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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크리스마스 속 모순 - 즐거움이라는 욕망의 굴레

[교수신문] 2002년 12월 '문화비평' 코너에 실린 칼럼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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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속 모순

 즐거움이라는 욕망의 굴레

 

 

 

 

서점 팬시 코너엔 온통 크리스마스 카드 일색이다. 형형색색의 갖가지 기발한 아이디어가 단지 일년 전과 비교해도 월등해진 느낌이다. 백화점 앞 가로등마다 고정된 수십 개의 빨간색과 초록색 깃발의 메리 크리스마스문구는 거리를 세련된 축제의 분위기로 들뜨게 한다. 음반 가게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호세 펠리치아노의 펠리스 나비다(Feliz Navidad)에 크리스마스의 추억으로 거리는 흥건히 젖는다. 낯설음과 낯익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과거의 기억을 소재로 하면서도 그것을 새롭게 업그레이드시키는 장치들로 진부하지 않은 축제에 대한 기대감이 자극된다.

이제 12월을 갓 넘긴 하루의 시내 외출은, 백화점 진열장의 화려함에 좀처럼 눈을 허락하지 않는 나를 크리스마스 전령사의 홀리는 소리에 반하게 했다. 축제의 달콤한 전염성은 버스의 내 앞자리에 앉은 젊은 연인들의 설렘 못지않게 사십이 넘은 내게도 잠시의 들뜬 마음을 선사했다. 허전한 주머니 사정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에 의지해서 배가된 구매력을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집을 나설 때의 계획을 세 배나 초과한 과소비였다.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을 지출하면서 기획된 상술은 나와 같은 충동적 구매자의 확대된 소비 패턴과 상응하면서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분명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적으로 과소비에 의해 지탱되고 재생산되는 축제다. 미국에서는 대림절기에서 크리스마스까지 약 4주 동안 년간 재화의 약 40%가 소비된다고 한다. 이 정도는 아닐지라도 아마 우리나라도 꽤나 소비적인 양상을 띨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 땅에 온 날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이 축제의 즐거움은 오늘날 압도적으로 자본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일 일만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본과 무관한 채 벌어지는 일상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느 한 순간이라도 자본으로부터 벗어나 살아갈 도리가 있기나 한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권태로운 일상을 빗겨갈 틈새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자본의 힘이건 아니건 간에 삶의 건강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일터와 쉼터, 노동과 여가라는 자본주의적인 전통적 이분법마저 무너져 가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흐름에서 축제는 아직까지는 노동의 후방 지역으로 일정한 진공성을 보장해주지 않는가? 또한 설이나 추석 같이 전통적 가족주의를 재활성화하는 기회로 소비되는 축제와 비교할 때,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는 개개인의 욕망에 대해 보다 열려 있는 축제로 간직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모순 속에 빠진다. 왜냐면 과소비는 필연적으로 어떤 타자의 상대적 박탈감을 증폭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다른 이에게 좌절을 준다면, 그 즐거움의 욕망이란 얼마나 사악한가? 더구나 그 행복의 계기가 절망한 이에게 희망을 준다는 의미의 축제와 관련된다면 그 의미의 전화는 얼마나 얄궂은가?

신이 사람이 되었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제일 원리는 신을 모방함으로써, 즉 높아짐의 동일화를 통해서 신앙적 존재의 행복을 조건짓게 했던 유대교적 신앙 관행을 전도시킨다. 대신 낮아짐의 동일화가 예수를 통해 신이 사람에게 준 새로운 교훈이다. 인간이 된 신, 아니 비천한인간이 된 신의 이야기는 바로 비천한 존재의 얼굴에서 신을 읽으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프란체스코나 테레사 수녀, 맨발의 성자 이현필 같은 이들이 비천한 존재를 신 대하듯 하면서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과 통하는 얘기다.

그렇다면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가 대변하고 있고, 이 세계가 누리고 있는 크리스마스 축제는, 그것이 선사하는 삶의 즐거움은 예수와는 퍽 깊은 간격을 두고 있다. 그것은 성자가 될 용기가 없는 우리 같은 범인들이 존재의 부끄러움을 품는 대신 만족을 누리기 위해 만들어낸 작위적인 창조물에 불과하다.

물론 나는 이 대목에서도 성자들의 거룩한 축제가 아닌, 속화된 크리스마스를 여전히 붙잡으려 한다. 나 자신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순적이더라도, 현재의 크리스마스처럼 자본에 점거당한 채 삶의 작은 행복을 선사해주는 즐거움의 축제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도 어느덧 가담해 버린 과소비 문화로 인해 상처받는 이들을 돌보는 호혜적 축제가 되게 하고 싶다. 요컨대 범인처럼 즐겁고 싶은 동시에 성자들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는 축제로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싶은 것이다.

아직 20일이나 남았지만 나는 매년 하는 갈등 속에 다시 자발적으로 빠져들기로 했다. 재화의 상당량이 소비되는 자본의 축제가 절정을 행해 질주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해소되지 않는 갈등 속으로 나의 신앙을 소비하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