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비평] 8호 (1999년 여름)에 처음 게재되었고,
[우리 안의 파시즘](삼인 2000)에 재수록되었으며,
나의 책 [반신학의 미소] (삼인, 2001)에 재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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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승리주의를 넘어
예수의 복원을 향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얼마 전 교회에서 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그대로 해야만 하나요?” 무심코 반복하다보니 잊어버렸던 오래된 문제의식이 그녀 덕분에 되살아났다. 대답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두 번에 걸친 설교로 답변을 시도했다. 하나는 ‘아버지’라는 호칭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장소성에 관한 것이다.
‘하나/느님 아버지’(이하 ‘하느님’)라는 말을 기독교인들은 한 주에 몇 번이나 되풀이할까?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자전거와 충돌할 긴박한 위기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이고 아버지”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이때 그녀가 부른 아버지는 하느님을 가리킨다. 예배 때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미 일상용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나를 혼동시킨 것은, 사석에서 그녀에게 하느님을 남성신이라고 믿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단호한 대답이었다. “하느님은 성이 없답니다.” 그녀의 주장인 즉슨, 하느님은 성이 없으나 아버지와 같은 든든함과 따스함이 깃든 분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해는, 신이 성을 초월한 존재라는 지식과 인습적으로 갖고 있는 부성적 신 인식이 충돌하지 않은 채 공존케 하는 일종의 완충장치 역할을 그녀에게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이러한 완충장치 속에서 신의 부성적 이미지를 완곡하게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써(남성신은 부정하면서 온화한 부성적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신성에서 권위적 부성을 소거시킨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의미의 효과가 발생한 듯하다. 실제로 내가 아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특히 많은 여성들조차 아버지의 이런 이미지를 추억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에 그리 큰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 ‘아엠에프(IMF) 시대’와 더불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던 소설 《아버지》(1996)에서 보듯이 오늘날의 아버지는 분명 권위와 능력의 상징이라기보다는 나약하면서도 사려 깊은 따스한 배려자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 속물적 존재가 되기를 감수해야 하는 아버지의 현실적인 나약함을 안쓰러워하는 심정 이면엔, 이상화된 ‘(큰)아버지’에 대한 동경 혹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1990년대 이후의 한국의 소설들 속에 두드러진 화두의 하나가 바로 부성적 권위 부재의 가족에 관한 것이고, 여기서 많은 소설들에서 현존하지 않는 권위의 상징인 ‘큰아버지’(big-father), 이상화된 아버지가 갈구되고 있다 1는 점이 그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큰아버지를 향한 갈망은 때로는 불룩 튀어나온 배나 축 늘어진 어깨를 가진 모습이 아닌, 근육질의 액션영화 스타나 스포츠 스타에 대한 욕망으로 투사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카리스마적 영력이 돋보이는 어떤 종교 지도자에게로 투사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독재자를 갈구하는 욕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하느님 아버지”라는 호명은, 실은 하느님을 부르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앞에 자신을 출현시키는 신앙적 행위를 가리킨다. 요컨대 신의 부름 앞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엔 ‘부름-응답’이라는 관계의 도식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응답의 첫 구절에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무수히 뇌까린다. 여기서 그 관계가 구체화된다. 다시 말하면 신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정체성이 이러한 무수히 반복적으로 응답하는 중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아버지”라는 무심코 부르는 기도 속에서 우리는, 의도하지 않는 가운데, 우리 안에 절대적인 존재, 모든 것을 다 알고,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전능자를 향한 욕망을 품은 존재로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하느님을 가르쳐준 것일까? 2
두 번째 문제제기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하늘’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며, 그곳은 ‘땅’과 대립된다는 우주관을 함축하고 있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물론 이때 ‘땅’은 인간이 살고 있는 공간을 상징한다. 여기서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단절적으로 보는 공간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기실 유대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표절한 것인데, 이에 의하면 두 단절된 공간 사이엔 영원의 거리가 가로놓여 있다. 누구도 둘 사이를 넘나드는 것이 절대 불가하다. 이러한 공간 인식하에선 단절된 공간들 간의 교신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곧 삶의 절박한 과제를 표현하는 신앙적 언표로 자리잡게 된다. 성서는 다양한 유형의 중계자들을, 바로 영원의 거리를 뛰어넘어 인간 세계의 삶에 개입하는 신의 사자(使者)들로 묘사하고 있다.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중계자의 한 유형인데, 다른 중계자들이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반면, 메시아를 통한 개입은 결정적이고 전면적이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메시아사상의 계보 위에 서 있는 존재다. 단 예수 담론의 특이성은, 다른 중계자들 혹은 다른 메시아들과는 달리, 그 자신이 메시아를 파송한 이, 곧 신이라는 데 있다.
신 자신이 중계자라는 건, 신이 인간이 된다는 건, 곧 ‘신의 자기 부정’을 의미한다. 더욱이 육화된 신이 왕이나 현자의 모습이 아니라 더 없이 비참한 몰골의 사람이요 더 없이 사나운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신의 자기 해체가 가히 전복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수 담론은, 신이 자신을 전면 부정함으로써 메시아적 역할, 곧 교신의 통로를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주기도의 이원론적 세계관에는 (단순한 표절이 아니라) 엄청난 변화를 상징하는 중차대한 재해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의 공간, 거룩을 독점해온 공간, 바로 그것이 전면 부정되고 있음을 본다. 이제 신은 ‘하늘’이라는 인간적 영역과 단절된 곳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공간 속에,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인간의 치졸함과 사악함이 있듯이 동시에 이 속에서 신의 형상을 닮은 거룩, 즉 자기 초월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서 시작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염원했던 새로운 신앙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너무나 놀라운 사상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놀라운 사상을 담을 만한 그릇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나 동시대의 많은 추종자들은 여전히 어려서부터 자신의 존재를 온통 지배해온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표상하고 있는 인식 세계 속에 살고 있었다. 인습적 가치를 전복시키는 새로운 사상을 꿈꾸고 있으나 여전히 낡은 언어 속에 갇혀 있다. 이러한 ‘언어의 감옥’ 속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문이 탄생한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의식할 수 있는 한에서는 인습적 가치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낡은 언어 속에서 많은 것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이야기해야 했을 것이며, 그것을 듣는 청중 또한 마찬가지로 이 기도를 그러한 인식의 한계 속에서 기억했으리라.
전승 과정에서 아람어로 발설되었을 기도문이 헬라어로 옮겨졌고, 또 우리말로 옮겨졌다. 번역은 단순한 말의 옮김이 아니다. 여기에는 ‘말씀 하나하나는 성령의 영감이 깃들어 있으니 일점일획도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축자영감설적인 터무니없는 주장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성령의 영감이 문자의 본질주의적 의미 고정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건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언어에 어떤 원형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말의 통제를 열망하는 파시스트적 욕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번역 행위는 예수를 번역자의 동시대로 재현시키는 과정이며, 그러한 재현 자체가 이미 번역하는 이들의 신앙 행위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주기도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혹은 주기도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인간의 타자인 신이여, 권세와 영광을 영원히 독점하소서!
주기도문의 번역을 주도해온 장소는 교회다. 고대 로마제국 시대 이래 교회는 줄곧 그리스도인의 유일무이한 존재 양식을 결정하는 곳임을 자임해왔다. 적어도 교회는 그렇게 주장해왔으며, 이것이 그리스도교 사상의 보편적이고 절대적 가치임을 주장해 왔던 것이다. 근대로 이행하면서 세속 권력과 교권이 상호불가침 신사협약을 맺은 이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적어도 교회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여전히 배타주의적인 패권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하이데거 철학과의 간략한 비교를 통해서 근대적 신학의 형성 원리를 살펴봄으로써, 교회가 근대적인 자기 정당화 논리를 어떤 형태로 세공했으며, 그러한 미화된 이미지 이면에 숨겨진 신학과 교회의 파시스트적 욕구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로서 세속 권력과의 공모 양상을 들춰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주기도문의 교회적 번역에 내포되어 있는 권력의 음모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인류 문명의 전개 속에서 존재 망각의 음울한 역사를 본다. 특히 근대의 기술주의 문명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틀/공작(Gestell) 속에서 존재 망각의 역사는 극한에 달했다고 보면서, 이것을 인간의 본향 상실의 위기로서 이해한다. 그는 아마도 나치즘에 동화됐던 자신의 과거를 염두에 두면서, 허위 유토피아주의인 ‘기술의 형이상학’을 파시즘의 유혹으로 보았다. 3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문명사회 한 가운데 존재하는, 그러나 기술문명의 침탈로부터 제외된 원시림적 공간을 상징하는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속으로 운둔함으로써, 이러한 단순한 전도(顚倒)를 통해서 존재의 위기를 넘어서고자 했다. 전도된 이 반(反)기술의 공간에서 인간 존재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의 영적인 교합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4
흥미롭게도 교회는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묘약을 발견했다. 요컨대 존재의 본향을 상실한 문명의 공간인 근대사회 한 가운데서 교회라는 반근대적 공간을 유지함으로써 자기 존립의 비법을 창안해낸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인구가 밀집된 공간에 자리잡는다. 또한 교회는 근대적 기술문명의 이기를 적극적으로/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반근대적 가치로 구성된 폐쇄적 담론공동체로서 자기를 재생산한다. 축자영감에 대한 절대적 신봉, 반문명적인 영성적 열광주의, 성직자 권위의 전근대적 가부장주의, 확대된 가족주의로서의 교회의 폐쇄적 공동체주의 등, 한결같이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힘을 추구하는 반근대적 가치를 통해 교회는 근대사회 속에서 존립하는 반근대적 공간이 된 것이다. 요컨대 교회는 근대사회 속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근대사회의 문명적 성과를 무비판적이고 임의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방주라는, 폐쇄적인 신앙적 게토로서 반근대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전근대적 신화가 사라져버린 근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교회가 건장하게 생존하는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즉 점차 급가속하는 근대적 문명의 질주 속에서, 모든 것이 생겼다가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존재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근대적 인간을 향해, 변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인간에게, 교회는 태고 또는 영원에 정향된 탈시간적이고 탈역사적인 불변하는 절대 가치를 판매하는 의미의 시장이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교회는 근대적 문명의 이기를 편이에 따라 임의로 활용하면서도, 진공포장된 탈세적 절대성이라는 페스트푸드적 종교상품을 발명해내는 놀라운 창조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하이데거는 근대문명의 파시즘적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문명주의적 자연주의로의 전회라는 전략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논리는 인간의 주체가 역사-정치적인 ‘의지의 형이상학’으로부터 후퇴하고, 5 ‘존재의 부름과 인간 현존재의 응답’이라는 탈역사적이고 탈정치적인 존재론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진입함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주체 형성이 역사의 무대 밖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반역사적인 후퇴가 결과적으로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주체 형성적 사건들에 무관심하고, 나아가 역사 전개에 순응적인 주체를 위해 봉사하는 철학을 낳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6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학은 어떠한가? 여기서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한동안 신학의 지배적 담론의 자리를 지켜왔던 (그리고 아직까지도 한국의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현대신학의 대체어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는) 신정통주의 신학에 주목해 보자. 이 조류는 교회 밖으로의 엑소더스/대탈주를 감행했던 자유주의적 신학에 대한 반제로서 교회로의 회군을 부르짖으며 신학사상사의 무대 위에 등장했다. 구체적으로 신정통주의 신학은 나치즘으로 실현됐던 인간주의적인 파시즘적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 절대타자를 향하는 탈역사적 신앙을 향한 여행 도정에 올랐다.
절대타자라고 했다. 이 말은 ‘신이 인간이 됐다’는 수사가 야훼신앙사의 결정적 전환점이라는 초기 그리스도교적 문제제기를 사실상 무효화시킨다. 왜냐하면 신과 인간 사이에는 다시 ‘영원의 늪’이 가로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전능자적 신의 이름에 예수라는 이름이 부가된 것이 다를 뿐이다. 단지 이름의 차이! 그리하여 신과 인간 사이에는, 아니 (결정적인 중계자로 등장하였으나 이제 다시 ‘하늘’ 저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린) 예수와 인간 사이에는 또 다시 중계자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역할을 교회가 자임하게 된 것이다. 즉 교회는 영원히 이질적인 이원론적 두 가치, 변화하는 것과 영원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중계하는 독점적 권위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속과는 분리된 교회, 세속과는 분리된 성직자, 세속과는 분리된 정전(canon) 등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담론은 더욱 견고한 담론적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여기서 교회는 수직적인 위계구조를 가진 근대의 파시즘적 영역으로 자리잡는다.
한편 교회의 중계는 위의 이원론적 두 유형의 가치에서,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향한 전회로의 ‘강력한 부름’/협박을 의미한다. 그런데 교회의 중계자적 소임은 바로 여기서 정지하고 만다. 즉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중계만을 교회는 실현할 수 있다. 거룩은 타자적인 신의 영역으로 귀환해버렸고, 역사의 시간 외부의 궁극의 시간 속으로 그것의 실현이 유예되었다. 또한 그것을 중계한 존재라는 예수조차 그 중계 행위를 재림이라는 궁극의 시간에로 지연시키고 말았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이것을 선포하고, 수용자들에게 회개를 요청하는 것뿐.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의 주장은, 그 탈역사를 향한 전회는 역설적이게도 역사 내적인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강하게 담게 된다. 즉 변혁에 대한 꿈은 영원 속으로 묻혀버렸고, 그리하여 현실의 초월을 향한 변혁적 갈망에 대해 교회는 회의주의를 유포했다. 반면 현존하는 일상적 인식틀을 구성하는 지배적 가치에 대해서 교회의 신앙은 전투적인 수구주의적 양상을 띠게 된다. 낙태, 동성애, 전쟁, 인종, 이념 등 20세기 인류의 화두였던 여러 문제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태도를 보라. 결국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와 같이 단순히 전도시킨 신정통주의적 전복의 전략은 현상적 체제 유지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강력히 담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탈역사적 가치에서 역사로의 파견을 다양하게 실행하는 교회의 역사 참여의 순간에조차도 말이다. 그리하여 근대성의 전 지구적인 발현이 낳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안, 그 본향 상실의 위기감은,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블랙박스를 통과하자 무해한 것으로 세속사회에 되돌려진다. 이렇게 신정통주의 신학과 근대의 교회는 세속적 공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시대에, 세속 권력과의 공존의 묘법을 터득하였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현실이 존재 망각의 역사 도정의 절정에 있다 하더라도, 비록 세계체제가 존재의 본향을 빼앗아가 자신들을 정처 없이 세계를 부유하게 하는 유랑자로 전락시켜버렸다 하더라도, 신앙적 게토 속으로 들어가 ‘탈세적 절대성’이라는 신앙적 의미를 소비함으로써 ‘억압’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이상한 ‘용기’를 가진 자가 된다. 그리하여 예배의식용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께 영원히!”라는 고백은 ‘인간의 타자인 신이여, 권세와 영광을 (영원의 미래의 때에) 독점하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속에는 ‘그때가 도래하기 전까지 현존하는 모든 권력, 모든 파시즘이여 마음껏 착취하라. 내가 감내하리라.’는 탈세적 신앙이 생략되어 있다.
탄탈로스와 아브라함, 교회의 선택?
그리스신화의 탄탈로스 이야기와 성서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공히 아들을 살해하는 비정한 부성(父性)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서 아들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의 동기는 전혀 다르다. 탄탈로스의 아들 살해는 신의 영역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그리고 인간의 영역으로는 결코 되돌아올 수 없다는 욕구의 표현이다. 반면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자신의 상승 욕구의 근거를 절단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두 이야기는 상승 욕구에 직면한 삶의 두 가지 선택을 보여준다. 나는 탄탈로스의 선택을 ‘상승주의적 가학성’의 관점에서, 그리고 아브라함의 선택을 ‘하강주의적 피학성’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과 인간, 예수와 인간 사이의 중계자임을 자임한 교회는 과연 어느 길을 선택했는가? 앞서 보았듯이 교회는, ‘하늘’과 ‘땅’이라는 접견 불가능한 이질적 공간관을 전제하면서, 세속으로부터 변별된 ‘의사’하늘(quasi-heaven)의 지위를 누리고자 했다. 즉 양자를 매개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땅’과 차별화된 자신의 과시를 통해서 수행코자 했다. 성서의 정전성(canonicity) 주장은 계시, 아니 신-인 대면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억제하면서까지 진리를 향한 접근로를 일원화하고자 했던 교회의 신경질적 독점 욕구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이단을 분별해내기 위한 장치로서 고안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단을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골치 아픈 신앙적 이견들을 손쉽게 정리하기 위해, 그래서 단순 명쾌한 신조 공동체(creed community) 7를 만듦으로써 유일신인 하느님과 좀더 쉽게 대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회는 제물로 바칠 아들을 색출했다. 그들이 바로 이단인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수퍼에고-파시즘’에 몰두해 있음을 보여준다. 8 즉 자기 자신을 규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병적인 집착에서 죄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의해 죄인(이단)을 생산하고 배제해야만 하는 권력 욕구가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탄탈로스의 길을 선택한 그리스도교회의 ‘상승주의적 가학성’은 우리의 신앙 속에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타인, 타종교, 타문화에 대한 과도한 배제주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더욱이 자신이 강자인 경우 폭력을 결코 삼가지 않는 종교로서 정평이 나 있다. 이 모든 것이 자신만이 거룩과 대면하고 자신만이 거룩을 체험하려는 상승욕구와 관련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비단 이러한 욕구는 자기 외부의 타자에게만 향하고 있지 않다. 제사상 앞에서 몸부림하는 그리스도교인의 모습에서 보듯, 그것은 자기 내부의 타자에 대해서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표현에 따르면 전자는 ‘미시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슈퍼에고-파시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9 요컨대 교회의 담론은 그리스도인들을 파시스트로 만들어내는 종교적 장치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교회의 발생 초기부터 비롯된 것이며, 근대사회에 이르러서 그 양태는 변모했을지라도 상승주의적 가학성의 종교라는 차원에선 전혀 변한 것이 없다.
탄탈로스와 아브라함, 예수의 선택?
이제 우리는 교회 이전, 즉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는 어떠했는지를 물을 차례다. 예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분명한 신학적 언술은 ‘성육신’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이미 서두에서 보았듯이 ‘신의 자기 비하/부정’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아주 초기부터 전승자들의 예수에 관한 가장 확실하고 가장 핵심적인 이해는 그가 기존의 인습적인 신성에 대해 발본적인 도전을 가했다는 것이다. 유대 사회가 야훼종교 공동체라는 점을 참조한다면, 즉 유대의 모든 사람들을 내적으로 통합시키는 가치의 준거가 인습적으로 이해되고 있던 야훼의 신성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예수가 그러한 인습적 신상에 대해 근원적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투쟁 대상이 로마의 식민주의를 포함한 물리적인 억압적 제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규제하고 있던 일체의 권력이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10 예수의 행태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라고 알려진 비유나 기적은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미시권력과의 대결을 보여주고 있다. 11
그런데 예수의 이러한 실천은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이지만, 그것이 썩으면 엄청난 열매를 맺게될 것이다.” “누구든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들은 타자를 지배하려는 권력(욕구)과의 투쟁이 자기 자신까지도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승리의 열매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겠다는 의지가 이 주장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를 승계한 여러 예수운동들은 그의 죽음 위에서 출발했다. 요컨대 예수운동의 에토스는 ‘하강주의적 피학성’에 정초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의 해체와 예수의 복원
여러 유형의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교적 경로의 특징은, 아브라함의 길을 따랐던 예수를 탄탈로스적 길로 대체한 데 있다. 교회의 담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유목민적 삶의 도정에 들어섰던 그의 삶의 이야기가 소유에 기반을 둔 정착민의 이야기로 번역되어 재현된 것이다. 하강주의적 신학은 상승주의로 재해석되었고, 피학성은 배제주의적 가학성으로 변형되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교회적 발전이 예수운동의 승계에 있어서 실패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탈권력을 향한 반파시즘적 신앙이 교회에 의해 파시즘적 권력 욕구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승리주의에 집착한 결과다. 즉 자신에게 허용된 공간을 항상 정복의 영역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시대가 변하고 체제가 바뀌어도 언제나 굳건히 살아남는 질긴 생명력의 종교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모든 지배권력과 너무나 잘 동맹을 맺는 종교로 존속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지배자의 종교로서 안성맞춤인 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실패했다.
만약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실패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교회 속에 예수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의 그림자를 교회의 신앙 속에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가 육화된 신이라는 ‘신 죽음’의 선포처럼, 교회의 죽음 또한 선포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의 정전적 권위, 성직자의 권위, 그리고 교회의 권위가 모두 그 독점적 지위를 포기할 때 가능해진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승리주의를 넘는 승리가, 죽음을 넘는 부활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즉 자기 초월의 사건이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주기도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우리와 함께 계신 님이시여”라고 고쳐 고백하고자 한다. 하늘과 땅의 이분법을 해체하고자 함이다. 성과 속의 이분법에 대항하고자 함이다.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을 해체하고자 함이다. 그리할 때,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라는 다음 구절은 진정한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거룩은 바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우리를 초월하는 사건 속에서 일어난다고. 승리주의를 넘어서, 예수의 죽음의 그림자를 우리 몸에 새기며 살아갈 때 자기 초월의 사건을 전유할 수 있다고. 12 □
- 《문학동네》 16(1998 가을)의 특집 원고들인 서경석, 〈가족을 향한 상상력의 양상〉; 임옥희, 〈우리 시대의 아버지의 우화〉; 황국명, 〈아버지 이야기의 역설〉 등 참조. [본문으로]
- 이 말은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을 예수가 실제로 사용했느냐 아니냐는 물음이 아니다. 현재까지 신약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기도의 “우리 아버지”(pater hēmōn)는 예수의 입에서 발설된 그대로인 반면, “하늘에 계신”(en tois ouranois)은 거의 예수 자신의 말일 가능성이 없다는 데 학자들의 의견이 합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 말의 확실성(authenticity)’ 논의는 예수의 역사성 물음을 개체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인식론적 전제를 갖는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역사적 물음에서 주변 사람들과 그 맥락을 역사적 재구성의 부차적 요소로 후퇴시키고, 진정한 예수 말이 어떤 것인가,를 최우선의 과제로 설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권력적인 인습적 가치체계에 대한 발본적인 도전자인 예수조차도 시대의 인습적 언어의 감옥 속에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의 ‘인식론적 단절’을 예수 말의 확실성 물음에서 묻지 않는 이러한 연구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면 민중신학은 사건 속에서 예수운동의 역사성을 묻고자 한다. 그것은 시공간적 맥락 속에서 예수 사건의 유의미성을 물으며, 그런 점에서 주기도의 구절들에 대한 우리의 재현은 이러한 유의미성 물음과 연관된 해석을 필요로 한다. [본문으로]
- M. Heidegger, 박휘근 옮김, 《형이상학 입문》(서울: 문예출판사, 1994) 참조. [본문으로]
- 이것은 이미 그의 초기 저작이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존재와 시간》의 배려/관계맺음(Versorgen)이라는 개념으로 제기된 바 있다. [본문으로]
- 하이데거는 서구의 형이상학의 역사가 니체 철학에서 완성된다고 보면서, 그것을 인간주의적 ‘의지의 형이상학’으로 정리한다. 강학순, 〈후기 하이데거의 해석학 고찰〉, 《생활세계의 현상학과 해석학》(서울: 서광사, 1991) 참조. [본문으로]
- 하버마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서울: 문예출판사, 1995), 제6장, 특히 195쪽 참조. [본문으로]
- ‘가톨릭’이라는 말은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라는 함의를 가진다. 1세기 말엽 이미 시작된 초기 가톨릭주의는 다양한 예수운동의 계보들, 그리고 그 양상들 간의 불협화음을 통합하여 단일대오의 공동체로 만들려는 편집증적 욕구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편집증적 통일의 주요 장치가 바로 정전화, 성직자주의 등이었다. [본문으로]
- ‘슈퍼에고-파시즘’은 슈퍼에고의 에고에 대한 규율이 마치 강박증처럼 존재 내부의 파시즘적 억압을 야기시키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대하여는 가타리(Félix Guattari), 〈파시즘의 미시정치〉,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엮음,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서울: 푸른숲, 1997) 참조. [본문으로]
- 가타리, 같은 글 참조. [본문으로]
- 신성에 대한 도전을 통해서 이와 같이 삶의 규율 장치 자체를 문제시했다는 점에서, 비록 구체적 맥락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19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활발하게 일어났던 ‘사신(死神) 신학’이나 1970년대 이후 한국을 배경으로 하여 민중 메시아론의 형태로 제기된 민중신학은 예수와 동일한 지향을 갖는다. [본문으로]
- 예수의 비유와 기적에 관하여는 김진호, 《예수 역사학》, 48~53 및 제7장 참조. [본문으로]
- 내가 목사로 재직하고 있는 한백교회는 주기도문을 다시 쓰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러 사람들이 예배 중에, 혹은 사석에서, 그리고 홈페이지 상에서 서로 의견을 내놓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주기도문의 현대적 재현이라는 주장은 목사와 신학연구자들의 전위적 주장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과연 교회 일반 신도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목회자는 가르치는 자라기보다는 교인들의 자유로운 신앙고백을, 그러한 문제제기를 방해하는 존재다. 만약 목회자가 독백적인 말하기를 그치고, 교회의 파시즘적 규율 장치 때문에 막힌 대중의 말문을 열어 놓는다면, 훨씬 창조적이고 훨씬 자유로운 주장이 교회의 신도들에 의해 주장될 것이다. 목회자는 한 사람의 토론 참여자로서 공론에 참여하며, 지도자로서 그 공론 과정이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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