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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가 준 생각의 힌트, 사회적 영성

[한겨레신문] 2011년 4월 5일에 게재된 칼럼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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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준 생각의 힌트―사회적 영성

 


한 토론회에서 ‘사회적 영성’이 화두가 되었다. 그것을 제기한 이는 정치학자인 박명림 교수였다. 그에 의하면 진리, 계시, 말씀 등이 인간의 몸으로 침투하는 체험이다.

그런데 영성의 전문가여야 할 교회 지도자가 한 교회연합기관의 단체장이 되려고 수십억 원을 뇌물로 썼다. 이것은 비단 이번만의 일은 아니다. 내내 그래왔단다. 각 교단장의 선출도 예외는 아니라고 한다. 한편 세계 최대 교회의 원로목사와 부인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아버지 편의 아들과 어머니 편의 아들의 갈등이 얽혀 있다. 요는 재산권 분쟁이라고 한다. 또 있다. 서초역 근처에 몇천억대의 교회당을 건축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 한 교회는 공공도로 지하까지 파고 들어가겠단다. 정부의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이 편법 공사를 승인해줬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한 대형교회 목사는 교회 돈 수십억 원의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다른 대형교회 목사는 교회의 의결절차 없이 백몇십억 원의 돈을 펀드에 투자했다.

그런데 이들이 공히 신주처럼 받들고 있는 믿음에는 설교할 때 하느님의 말씀이 자기 몸을 뚫고 들어와 대신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들어 있다. 즉 자신은 신의 대언자다. 그들이 보기엔 이런 게 ‘교회적 영성’이다.

앞서 말한 토론회의 발제자인 박명림 교수는 우리사회의 불평등의 격차가 세계 최악의 상황임을 수십가지 지표를 조사하며 밝혔다. 국가복지는 후퇴하고 있고, 기업복지는 형해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점점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교회적 영성’은 뇌물, 사기, 편법건축, 부당한 펀드 투자 등으로 수십, 수백억, 아니 수천억 원을 남용한다.

이 참에 영성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교회가 말하는 영성이 자기중심의 배타적인 교리 도그마에 빠져 있는데다 대형교회들이 보이는 부적절한 행태들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영성이라는 말은 혼란스러운 것이 되었다. 게다가 교회적 영성이 아니라 사회적 영성에 대해 말하는 신학자가 별로 보이지 않는 탓도 있다. 정치학자 박명림도 이 말을 쓰기는 했지만, 그 말에 대한 일종의 저작권 같은 것을 가진 것처럼 공인되었던 신학자와 목사들의 침묵 탓에, 더 많은 설명을 하는 데 난감해했다.

신약성서에서 ‘영’은 언어로 통제되지 않는 감정체험과 관련하여 처음 사용되었다. 한 공동체에서 종교체험이 인플레를 일으키며 종교적 감정 현상이 분출하였는데, 가령 방언 같은 것이 그것이다. 박 교수의 말처럼 신적인 것 혹은 진리가 몸을 뚫고 들어왔다. 한데 영은 그러한 체험 중 감정적 체험에 국한한 표현이었다. 이해나 해석, 혹은 도덕의 차원이 아니라 감정의 차원이다.

한데 이 분출한 감정작용이 공공성을 띠지 못하고 서로 헐뜯고 권력 게임에 몰두한다. 이에 바울이라는 지도자가 ‘영’이라는 말로, 그 종교적 체험들에 공공성을 부여하려 한다. 그가 말하고 싶은 영의 핵심은 ‘사랑’이다. 곧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다. 체험이 타인을 배려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영성이 아니다.

우리네 교회 지도자들이 보인 교회적 영성은 퇴색했다. 해서 정치학자 박명림의 말이 끌린다. ‘사회적 영성’이라고 다시 말해보자. 그가 이 말에서 생각했던 것 속에는 공공성, 곧 타인과 함께 수평적으로 나누는 관계의 품성이 필요하다. 물론 거기에는 지적, 도덕적 성찰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욕망의 분별없는 분출에 관한 공공성, 곧 영적 성찰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것이 박명림이 내게 준 영에 관한 생각의 실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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