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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룸펜을 위한 교회는 없다

[한게레신문]의 '야!한국사회'에 실린 칼럼원고(2012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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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펜을 위한 교회는 없다




어린 시절 설날을 앞두고 집에서 제일 큰 양재기에 쌀을 넣어 방앗간 앞에 아주머니들이 윗동네 아래동네 할 것 없이 길게 줄을 섰다
. 거기에는 아이들도 함께 있었으니, 그날 방앗간 앞 길게 늘어선 줄에는 이웃동네 아무개의 엄마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양재기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가래떡을 가득 담아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떡 한 사발과 물 한 사발을 떠 놓고 집 구석구석을 돌며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던졌다. “묵은 것은 썩 물러가라.”

쉰 한 번째 해를 마감하는 날, 그 며칠 전 만났던 친구가 술에 절어 털어놓은 말이 할머니의 말과 포개져 떠올랐다. 그이는 갈수록 늘어나는 빚에 더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퇴직 후 초초감에 시작한 자그마한 프랜차이즈 식당에 잠자는 시간을 뺀 전부를 바쳤다. 1년 남짓, 권리금도 못 챙기고 서둘러 포기한 날, 진탕 술을 마시고 몇 번 토한 뒤 그는 삶을 내려놓을 것만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남은 건 빚뿐이야!”

IMF 재앙 때, 나도 빚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큰 액수는 아니었어도 23% 이자는 금새 원금을 넘어섰다. 청산하기까지 10년 가까이 해를 넘긴다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지를 체감했었다. 아마도 그는 이런 마음, 아니 더 비참한 가슴으로 쉰한 번째 해를 넘겼을 것이다.

물 한 사발에 가래떡 한 사발로 절 한번 하고 그 묵은 것을 떠나보낼 수 있다면 그날이야말로 크리스마스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대한 상상을 하며 최초의 예수 추종자들이 떠올린 것 중의 하나가 빚을 사면해주는 하느님이다.

자본간 경쟁이 너무 피로했는지 자본은 경쟁의 타겟을 기업이 아닌 대중으로 바꾸었다. 누가 보아도 경쟁이 못되는 만만한 상대를 향한 대대적인 공격 앞에 지구상에서 중간층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소비자 없는 소비자본주의라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소비자본주의가 첨단화되고 있는 세상의 현실이다.

기업은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그의 노동 효율성을 압도하는 시스템과 기계로 그를 대체했다. 20여 년 간 그의 일부였던 직장에서 퇴출되었다. 소비사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소비력의 상실에서 온다. 직장에서 퇴출된 이는 소비자의 대열에서도 퇴출될 절박한 위기에 놓인다. 중년 남자의 재취업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자영업이다. 하지만 기업은 자영업자가 되려는 이의 남은 자산을 쏙쏙 빨아먹는다. 1년도 못 가서 엄청난 손실을 안고 다시 퇴출자의 길에 들어선 그는 이제 중간층의 영역에서도 사실상 퇴출 상태다.

그는 죽음을 생각한다. 되돌릴 길은 없고, 묵은 것 썩 물러가게 해달라고 떼를 쓸 국가는 실재하는 국가가 아니다. 권위주의체제를 몰아내는 대열의 적극적 일원이었던 그가 얻은 시민이라는, 한때는 감격스러운 이름이었던 그것이 이제는 종이 한 장의 두께도 안 되었다. 죽음을 생각하나 죽을 수 없었던 그는 종교를 떠올렸다.

얼마 전 교회를 담임하는 후배 목사 하나가 말했다. ‘열심히 해서 교인이 늘긴 했는데, 온통 룸펜뿐이야.’ 1980년대에 운동권들이나 썼던 이 말이, 그런 것과는 담쌓고 살고 있는 이의 입에서 나오다니 퍽 낯설다. 아무튼 이 말 속에는 룸펜이 된 그를 환대할 교회는 많지 않다는 냉혹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실은 교회들도 부채에 시달리고 있기에 기여할 것보다 위로에 목말라하는 룸펜을 환대할 여유가 없다. 최초의 크리스마스를 상상하며 그 속에 자기들의 꿈을 담았고 그것을 전파했던 이들의 계승자들이 만든 종교에서, 놀랍게도 빚을 사면하는 하느님은 낯선 존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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