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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5.18을 맞아 <49일>을 본다

[한겨레신문] '야! 한국사회' 2011년 5월 19일자 칼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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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맞아 <49>을 본다

 

드라마 <49>에서 중심인물들의 개인서사와 그들의 악연들을 둘러싼 관계의 서사는 흥미로운면서도 껄끄럽다. 악역 캐릭터의 남녀는 가난으로 인한 냉대와 차별에 깊은 상처를 받아 배배꼬인 품성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 여자의 절친이자 그 남자의 약혼녀가 그들이 세상을 향해 보복하려는 표적이다. 표적이 된 여자는 회사 사장의 딸로, 순진하고 오지랖 넓은 착한 품성의 소유자다.

또 다른 인물, 고아 출신 여자는, 남자친구의 죽음을 비관하여 자살하려다 착한 부자 여자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안긴다.

천사표 부자 여자는 자기 잘못이 아닌데 친구와 약혼자에게 이용당하고, 자기 잘못이 아닌데 교통사고로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도는 49일 여행자가 되며, 그녀의 부모는 자기 잘못이 아닌데 딸의 친구와 약혼자로 인해 파산 위기에 처한다. 이것이 이 드라마가 담고 있는 희생자 서사다.

착한 여자의 또 다른 친구 남자가 있다. 부잣집 아들로, 착하고 사려 깊은데 유능하기까지 하다. 그는 착한 여자와 그 집안을 구원해줄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 이 드라마의 구원 서사는 그를 매개로 해서 펼쳐진다. 고아 여자도 구원 서사에서 주요 배역을 맡았지만, 그녀는 자기로 인해 49일 여행자가 된 착한 여자에게 몸을 빌려줌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고아 여자는 착한 부자 여자와 동체가 되어야만 구원 서사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구도는 드라마 안에서는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가 가해자이고 강자가 희생자라는 이분법은, 이 드라마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실제의 삶에서는 결코 자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선입관은 이 세상에 만연하다. 취업, 결혼, 심지어는 친구 맺기 과정에서 배배꼬인 가난한 자와 착한 부자의 이분법과 그로 인한 걱정의 인식틀은 상당한 설득력과 실효성을 갖는다.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갈리는 존재들이 서로 얽히면 문제가 필연코 생긴다는 생각은 거의 상식이다. 이 드라마처럼 이런 통념을 정당화하는 서사는 우리 주위를 공기처럼 떠돈다.

5.18 31주년이 되었다. 1980년 당시 세간을 떠돌던 가해자와 희생자의 통설들이 있다. 그중 많은 얘기들이 호남 사람들의 배배꼬인 품성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이며 위험한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들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관한 숱한 희생자 서사를 수없이 들먹였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일부 정치군인들이 주도한 학살사건이 광주와 전라도에서 벌어졌다. 이 사건에서 가해자가 일부 정치군인들이며 희생자가 광주시민과 전라도민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하지만 호남민에 대한 지역주의적 편견을 일상화했던 사람들의 사회적 통념이 이 사건의 공범임을 주장하는 해석도 간과할 수 없다. 아무튼 이런 사회적 편견은 그 어간에 자행된 무수한 일상적 폭력과 차별의 배후였다.

그리고 2011년 우리는 늘 그랬듯이 다시 그 날을 기린다. 그 동안 5.18 담론은 호남인들의 명예회복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물론 아직 사회적 편견이 충분히 개선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역 차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일반화되었다.

한데 최근 다른 부류의 차별과 편견이 더욱 현저해지고 있다. 빈곤은 더럽고 추악하며, 그 속에서 사는 자는 세상을 배배꼬인 눈으로 보며 위험을 초래하는 자라는 편견이 확산되었다. 그것을 입증하는 사례는 더 많이 기억되고, 반증하는 사례는 쉽게 망각된다. 또한 권력과 부가 초래하는 위험과 폭력보다 개별적인 범죄사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여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자양분 삼아 벌어진 국가폭력의 사건으로 5.18을 기억한다면, 드라마 <49>이 시사하듯 우리는 이 시대에 더욱 심화되고 있는 차별과 편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