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람됨의 신한] (2002)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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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제국, 탈신학, 탈교회
한국사회에의 급진적 신학하기에 관한 하나의 단상
글을 시작하며
한국에서 급진적 신학을 한다면, 그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바로 이해했다면, 잡지 기획자는 내게 이것을 주문하였다. 난감한 주제다. 무엇보다도 대답이 난해하기 때문이고, 이렇게 커다란 의제와 씨름한 기억이 좀 멀기 때문이다. 잠시 멈추었던 생각을 다시 하기 위해 몇 년 전 내 글을 몇 편 읽어보았고, 관련될 성싶은 다른 분의 글 두어 편도 보았다. 또 ‘당대성’에 관련한 최근의 한국 지식사회의 동향을 점검해보기 위해 책 몇 권을 뒤적거렸다. 무엇보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예전과는 다소 달라진 ‘지금 여기’의 나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주제와 연관시킬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결국 이 글에서 담아내야 할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날 때마다 낙서하듯 메모해 두었던 종이쪼가리 너닷 장을 모니터 옆 벽면에 가지런히 붙여놓았다. 이제 쓸 준비는 되었다.
주문받는 주제에서, 핵심어는 다음 세 가지다. ‘한국에서’, ‘급진적 신학’ 그리고 ‘어떻게’. 나는 이 핵심어를 순서대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내 나름의 생각을 늘어놓고자 한다. 한데, 다시 얘기하지만, 각 항목마다 엄청난 논의가 필요한 작업이다. 선행 연구가 있다면 축약해서 이야기할 실마리라도 있겠지만, 나의 지식이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직접적인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기획자의 문제제기는 퍽 훌륭하지만, 나로선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다. 아니 실은 자신이 없다. 당연한 말로 변명을 한다면, 결국 할 수 있는 말만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모하리만큼 비약이 불가피하다. 아무튼 일종의 주제에 관한 단상 정도임을 고백한다.
‘한국적’
‘한국적’이라는 용어는 신학계에서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민중신학은 이 용어와 관련해서 상반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한편에서 보수주의적 신학은 민중신학이 강조하는 ‘한국적’이라는 것이 신학의 핵심적 구성요소가 될 수는 없다는 비판을 가했다. 다른 한편에서 이른바 ‘토착화신학’은 민중신학이 우리 전례의 (전통)문화를 신학의 매개변수로 설정하는 데 소흘함으로써 한국적 신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하였다고 문제제기하였다.
보수주의적 신학과 토착화신학은 신학의 내용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장소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관해서 극단의 반대 입장을 펴고 있다. 전자는 장소성을 신학의 외재적 요소로 보는 반면, 토착화신학은 내재적 요소로 신학에 관여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데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상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두 관점은 동일한 인식론적 지반을 갖는다. 즉 장소성이 고정된 것이라는 관점이 그것이다. 이것은 실재와 현상이라는 이분법을 기초로 하고 있고, 여기서 실재는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주의’적이다. 반면 민중신학은 ‘당대성’(contemporarity)을 신학 형성의 핵심 요소로 본다는 점에서 본질주의와는 근원적으로 관점을 달리한다.
장소성을 구체화할 때 우리는 ‘사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때 ‘사회’라는 개념은 독자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항상 한국-사회, 지역-사회, 학교-사회, 직장-사회 등등, ‘하이픈’(-)에 의해 연결됨으로써 그 의미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라는 용어가 들어감으로써 장소성은 ‘담론적 분석’의 대상으로서 보다 유용한 지위를 얻는다. 그것은 ‘사회’라는 용어가 장소성을 다루는 학술사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라는 용어는 단순히 정의하기는 어려워도 두 가지 함축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공시적으로 다양한 공간적 구성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그것은 어떤 요소에 의한 결정론적 관점을 지양한다. ‘사회구성체’라는 용어는 사회를 결정론적으로 보려했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연구사적 노력을 보여준다. 한편 다른 하나는 통시적으로 다양한 시간적 구성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그것은 과거에서 미래에 이르는 단선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목적론적 관점을 지양한다. 이때 과거와 미래는 단수의 개념이 아니다. 여러 개의 과거 가운데 어느 특정한 것을 기억하려는 노력과 여러 개의 미래 가운데 어느 특정한 것을 전망하려는 노력은 현재를 특정하게 이해하려는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화’라는 용어는 사회를 목적론적으로 보려했던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연구사적 노력을 보여준다. 에른스트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사회’(society) 대신에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개념화한 것은 이와 같이 사회를 시공간적으로 과정적이며 비본질주의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우리의 원래 논의로 돌아와서 보자. 민중신학이 ‘당대성’을 신학 형성의 핵심적 요소로 본 것은 ‘한국적’인 것을 논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성과라고 본다. 요컨대 한국적인 신학을 모색하는 신학 운동은 본질주의를 넘어서, 당대적인 것을 신학하기에 어떻게 연계시키느냐에 핵심이 있다. 이번 장에서는 바로 이 당대성에 관한 나의 간략한 스케치를 하려 한다. 이미 말했듯이 여기에는 과도한 비약이 도처에 있다. 그럼에도 한국적 신학 모색에 관한 나의 제안을 구성하는 데 있어 이러한 스케치는 유용하게 활용될 것이다.
‘당대성’
2002 한일 월드컵은 우리의 ‘당대성’을 읽는데 있어 중요한 시금석이다. ‘Be the Reds!’라는 자극적 문구의 붉은 색 셔츠로 상징되는 한국의 거리응원에 전 세계가 놀랐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의 일체감의 표현이 너무나 획일적이었던 데 있다. 마치 북한의 ‘집단체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한국인들은 전 국민이 일상생활 속에서 이미 잘 훈련된 ‘하나의 집단’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전체주의적 색조를 띠고 있었다.
한데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이 현상에서 정반대의 경험을 하였다. 전 국민을 하나로 강력하게 결속시켰던 ‘붉은 색’ 기호는 오히려 수없이 많은 욕망들이 일시적으로 한데 얽히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요컨대 2002년 한국인에게서 ‘붉은 색’은 수 없이 많은 의미로 ‘흘러넘쳤고’, 결국 기의(signifié) 없는, 즉 ‘비어있는’ 기표(signifiant)였다.
서양인들에게는 ‘집단주의적’으로 보였던 그것이 우리에게는 다양성의 표현으로 인식되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이해가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에서 학교에서 그밖의 여러 사회 속에서 과도한 전체주의적 규율을 학습하면서 성장한다.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즉 전체주의를 내면화하지 못하면 부적응자로서 사회에서 배제의 대상이 된다. ‘반공규율사회’(조희연)니 ‘가국(家國) 체제’(이득재)니 하는 한국 근대에 대한 규정은 우리 사회의 ‘파놉티콘’(panopticon)이 어떤 기재를 통해서 사람들을 감시하고 규율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집단주의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비록 서양인들에게는 그것이 낯선 것으로 보였겠지만 말이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가치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체계다. 그것이 자발적인 희생이면 숭고한 것으로 칭송되며, 타율적이라면 필요악 정도로 치부되는 사회다. 이때 개인은 집단의 가치와 구성원리를 자신의 몸에 체현하는 존재로서 주체화된다. 그러므로 집단주의는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러운 것, 곧 자기 몸 외부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몸 일부로서 자각된다.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면, 집단주의는 우리들의 ‘육체적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002 한일 월드컵은 그런 우리에게 하나의 ‘낯선’ 전체주의를 보여주었다. 전체가 하나됨을 표현할 때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질서정연하게 줄서고 영도자의 구령에 맞추어 동일한 함성을 지르는 것과 같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2002년 대~한민국’은 그러한 집단주의적 코드로는 잘 읽혀지지 않는, 자발적이고 창조적이며 다양성이 돋보이는 모습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른바 집단에 대응하는 ‘개인’의 등장을 선언하는 무대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민정부 이래 국가주의에 의해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않는 대중의 등장이 두드러졌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국 근대의 기축을 이루어왔던 국가주의적 기재가 퇴행하고 있다는 징후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심 규범이 부재하게 됨에 따른 윤리적 아노미 상태를 야기했고, ‘시민적 대중’뿐 아니라 ‘천민적 대중’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1980년대 이후의 정치 과정은 국가주의에 의한 사회통합 능력이 쇠퇴함에 따른 집단의 분해로 이어졌고, 이것은 또 다른 집단주의를 향한 대중의 대대적인 이동을 낳았지만, 그 와중에서 개체화된 인간이 등장하는 정치적 맥락 또한 형성되고 있었다.
한편 1980년 이래의 경제 과정도 이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컬러TV에서 정보통신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일련의 기술사회적 전개 과정은 바야흐로 ‘시각’이 한국 근대성의 첨병으로 부각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하는 내수시장의 확대에 따른 소비자본주의적 흐름과 맞물리면서, 한국 자본주의의 탈근대적 차원에서 해석될 명료한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는 국가주의의 하위 범주로 전락해 있던 일상적 영역을 부상시켰고, 이에 이른바 ‘문화 담론’이 1990년대 이후를 풍미하게 되었다. 즉 문화는 일상적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담론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1980년대의 한국 사회의 흐름은 개인이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할 정치・경제・문화적 맥락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2 월드컵은 그것을 온 천하에 알리는 대중의 포고문이었다.
월드컵은 개체화된 한국의 수많은 대중을 ‘일체성의 국가주의적 광장’으로 동원하였다. 과도한 국가주의적 전체주의가 발현하였다. 그러나 대중은 감시자의 시선 때문에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발적인 현상이었다. 월드컵은 대중을 ‘전체주의적 광장’에로 나오도록 강요한 것이 아니라 유혹(seduction)한 것이다. 유혹의 매체는 축구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동네축구가 아니라 정보통신 네트워크 시스템을 통해 재현된 ‘지구적 축구’(global football)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지구적 축구’는 자본주의적으로 다양한 전 지구를 통합하고 동시에 국가주의에로 각개의 국민을 호명하는 담론적 효과를 동반하는 새로운 형태의 ‘거대담론’인 것이다.
지배적인 ‘지구화’(globlaization)의 양상은 지구적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를 결합한 ‘제국’(empire, 네그리)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한국은 1997년 이래의 IMF 관리체제를 겪으면서 이러한 새로운 제국 체제의 경제적 네트워크 권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단숨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을 겪으면서 또 다른 네트워크 권력인 FIFA에 의해 단숨에 문화적 네트워크 권력의 블랙홀 속으로의 위험한 여행을 시작하였다.
푸코(M. Foucault)가 근대적 규율의 장치를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감옥 설계도인 파놉티콘으로 묘사한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눈’에 의해 감시된다는 환영을 창조함으로써 사회의 통합이 실현되는 메커니즘으로 근대를 특성화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 푸코는 ‘통치성’(govermentality)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수정 보완했다. 그것은 통합의 장치가 감시라기보다는 유혹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즉 통치는 사람들의 욕망을 유혹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그가 근대성에 관한 문제의식을 근대 초기에서 자신의 당대로 옮겨감으로써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zer)가 푸코의 파놉티콘 사회를 포디즘적 자본주의 축적 체제에 적합한 모델로 보면서, 포스트포디즘적 축적 체제가 지배적인 오늘날에는 푸코를 재해석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녀는 푸코의 말기 개념인 통치성 문제를 보다 발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푸코의 통치성 개념이 지금 체제를 읽는 데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지구적 자본주의를 유념하고 있는 낸시 프레이저의 문제 제기를 신중히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2002 월드컵은 ‘유혹’하는 지배 담론이 작동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계기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욕망을 소비하게 하는, 그리하여 ‘죽도록 즐거워하면서’(닐 포스트먼) 권력에 자발적으로 순응하게 하는 메커니즘을 찾아내고 그것을 교란하는 지식의 생산이라는 차원에서 급진적 신학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급진적 신학’
‘급진적’이라는 용어는 항상 ‘무엇에 대해서’를 명시해야 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급진신학은 서구의 주류적 신학에 대한 해체주의적 비판의 태도를 지향하는 여러 신학 경향들을 총칭한다. 그런 점에서 제3세계신학‘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은 신학에 대한 해체주의적 태도가 제3세계의 정치적 실천과 무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신학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서구의 주류신학이 서구 근대성과 결합되면서 식민주의적 담론으로 자리잡아왔던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제3세계신학으로서의 급진적 신학을 모색하는 일은 비서구라는 장소성(‘한국적인 것’)과 급진성을 어떻게 동시적으로 사유하느냐의 문제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탈식민주의 담론은 한국에서 급진적 신학을 모색하는 우리에게 유용한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제3세계 국가들에서 대개 그렇듯이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 모방의 과정’이었다. 여기서 ‘서구’는 식민주의적 ‘실체로서의 서구’가 아니라 닮고 싶은 대상으로서의 서구, 즉 모방하고픈 ‘이념형으로서의 서구’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 ‘서구를 모방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이념형으로서의 서구’의 영토를 형성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는 우리의 선망의 대상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내적으로 서구에 ‘식민지화’되는 것이다. 요컨대 서구의 시선에서 우리 자신을 규율하게 되며, 한국 근대화라는 파놉티콘에서 ‘우리 안의 서구’는 ‘보이지 않는 감시자의 눈’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 그리스도교의 선교 역사가 이러한 식민화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선교 과정에서 이식된 하느님이 서구적 역사 경험 속에서 형성된 ‘파란 눈 뽀죽코’의 하느님이며, 신앙은 그러한 서구적 하느님의 시선에서 스스로를 규율하게 되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때 시선적 감시자인 서구적 하느님은 서구인과 묵시적으로 동일화되어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서구의 몇몇 나라들에서 제기한 음모론에 대해 우리가 과민 반응을 보인 것은 시선적 감시자에게 우리 자신이 이룩한 성과를 확인받고자 하는 인정 욕망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종교개혁이 신앙적 규율의 장소를 교회에서 삶 전체에로 확대하는 데로 이르게 되었으며, 삶 전체에 대한 이러한 신의 감시 아래에서 그리스도인은 금욕적인 윤리를 자발적으로 실천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의 내적 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근대화 과정에 있는 제3세계에서 그리스도교 선교는 이런 서구적 신앙을 식민주의적으로 재맥락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은 서구적 하느님의 시선, 곧 서구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탈주체화의 담론적 장치로써 작동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교 상황에서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의 급진신학은 ‘시선적 감시자로서의 하느님’을 세속화하는 전략을 추구하게 된다. ‘민중의 하느님’이라는 민중신학적 의제 혹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라는 종교신학적 의제는 바로 그러한 실례를 보여준다. 특히 ‘민중의 하느님’은 서구인의 시선에 의해 규율된 근대화로 인해 배제된 대중, 그리하여 탈주체화(de-subjectivation)된 대중을 신학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재주체화(re-subjectivation)하려는, 일종의 ‘정체성의 정치’를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지해야 하는 것은, 이때의 민중은 ‘대문자 민중’(Minjung)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근대화로 인한 사회적 배제가 국경 내부의 사건(시골에서 서울로의 ‘이주노동자’로 특성화되는)으로만 기억되던 상황을 반영한다.
한편 최근 한 재일(在日) 지식인이 민중신학의 민중에 ‘재일한국인’이 배제된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서경식). 그것은 민중신학의 담론 구조가 장소적 민족주의와 불가분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 몇 년 전 민중신학 내부에서도 ‘지구화’라는 변화된 당대성의 요인을 염두에 두면서 민중을 ‘소문자 민중’(minjung)으로 재개념화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비록 지구화 추세 이전이라고 해서 재일한국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님에도, 그 논제가 최근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민중신학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정보통신 네트워크가 ‘국경’의 규정력을 축소시킨 상황에서, ‘국민의 정부’가 ‘한민족공동체론’을 제기함으로써 전 지구적으로 흩어진 한민족을 네트워킹하려는 구상을 편 것은 국민에 영토성을 넘어선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던 상황을 반영한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것은 국적에 관한 법제 및 인식의 문제에서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가 더 이상 국경 내부에서의 이동에 그치지 않고 전 지구화되는 상황에서 ‘국적’에 의한 기득권을 모른 채하는 민중론은 비성찰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요컨대, 앞장에서 논한 바, 민중신학의 ‘당대성’이 지구화의 추세 속에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2 월드컵에서 단적으로 확인하게 된 변화의 요소는 ‘감시에서 유혹으로’라는 어구로 표상될 수 있다. 이제 지배체제는 감시보다 더욱 효과적인 통치의 수단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감시의 시선에 의해 욕망을 억제하는 탈주체화된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소비하는 주체를 필요로 한다. 앞서 말했듯이 2002 월드컵은 바로 이러한 주체로서의 개인의 등장을 역사적으로 선언하는 장이었다.
역사적으로 집단주의가 보다 약했던 서구사회에서는 1960년대에 이미 개인의 역사적 등장이 있었다. 그것은 소비자본주의가 훨씬 일찍 발전할 수 있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서구 급진신학의 발전 과정에서 이것은 중대한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근대성 담론과 행복한 만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역사적 등장이 아직 맹아적으로만 존재하던 무렵 막스 베버는 더 이상 자본주의는 금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자본주의는 시선적 감시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자신만의 영토를 구축하는 데 몰두했고, 그곳은 반지성주의적 신앙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주류신학은 현대의 지성사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반면 1960년대 이후 서구 지상사에서 일대 전환이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급진주의적 신학의 적어도 한 부류에서는 이런 교회의 경향과는 정반대로 변화하는 세계 한 가운데로 자신을 밀어넣었다. 이른바 세속성이 신학의 주제가 된 것이다. 이것은 성속 이분법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이제까지의 모든 신학적 노선과 급진적으로 단절하는 선택을 필요로 했다. 지구화의 가속성이 상상할 수 없이 급속화된 오늘날, 서구의 한 신학자는 오늘의 시대를 ‘탈그리스도교의 시대’(post-Christian era)라고 규정한다(로버트 펑크). 그것은 서구 신학의 전통적 노선으로부터 급진적인 단절을 통한 새로운 신학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서구에서의 이러한 변화가 그대로 답습되지는 않는다. 말했듯이 식민성이라는 요소가 한국이라는 장소성과 결합되어 서구적 근대화가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최근 교회는 한국 근대성으로부터 유리되고 있다. 오늘날 누구도 교회를 ‘모던한 장소’로서 기억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서구에서의 경우보다 훨씬 과격하게 ‘몰지성화’되고 있다. 그것은, 베버가 논한 근대적 하느님의 시선 대신 영성적인 근본주의적/원리주의적 하느님의 시선을 강조함으로써, 서구적 탈주체성을 넘어서려는 주체화 전략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원리주의가 서구에서 반주류적 공동체주의 운동에서 형성․발전된 것처럼, 한국에서도 이제까지의 서구의 지배적인 근대성으로부터의 거리두기로 선택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선민 담론’이나 ‘선교적 주체 의식’의 확산 현상은 한국 교회가 지구화 시대에 하나의 양식으로 주체화되고 있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서구 주류 신학으로부터의 급진주의적 이탈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탈식민주의적 급진주의 운동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운동은 일체의 신앙적 선택의 준거를 ‘근본/원리’에로 환원함으로써 ‘당대성’에 그다지 천착하지 않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반면 탈식민주의적인 급진신학은 ‘지금 여기’의 한국적 당대성을 신학하는 일(doing theology)의 핵심 준거로 이해한다.
앞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유혹하는’ 통치 메커니즘을 당대성의 주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것은 지구화된 사회에서 새로운 헤게모니 형태인 네트워크 권력을 축으로 하는 제국 체제의 통치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서 우리는 즐거워하면서 권력의 유혹에 말려들어, 이 체제가 구축하려는 세계에 자발적 공모자로서 개입한다. 이러한 공모는 많은 경우에 욕망을 소비하면서 즐기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다. 반민중적 제도는 우리 외부의 정치・경제적 기구의 작동 법칙인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우리 몸의 일부로서 구현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대중은 이렇게 규율된 욕망의 우주 속에 살고 있으며, 자신의 몸 자체가 그러한 욕망의 소우주인 것이다.
오늘날 급진적 신학은 바로 이러한 상황과 대면하려 한다. 신은 더 이상 교회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지구화된 세계의 권력의 화신인 파라오-신의 영토로 나가간다. 그곳에서 대중을 노예화하여 강제부역시키는 대신 유혹하여 체제의 공모자로 만드는 세상에서, 대중에게 그 체제의 반민중성을 폭로하려 한다. 그것은 ‘출애굽/탈주’하라는 선포이며, 자본주의적 기준으로 볼 때 불모의 땅인 광야로의 ‘유랑/순례’의 길로 대중을 초대하려 한다.
글을 맺으며: ‘어떻게’
한국 근대성의 형성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는 부정적으로 개입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한 번도 그 과오를 대중에게 속죄한 적이 없다. 그런 땅에서 ‘어떻게’ 신학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제는 다른 것을 말하겠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우리는 아직까지도 급진적 신학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뼈가 저리도록 절절한 속죄를 아직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라는 말은 신학하는 방법에 관한 논의일 수 없다. 그보다는 급진 신학을 하는 자세에 관한 말이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신앙적 주체로서의 자기 부정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본다. 나의 용어로 하면 그것은 ‘교회 해체의 신앙’이다. 한국 교회 역사 전체에 대한 모멸이며, 우리의 존재 정당성에 대한 부정이다.
만약 우리의 속죄가―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대중에 의해서 인정된다면, 그때 우리는, 우리의 몇 안 되는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로소 급진적 신학을 시작할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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