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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름다운 세상의 봄을 보고 싶다

이 글은 [월간 콩반죽] 2006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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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의 봄을 보고 싶다

 


언제부턴가 봄을 애절하게 그리는 일이 낯설다. 따뜻하게 자고 든든한 식사를 마치면 버스 정류장이나 전철역까지 가는 한 겨울의 길이 마치 봄날 산책 같기 때문이다. 밤새 서늘했던 사무실도 조금 지나면 약간은 후덥지근 하기까지 하니 강물도 언 영하 10도의 한파도 예전 같지 않다. 기온에 관한 수치(數値)와 그것을 체감하는 감각은 이렇게 서로 엇돌곤 한다. 겨울과 봄에 관한 지난 시절의 상상은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아이콘을 클릭한다. 대부분이 스팸인 메일을 검색하고, 빠르게 진짜가짜를 색출한다. 가짜는 여지없이 휴지통으로 날려 보낸다. 물론 가끔씩은 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도 버려진다.

포털사이트에서 뉴스를 읽는다. 고아 출신 남녀의 지하철 깜짝 결혼식이 연극이었단다. 유달리 선해 보였던 그네들의 눈망울이 연극지망생들의 연출의 효과였다. ‘착한 과학자황우석의 연기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던 몇 달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진짜가짜는 하루의 시작부터 끊임없이 나의 주변을 맴돈다.

한 때는 양성우의 시 겨울공화국을 읽으며 겨울의 상념이 형성됐다. 같은 제목의 싸르트르의 글이 말해주는 나치 치하의 프랑스는 곧 군부독재 하의 우리사회의 얼굴로 번안됐었다. 그때의 겨울은 민주주의를 향한 그리움이 절절한 기억의 시간이었다. 그때는 눈()에 얽힌 애틋한 추억들이 추방되었다. 대신, 조지 오웰의 1984처럼 이 기억이 간직하고자 했던 것은 전능한 독재자의 눈()의 잔인함이었다.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위반자에 대한 혹독한 처벌을 내리는 봄(시선)의 권력, 그것이 겨울공화국담론이 유포되던 시절의 진실이었다.

누군가는 이러한 오웰 식 1984의 사회를 일컬어 일방적 투명성의 사회라고 불렀다. 마치 경찰서 취조실에 설치된 거울, 항상 이미지를 반사하기만 하는 유리가 그 건너편 방에서는 취조실 안을 훤히 들여다보는 투명한 거울인 것처럼, 안을 감시하는 형사반장에게만 일방적 투명성이 확보되는 것과 같은 일방감시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실은, 그 시절 권력의 감시망은 그리 촘촘하지 않았다. 철저한 반공교육의 대상이었던 이른바 ‘386 세대가 그 얼마 뒤 반공주의에 대해 가장 비판적 담론을 생산해내는 주체가 되었으니 말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감시받는 자도 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다른 방식의 일방적 투명성으로 권력을 바라봤다. 양자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보는 것이 완벽하게 투명하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한데 위의 가짜 결혼식처럼, 착한 과학자의 사기처럼 오늘 우리는 완벽한 투명함의 상념이 교란되는 현상들을 매일매일 직면하며 살아간다. 더욱이 스팸이냐 진짜 메일이냐를 날마다 색출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진짜와 거짓은 날마다 확인을 요한다. 오인하면 때로 꽤나 불편한 상황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겨울이 겨울공화국으로 각인되지 않게 되면서, 겨울공화국의 지배자인 독재자는 추방되었다. 한때는 유일한 진실의 담지자였건만, 이젠 거짓의 총체처럼 기억된다. 하여 봄은 그리 애절한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봄은 그저 봄일 뿐이다.

오늘 우리는 겨울을 즐긴다. 겨울스포츠가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겨울 패션이 눈을 홀린다. 동전을 준비하지 않아도, 표를 사려고 길게 줄서서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버스와 전철은 우리를 품속으로 끌어안아 준다. 카드 한 장 속에 담긴 기억의 장치가 교통수단과 이용자를 신속하게 중개해주기 때문이다. 겨울은 견딜 만하다. 아니 겨울은 나름의 즐거움이 넘친다. 그리고 그 즐거움 속에서 우리는 겨울을 본다. 또한 내년의 겨울을 기다린다. 그러니 봄도 그리 애절하게 맞을 이유가 무엇이랴. 다만 봄()이 보여줄 즐거움만 향유하면 그뿐이다.

한데 겨울이든 봄이든, 내게 보이는 것들은 모두 나의 욕망으로 저장된다. 그리고 그 욕망은 나로 하여금 소비하게 한다.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또 욕망을 실현하라고 나를 유혹한다. 결국 겨울과 봄에 내가 보는 것은, 내게 보이고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나 자신인 셈이다. 물론 이때의 란 서선을 둘러싼 소비자본주의 문화에 의해 규정된 나일 게다.

그러니 이번 겨울에 단지 나는 나를 보았을 뿐이다. 혹은 나의 시선과 엮인 세계, (looking at)을 통해 나의 일부가 된 세계를 보았을 뿐이다. 거기에는 즐거움이 넘실거린다. 그리고 곧 맞이할 봄()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타자(the others)는 나의 시선에는 포착되지 않는다. 타자는 오늘 우리의 계절 감각에서 숨겨진 존재이며, 나는 그 존재를 망각하며 산다. 어떤 사상가가 말했듯이,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 퇴화된 시간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겨울과 봄의 시간인 것이다.

아름다운 재단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이런 눈의 퇴화된 감수성 때문에 숨겨진 이들의 세계일 것이다. 소비문화에 의해 나/우리와 엮인 세계와는 다른, 아니 그런 세계에 의해 허구로 추방된 다른 세계를 다시 나/우리와 엮이게 하는 것이겠다. 그렇게 재설정된 기억의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나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올해의 봄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