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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

이 글은 [기독교영성신문](2002년 경)의 칼럼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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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

 

 

 

 

나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를 유달리 좋아한다그만큼 그의 글을 꽤 본 편이고그에 관한 글도 적지 아니 읽었다그의 글을 인용한 내 글 또한 수편이다한데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의 글만이 아니다그의 사진에서도 깊은 감동이 있다.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고 앉아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무엇에 올려놓은 듯한 모습이 흑백사진의 장중함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사진 한 장이 특히 인상적이다그의 눈은 전방 15도 가량 위를 응시하고 있고그의 표정은 더 이상의 진지함은 없다는 듯 근엄함 그 자체다얼른 보아도 권위로 가득하다그가 응시하는 곳에는 세상의 허구 같은 진리가 놓여 있을 것 같고그 냉소적 눈빛에 허구적 진리가 여지없이 분쇄되어버리는 장면이 숨겨져 있는 듯 하다이것이 그의 얼굴이 보여주는 정체성이다그런데 그 사진을 찍을 당시 그는 이미 실명한 상태였다더구나 소심한 성격으로 유명한 사람이다심지어 강연대에 설 용기가 없어 원고를 대독시키고는 숨어서 지켜보는 이였다고 한다또 도서관의 사람이라고 할 만큼 도서관을 집처럼 여기며 살았으면서도 사서에게 책을 찾아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백과사전 읽기에 집착했다는 얘기도 그의 유명한 일화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왜냐면 내가 읽은 그의 글이나 그에 관한 글에 의하면그는 결코 볼 수 없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넘어갔던 무수한 것들특히 세상의 진리라는 것이 내포하는 허구를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존재다그래서 사진에서 재현된 그는 빈틈없이 예리한 눈빛과 위엄 있는 풍채로 나를 만난다그리고 언제나 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진 속의 그와 대화를 나눈다그는 늘 침묵을 지키고 있음에도 나는 항상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귀담아 들으려 하고 실명한 그의 시선의 초점을 읽으려 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와 유사하다고 하면 과장일까성서와 신앙 전통의 중계로 그분은 특정한 이미지로서 내게 다가왔다비록 그분은 내가 세파 속에서 곤혹스러워 당신을 찾을 때도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십자가 위에서 신의 침묵을 갈가리 찢긴 몸으로 감내했던 당신의 모습처럼세상은 여전히 말 없는 예수님을 경험하고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포함해서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말 없는 예수님의 말을 듣는다획일적인 도그마적 강령만을 늘 반복하는 분이 아니라우리의 변화무쌍한 삶에 함께 하고늘 새로움으로 우리와 만나는 그분과 대화를 나눈다그래서 기도는 늘 새롭고 항상 위안이 된다.

한데 최근 번역 출간된 예수는 신화다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목사인 나는 안타까움에 빠진다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침묵을 더 이상 감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의 말을 듣자니 그것은 세상의 불의와는 무관한 듯 높은 곳에서 무심히 군림만 하는 신에 대한 불평이다온갖 일상사를 늘 자기 식대로만 고치라고 주장하는 고집불통 신에 대한 불평이다나아가 힘 가진 자가 세계의 통치자로 거만 떨며 폭력을 일삼을 때수호신인 양 그의 배후에 도사리고만 있는 신에 대한 불평이다.

나는 누구나 다 아는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 하나를 떠올린다.(마태〉 25,34~40) 거기에는 굶주린 이들목마른 이들헐벗은 이들병든 이들감옥에 갇힌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예수님이 묘사된다또한 거기에는 어떤 이들이 예수님과 참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인지가 그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성서에서 기억되고 있는 예수님과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예수님 사이에는 필경 어떤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나는 여기서 당연한 귀결을 다시 되뇌기지 않을 수 없다그분과 세상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이 다름 아닌 바로 예수를 따르는 자라고 자부하던 우리 자신이었다고우리의 빗나간 신앙이 바로 그 장벽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