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

6.13 이후, 우리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

이 글은 [경향신문] 2018년 6월16일자 '사유와 성찰' 코너에 실린 칼럼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152107005&code=990100


---------------------------------



6.13 이후, 우리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

 




6.13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끝난 뒤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보수 궤멸이라는 표현을 썼다. 선거에서 패배한 정도가 아니라 회생이 불가능할 만큼 무너졌다는 것이다. 20065.31 지방선거 때 집권당인 열린우리당도 이번 선거 못지않은 처참한 패배를 겪었지만 당시 언론들이 많이 썼던 표현은 대참패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열린우리당은 당명을 몇 차례 바꾸기도 하고 합당과 분당을 거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의 참패를 궤멸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가.

물론 궤멸이라고 쓴 기자들 중 보수정당이 절대로 회생 못할 것이라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진정성이 있든 아니든 쇄신을 거듭하면서 기회를 볼 것이고, 대통령의 압권적인 지지율이 무너지는 순간이 왔을 때 다시 회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점에서 궤멸이라는 말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관점에서 궤멸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948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주도해온 반공국가체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가 냉전질서 속에 있음으로써 존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냉전질서의 중심에는 남북한 간의 적대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한국사회의 반공국가체제와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적 국제질서는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상호적 요소인 셈이다.

그런데 4.27 남북정상회담과 6.12 북미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남북한 간의 뿌리 깊은 적대관계의 해소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냉전질서의 해체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불과 3개월 전까지도 상상도 못했던 한반도 평화체제의 전망이 가시권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물론 불가역적인 국제적 협약이 맺어지려면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이 지나야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시민사회는 냉전체제를 넘어서 평화체제를 향한 도정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사실 냉전적 반공국가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권력연합은 박근혜 정권이 촛불시민에 의해 탄핵되었을 때 이미 급격한 와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빅텐트3지대니 하는 정치적 기획들의 대두는 권력연합의 오랜 견고한 연결망이 현저히 해체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반공국가체제의 형성기부터 가장 중요한 행위자의 하나였고 이후 이 체제가 공고화되는 과정에서 권력연합의 굳건한 구성원이던 보수주의적 개신교 세력이 최근 충성스런 분파와 결속력이 이완된 분파로 나눠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1990년대 전후에 급성장한 많은 대형교회들의 종교성 속에서 웰빙보수주의적인 사회적 속성을 읽어낼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이러한 요소가 현저히 드러난 교회의 이념형을 후발대형교회라고 명명한 바 있다. 요컨대 냉전적 반공국가체제를 구축하는 권력연합의 와해는 그 중심세력의 하나인 보수주의적 개신교 세력의 분화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권력연합의 와해가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부패 탓이라고 해석되었다. 아직 보수세력의 쇄신을 통해 위기의 타개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것 같았다.

한데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방위원장에게 한반도 신경제지도 기획안이 담긴 이동식저장장치(USB)를 전달하는, 연출된 행위 속에는 남북한의 정부가 적대적 공존에서 상생적 공존으로 물살을 이미 바꾸었다는 과시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여기서 한국 시민사회의 절대다수는 열렬히 환호했다. 주목할 것은 도덕적 갈망과 경제적 욕망이 결합된 이 대대적인 환호 속에서 낡은 반공국가체제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새로운 체제를 가꾸어갈 묘목이 초고속으로 성장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전환의 시작이 6.13 선거라는 얘기다.

이는 보수세력의 궤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 있어도, 반공체제라는 낡은 권력게임 질서의 궤멸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도래는, 적어도 그러한 비가역적 변화로의 도정은 새로운 권력게임이 가동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는 자신들도 그것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의 평등한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있다. 문제는 과연 그렇게 될 것인가에 있다. 민주체제를 향한 시민의 갈망이 배반당한, 반칙과 특권이 난무한 불평등 사회로 귀결된 ‘87년체제의 재판이 될 우려는 없는가. 새로운 지배연합의 형성과 행보를 감시하는 시민의 날선 눈길이 이완되는 순간, 변화는 새로운 재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것이 6.13 선거 결과를 보며 우리가 웃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