스럽게 화를 내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예배 중에 주제를 두고 대화를 할 때 불쑥 끼어들어 던지는 엉뚱한 말에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생각을 집중할 수 없었다. 다른 교회에서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가 쏟아내는 독설들로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데 방해를 받았다. 또 다른 교회에서는 교인들과 다퉜다고 하고, 어느 노숙인 무료급식소에서도 자원봉사자들과 심하게 불편한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어떤 심포지엄에서는 질의응답 시간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했고, 또 어떤 시민단체에서는 간사들과 큰 싸움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실은, 내 경험에 한정해서 본다면, 못 들어줄 만큼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나름의 논리가 있었고, 또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괜한 과민한 기준을 그에게 적용한 탓에, 그와 얘기 나누는 것 자체를 기피한 탓이 크다.

장례식장에 와서야 비로소 그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고,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별로 아는 게 없다. 나이도 어림짐작만 했을 뿐이고, 비록 따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두 명의 자녀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가 어떤 이유로 노숙과 쪽방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도 몰랐고, 부인과는 어떻게 된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실은 그가 흘리듯 자기 얘기를 한 것이 몇 번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고, 어디까지 사실인지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조금 더 얘기를 하면 충분히 알 수도 있었던 것을 알려 하지 않았다. 요컨대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은 그를 만나고 있을 때조차 그림자처럼 비존재로 여기며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잦다. 일부 시민운동단체나 사회부조단체, 정치단체, 혹은 진보적 교회들의 활동가들로부터 이른바 사나운 민중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단체들은 민중 친화적 성향의 활동을 하고 있는 시민 중심의 기구들이다. 내가 속한 교회도 그 점에서 다르지 않고, 많은 괜찮은교회들도 마찬가지다. 나를 포함해서 이런 상황을 잘 견뎌내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실 훌륭한 민중들은 훨씬 많다. 그런 이들은, 그다지 부자도 아니면서 그다지 가난하지도 않고, 그다지 학식이 넘치지도 않지만 어지간히 아는 척할 여력이 있는,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에게는 많은 감동과 존경을 자아낸다. 하지만 또한 어떤 민중은 세상의 폭력에 무참하게 짓밟힌 나머지 적지 않은 정신적 외상으로 이상행동을 하곤 한다. 한데 문제는 그런 이들이 갈 곳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민중적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민중의 정신적 외상을 감당할 만한 전문성이나 경험이 빈약한 이들은 대개 그런 이들을 대하는 데 실패하기 마련이다.

과거 개신교의 기도원들은, 그것이 좋은 방법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정신적 외상을 입은 민중을 포용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기도원들은 중산층 신자의 휴양소 같은 것으로 전환되었다. 일부 종교 시설을 포함한 몇몇 시설들이 그런 역할을 함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민중에게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외상을 새겨놓는 일이 빈번한 사회에서, 그러나 그들을 받아들이고 돌보는 장치는 현격히 부족한 사회에서, 일부 시민들만이 그 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체감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만으로는 힘이 부치다.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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