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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성장 대신 공의를

이 글은 한백교회 2013년 10월 20일에 행한 하늘뜻나누기 원고입니다. 

이날 예배는 한백교회 창립 26주년을 기념하는 예배였습니다. 


 

성장 대신 공의를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 「아모스서5,24a

 


1997년의 재앙과 더불어 등장한 국민의 정부는 새로운 경제정책적 기조로 성장과 분배를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한국사회의 신권위주의적 체제를 가능하게 했던 성장지상주의적 권력연합의 붕괴를 의미했고, 대안적 질서를 향한 미래사회적 모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한국사회는 복지사회에 대한 제도적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조와 제도적 모색은 참여정부에로 그대로 이어졌지요.

그러나 이 두 민주정부 시절에 사회적 격차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불평등의 심화를 막아보려는 정책들을 고안해냈지만, 결과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지요.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초래한 국제경제 상황의 악화라는 조건과 관련이 있음은 의심의 여지없습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국제경제 상황이 너무 결정적이어서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외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민주정부들의 무능이 더 문제였는지는 논란거리입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민주정부들의 실패는 민주연합의 붕괴를 초래했고, 다시 성장지상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MB 정부 5년은 그나마 존속하던 분배의 제도적 장치들을 무력화시키는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극도로 악화된 사회적 격차의 상황은 동반성장이라는 사회경제적 의제를 부상하게 했고, 그것이 경제민주화와 사회복지라는 선거 이슈를 낳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슈를 좀 더 잘 활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박근혜 정부 5년 동안 경제정책의 관점에서 MB와 그다지 차별화되는 정치를 펼 것으로 기대되지 않습니다. 역시 국제경제 질서가 중요한 핑계거리이고, 해서 분배 정책보다 성장 정책이 우선한다는 논리가 지배하고 있고 계속 그럴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국제경제의 상황이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말합니다. 그것은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구조적인 저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 상황에 있기 때문이지요. 이는 세계 경제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질서 속에 편입됨으로 인해, 자본의 무한 경쟁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이 과정에서 극도로 악화된 적자생존의 경쟁 과정에서 살아남은 소수와 몰락하거나 몰락의 위기에 놓인 다수로 극단적으로 이분화 되었습니다. 결국 중산층이 몰락해서 소비할 계층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에서 경기침체가 해소되기는 점점 무망한 상황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탈성장주의문제가 빠르게 비판적 지식인과 시민사회에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성장과 분배’, ‘지속가능한 성장등의 논점이 아니라 성장지상주의로부터의 탈출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알다시피 성장지상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또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파괴했습니다. 그런 이중의 파괴가 극을 향해 치닫는 지금에 와서는 도처에서 대재앙의 요소들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그 정도가 너무나 심각해서 벗어날 길도 거의 보이지 않는 재앙 말입니다.

하여 성장지상주의는 이제 승자에게 축복을 주는 시스템이 아님을 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이데올로기가 선전하는 것처럼, 낙수효과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축복을 얻는 시스템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여 탈성장주의를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한 젊은 비평가는 최근 밀양에서 벌이는 노인들의 저항은 우리사회의 생각의 지형을 바꿔 놓고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우리사회에서 거의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았던 탈성장주의의 모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문제제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2013년의 밀양은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사회의 성장지상주의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시작하였습니다. 1965년 이후 군부가 중심이 되고 재계, 관계, 정계, 법조계, 언론계, 학계 등을 아우르는 신기득권집단이 가세한 개발연대가 구축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박정희라는 1인 통치자가 있고, 그를 둘러싼 군부와 그 주변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지배연합의 구심세력이 되는 개발주의적 지배연합입니다. 이런 1인 독재자 중심의 성장주의체제를 신권위주의체제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1973년 이후 본격화된 이른바 영동개발은 성장지상주의를 지탱하는 중상위계층을 탄생시켰고, 이들은 성장지상주의체제의 견고한 지지세력으로 아직까지 건재합니다. 그런 점에서 1인 독재자는 사라졌지만, 성장지상주의라는 인식은 여전히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하여 분배는 성장의 보조장치 정도에 지나지 않는 정책 기조가 이제까지의 모든 정부를 아울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회에서 ‘2013년의 밀양은 새로운 문제제기를 던져주었다는 것입니다. 성장지상주의를 근원적으로 재사유하도록 우리를 자극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탈성장주의가 추구하는 세상은 무엇일까요? 세계는 이제 성장이 거의 멈춘, 구조화된 저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 사회인데, 여전히 성장지상주의 프로그램이 지속된다는 것은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게 탈성장주의 논점의 또 다른 공유점입니다.

그렇다면 성장지상주의 프로그램은 무엇일까요? 그 정체가 모호하지만 현재 정권이 추구하는 창조경제라는 슬로건은 필경 성장지상주의를 기조에 담고 있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없습니다. 분명 첨단 IT 산업 육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과 창조경재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효율성고부가가치라는 요소가 숨겨져 있을 것이고요. 결국 그것을 실현할 주체는 극소수의 재벌기업 뿐입니다.

이런 성장지상주의 프로그램을 대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직 더 생각해야 하지만, 최근 서울시가 펴고 있는 정책들 속에는 그런 단초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컨대 마을 살리기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사회적 기업 육성 프로젝트가, 그 취지대로라면, 탈성장주의적 프로그램의 한 예일 수 있습니다. 성장을 목표로 하는 기업이 아니라 이웃 간의 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업을 국가/지자체가 지원하는 것이지요.

사회의 공공성을 확장하기 위한 소기업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공공성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소비가 발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소비는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비가 아니라 이웃 간의 친밀성과 공의를 확장하기 위한 소비입니다. 나는 이것을 성장지상주의적 소비가 아니라 공의적 소비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이렇게 탈성장주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의 공생, 아니 상생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모색되는 일체의 기획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국에서 활동한 유다국 농민 출신 예언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국은 국력이 절정기에 있었지요. 실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경쟁국가들인 북족의 시리아나 페니키아 지역의 나라들도 번영기에 있었고, 유다국이나 암몬국 같은 소국들도 한창 발전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기원전 8세기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 전체가 공히 절정의 성장기를 맞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데 이 점은 동시에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왕의 사유지가 크게 늘었고, 그를 둘러싼 지배계층의 부 또한 막대하게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소농들에 대한 지배계층들의 수탈이 크게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소농들이 몰락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여 이 시기에 활동한 유명한 예언자들인 아모스와 호세야, 유다국의 이사야와 미가 등의 메시지가 소농을 착취하는 부유층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부유층이 극단의 사치행각을 벌이면서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아모스는 군주와 귀족들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한 예언자로 유명합니다. 한데 오늘 본문은 국가의 성장을 향유하는 세력이 대규모의 제사를 지내며 부를 베풀어준 신에게 감사하는 축복의 제의가 연일 벌이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성장지상주의가 그 결실을 맺고 있었고 그것을 칭송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한데 예언자는 이런 분위기에 초를 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제사를 원치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의가 물결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다.’ 성장 대신 공의를 원하는 신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국이 발전일로 있을 때 예언자는 이것을 비판하면서 성장 대신 공의를 주장했는데, 한국사회는 성장이 멈추어 버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성장지상주의 냄새를 풍기는 정책에 몰두하고 있고 시민사회도 그러한 욕구에 충혈되어 있습니다. 실은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은 멈추었는데, 성장지상주의는 교회 제도와 담론 구석구석에 흘러넘칩니다.

요컨대 우리가 성장이 아닌 공의를 외칠 시간은 조금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늦음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소리 높이고 좀 더 열렬히 교회와 세상을 향해 공의가 담긴 탈성장주의를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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