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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안전행정부

한백교회 2013년 7월 21일의 하늘뜻나누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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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행정부

 

 


주님께서 이 언약을 우리 조상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세우신 것입니다.

―「신명기5,3

 

 

 

지난 2008, MB 정권이 집권한 첫해 제헌절은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국민들이 너무 많이 쉰다는 게 이유였지요.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은 세계 최고의 과로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헌절의 운명처럼 지난 5년은 정부가 주도하는 탈법과 불법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도 때도 없이 법대로를 외쳐댔던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첫 번째 제헌절이었던 지난 17일도 초라해진 법의 시간이었다는 점에서 예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날도 국정원의 불법적인 정치개입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거리시위와 시국선언이 잇달았지만, ‘법대로대통령께서는 헌법수호를 재천명하는 입에 발린 성명하나 발표하지 않았지요.

흥미롭게도 그런 제헌절에 국회의장은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했군요. 무엇을 생각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철저히 권력욕망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법을 개헌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그들은 의미가 있다고 보았겠지만, 저는 무조건 반대입니다. 먼저 법수호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입법부 수장이든 사법부 수장이든 대통령이든, 그런 말에 공명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한데 법대로가 허튼 말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지난 45일 법무부와 안전행정부 업무보고를 받고 나서, 대통령이 ‘4대악 근절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지요.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파괴범, 불량식품이 저 유명한 4대악의 정체입니다. 임기 중에 이것들을 반드시 뿌리 뽑아 국민의 안전한 삶을 지켜주겠다는 것입니다. 아하, 바로 이것이 정부조직개편에서 팻말, 명함 등을 바꾸는 데만 6천만 원이 든다는 안전행정부라는 명칭의 요체군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부부처는 향후 5년 동안 4대악 근절에 힘쓰겠군요. 그럼 권력형 범죄 문제는 좀 설설 다뤄도 된다는 것인가요?

지난 1998년 국민의정부 때에 총무처와 내무부를 합쳐서 행정자치부가 탄생했는데, 그것을 MB 정부는 행정안전부로, 박근혜 정부는 안전행정부로 개칭했습니다. 이 정부기관이 주로 담당하는 것은 사회통합입니다. 한데 명칭의 변화에서 추정되는 사실은 두 번의 개혁정부들은 이 부처를 통해 지방자치를 통한 사회통합을 중요시했다면, 두 번의 보수정부들은 안전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통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안전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 눈에 주목됩니다.

여기서 안전은 과거 독재정부들이 중요시했던 공안이라는 개념과 쌍을 이루는 용어입니다. 두 용어는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를 가정하면서 사회통합의 논리를 부여하는 개념입니다. 한데 공안이 이념적 위험을 제거하는 데 방점이 있다면, 안전은 일상적 범죄의 위험으로부터 사회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공안 개념을 권력유지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NLL 논쟁 같은 종북 담론이 그런 예지요. 하지만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공안 담론을 가동시켰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의 종북 담론은 보수-진보의 분할을 통한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사회통합을 가능하게 하지 못합니다.

반면 안전의 개념은 사회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통치의 수단입니다.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동성폭력 범죄자인 김길태 사건이나, 강간 후 시신 유기사건인 오원춘 사건과 용인 여고생살인사건 등은 전 국민을 증오의 연대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때 매스미디어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은 의문의 여지없습니다. 무한경쟁 중인 매스미디어들에게 공포는 대중의 주목을 끌기에 더 없이 괜찮은 요소입니다. 그런 점에서 범죄 보도는 공포 마케팅에서 가장 쓸 만한 상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기사들은 그 범죄가 얼마나 잔혹한지, 그리고 그 범죄자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죄의식이 없는 자인지를 강조하게 됩니다. 또한 그런 범죄들을 열거함으로써, 누구나 그런 범죄의 잠재적 희생자임을 체감하게 합니다. 하여 사람들은 증오와 공포심으로 그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한데 이런 매스미디어의 속성이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전 국민을 그 범죄의 적으로 만들고, 그 범죄자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며, 그런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적대하는 사회적 연대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적개심을 행동화할 수 없습니다. 복수는 정부에 의해 독점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정부가 이 연대의 행위자가 되어 복수를 대행합니다.

복수는 가혹할수록 더 큰 쾌감을 줍니다. 하여 정부는 그 범죄자에게 법률상 가능한 한 최대의 중형을 내리게 합니다. 심지어 법이 국민의 감정에 못 미친다면 법을 개정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부는 국민의 공포의 연대, 증오의 연대를 주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한데 이러한 증오의 연대를 통한 사회적 통합은 많은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범죄를 왜곡 과장함으로써 범죄자의 인권을 유린할 수 있고, 둘째, 그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이때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되는 이들은 대개 사회적 소수자들이지요. 즉 소수자에 대한 시민사회의 증오범죄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회복지나 경제민주화 정책 같은 사회적 양극화를 완화시키는 정치를 정부가 후퇴시킬 때 시민사회의 저항을 희석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 통치 수단을 활용하는 정부는 안전이라는 명분 아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가혹한 법치를 수행합니다. 반면,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불러일으키는 불법과 탈법에 대해서는 솜방망이로 법을 활용하곤 합니다. 연이어 집권한 한국의 보수정부들은 행정안전부 혹은 안전행정부를 통해 그런 식의 사회적 통합이 실현되는 사회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65주년 제헌절이 소외되고 있는 오늘 한국의 법적 현실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유다국에서 처음 반포된 법의 현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시아 정부는 증조부인 아하스 왕이 이룩한 발전의 토대를 재구축하고자 법의 반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부인 히스기야 왕의 정치를 계승하는 것이었지요.

아하스 왕은 약소국 유다를 강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통치자입니다. 하지이때는 유다국의 보수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했지요. 하여 소농은 몰락하고 있었고, 기득권층은 크게 강화된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런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통치자였지요.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부당한 권력의 횡포를 제약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그의 아들 므낫세의 기나긴 통치 아래서 개혁의 기반은 철저히 무너졌지요.

한데 므낫세를 이어 왕이 된 요시아는 다시 히스기야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법의 반포를 통해 시행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법전입니다. 하지만 그 법은 글을 읽지 못하는 대중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런 법은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나 작동하는 법이지요. 그런데 왕은 백성들을 법의 질서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즉 법전의 길고 복잡한 내용을 간소하게 하여, 백성에게 법을 선사한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사회를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하여 요시아가 제정한 고대 유다국의 법은 안전을 강조하면서 특정 범죄자를 증오하게 하는 법이 아닙니다. 그 법은 백성과 소통하는 법이고, 백성을 법 밖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못하도록, 그들이 법의 백성이 되고 법의 혜택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그런 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권력층의 힘이 남용되는 것을 억제하고 그것이 백성을 몰락하게 하여 법의 밖으로 내몰게 하는 것을 막아내고자 하는 법이었던 것입니다.

제헌절 65주기를 맞이한 오늘 우리의 법 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정부는 공공연히 안전을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공포 마케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공포를 통한 사회적 통합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증오로 구축되는 병든 시민의 사회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복지나 경제민주화를 향한 느릿느릿하고 비틀거리는 시도나마 폐기해도 시민적 저항이 없는 무능력한 사회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 많은 시민은 저항중입니다. 부당한 권력을 직시하고 있고, 안전 욕구에 매몰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시아의 법 정신처럼 이웃과 공공적인 것을 나누고, 배제된 소수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간직한 시민성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된다면 제헌절은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는 유다국의 보수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했지요. 하여 소농은 몰락하고 있었고, 기득권층은 크게 강화된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런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통치자였지요.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부당한 권력의 횡포를 제약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그의 아들 므낫세의 기나긴 통치 아래서 개혁의 기반은 철저히 무너졌지요.

한데 므낫세를 이어 왕이 된 요시아는 다시 히스기야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법의 반포를 통해 시행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법전입니다. 하지만 그 법은 글을 읽지 못하는 대중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런 법은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나 작동하는 법이지요. 그런데 왕은 백성들을 법의 질서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즉 법전의 길고 복잡한 내용을 간소하게 하여, 백성에게 법을 선사한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사회를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하여 요시아가 제정한 고대 유다국의 법은 안전을 강조하면서 특정 범죄자를 증오하게 하는 법이 아닙니다. 그 법은 백성과 소통하는 법이고, 백성을 법 밖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못하도록, 그들이 법의 백성이 되고 법의 혜택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그런 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권력층의 힘이 남용되는 것을 억제하고 그것이 백성을 몰락하게 하여 법의 밖으로 내몰게 하는 것을 막아내고자 하는 법이었던 것입니다.

제헌절 65주기를 맞이한 오늘 우리의 법 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정부는 공공연히 안전을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공포 마케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공포를 통한 사회적 통합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증오로 구축되는 병든 시민의 사회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복지나 경제민주화를 향한 느릿느릿하고 비틀거리는 시도나마 폐기해도 시민적 저항이 없는 무능력한 사회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 많은 시민은 저항중입니다. 부당한 권력을 직시하고 있고, 안전 욕구에 매몰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시아의 법 정신처럼 이웃과 공공적인 것을 나누고, 배제된 소수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간직한 시민성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된다면 제헌절은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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