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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실수가 아름답다
어느 날 동네의 한 초등학교 담이 헐렸다. 예비군과 민방위대의 비상소집 장소였던 그 ‘친숙한’ 장소는, 그러나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른 이유로는 방문할 일이 없는 ‘낯선’ 곳이었다.
담이 헐린 그 자리엔 화단이 가꾸어졌다. 교문은 그대로 있었지만, 화단 사이사이에 동네와 통하는 길들이 생겼고 그 근처엔 여러 모양의 벤치가 놓였다. 철봉이 있는 모래사장엔, 아이들이 쓸 것 같지 않은 제법 높은 평행봉도 설치됐다. 그리고 몇 곳에 수돗가가 새로 만들어졌다. 무엇보다도 내 눈을 끈 것은 ‘미끄럼틀’이다. 계단과 미끄럼대 외에, 오르막과 내리막의 구분을 해체하려는 듯, 쇠그물 같기도 하고 사다리 같기도 한 발걸이들이 둘레를 덮고 있는 전혀 새로운 이미지의 시설물이다.
이제 집에서 퍽 가까운 곳에 나의 쉼터가 생겼다. 늦은 새벽에 가끔 가벼운 산책이 필요할 땐 종종 이곳을 이용했다. 화단 사이를 오가고, 빈 운동장을 크게 돌고, 철봉대나 평균대에 매달려보기도 하고, 미끄럼틀의 이곳 저곳으로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고 있노라면, 수도꼭지에서 터지듯 뛰쳐나오는 거센 물 대포처럼 막혔던 글의 상상력이 펑 뚫리곤 했다.
문뜩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교문을 두고 수위아저씨와 머리싸움을 벌이던 시절, 그땐 학생이란 모름지기 교문을 하루에 한번씩만 통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외의 경우는 선생님의 도장이 찍힌 출입증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달아빠진 학생에 속하는 고등학생쯤 되면 평범한 아이들도 한두 번쯤은 월장을 감행하고, 조금 용감한 녀석은 좀더 일찍 경험한다. 더 간편한 방법이 강구되기도 한다. 이른바 ‘개구멍’의 발견이다. 그곳을 방위하는 선생님들이 잠시 허점을 보이는 순간, 자유의 탈주는 실행에 옮겨진다. 거의 일년 내내 허벅지에 새겨진 검은 멍자국은 자유를 위해 지불해야할 결코 싸지 않은 비용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학생들에게 화단 사이의 통로는 더 이상 장벽이 아니다. 문은 자유로운 출입을 막지만 길은 그것을 허용한다. 이 길은 동시에 막혔던 세대간의 소통의 공간이다. 월장은 범죄 의식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학생들의 모순된 자유였고, 어른들에겐 방종이었다. 이것은 세대간에 장벽처럼 가로놓인 대화의 간격을 의미하며, 또한 어른의 가치관에 규율된 학생에겐 내면에 가설된 장벽이었다. 그 장벽이 사라진 곳에서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의 꿈을 몸에 익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미끄럼틀도 아름다운 세상을 배우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오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며 또 내려가는 길도 하나가 아닌 세상을 이 새로운 미끄럼틀은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상상력을 실행에 옮긴이는 누구일까? 학교장? 아무튼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한데, 바쁜 일로 한동안 누리지 못했던 산책을 위해 그곳을 다시 찾아간 날, 나는 경악을 했다. 학교 운동장은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었다. 구정물이 고여있는 수돗가, 시멘트 찌꺼기가 달라붙듯 땟자국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벤치, 악취 나는 쓰레기통, 운동장 여기저기에 던져진 담배꽁초, 맥주깡통, 소주병...
이쯤 되면, 내가 칭송에 마지않던 이 작은 학교의 실험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낭만적 광경에 감동해서 가는 곳마다 이 학교 얘기를 떠벌리고 다녔던 나는 얼마나 순진한 사람이었을까? 또한 그러한 현실을 예측하지 못한 학교 당국 또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을 벌인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캄캄한 밤에 운동장 저편에서 뭔가 아른거린다. 다가가니 화단과 길 안팎을 뛰어다니며 노는 강아지 두 마리였다. 아마도 낮에는 아이들이 그렇게 뛰어다니겠지. 이 지저분한 곳에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는 하나의 벽이 허물어진 세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겠지. 장벽 뒤에 가려진 깨끗한 공간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지저분함이 그리 나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불연 듯 많은 것을 예측하지 못한 학교의 실수가 아름다워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발길은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잔잔한 기쁨으로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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