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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우리 내면의 악을 넘어서는 신앙의 언어, 예수의 평화

이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가 공동주관했고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 한백교회, 향린교회, 강남향린교회가 공동주최했으며, CBS 저널, 시민의신문, 뉴스앤조이가 후원했던 '평화포럼'(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 팍스크리스티아나)의 마지막 다섯 번째 강연(2003.5.16)의 원고이고, [주간기독교]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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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악을 넘어서는 신앙의 언어, 예수의 평화

 

 

21세기 들어 미국이 벌인 두 차례의 전쟁은 강력하게 정치 세력화한 미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신념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는 세계에서 악을 응징하고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예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또 이러한 미국 기독교의 영향권 아래 여전히 단단하게 붙잡혀 있는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하여 벌인 시청 집회도 평화에 대한 이와 유사한 신앙관에 기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이나 미국에서 지배적인 기독교 세력은 분명 나름의 방식대로 평화를 추구한다. 그들은 결코 전쟁에 광분하는 반평화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은 이러한 평화주의, 곧 악을 제거함으로써 실현된다는 평화주의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라, 모든 국가들이 추구하는 평화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니 가장 현실적이라는 평가는 아주 틀린 주장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평화는 반드시 전쟁을 동반하는 평화라는 점에 있다.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는 과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자신들은 선의 편이며 저들은 절대악이라는 신념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악에 포위된 채 요새에 갇혀 있다는 생각(포위된 요새 신드롬)은 스스로를, 어떤 구체적인 피해의 경험과 관계없이 자기 자신을 악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현실을 경직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세습적 피해자 의식). 그래서 이런 사고에 젖은 이들은 매일매일을 악과의 전쟁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그 극단의 상황에서 전쟁을, 즉 악을 소멸시키는 정의의 거룩한 전쟁을 기꺼이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찬송가나 성서에서 그러한 전쟁의 기억을 늘 되새기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강화되며, 그것은 악을 정복해 가는 과정으로 삶을 해석하는 군사주의적 가치를 자신의 몸에 새기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때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전쟁을 통한 평화라는 신념/신앙은 결코 져서는 안 되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끊임없이 현실의 강자와 타협하며, 국가 권력 나아가 전 지구적 권력과 타협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신앙은 국가 권력을 악의 징벌자로서 정당화하며, 지구적 권력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기재로서 작동하는 종교 장치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평화를 의미하는 신앙은 힘의 미학을 숭배하는 신앙인 것이다.

신이 전능자라는 인식은, 신이 할 수 없는 게 없으며 그 압도적 힘으로 악을 제거할 것이라는 인식은 바로 이러한 평화주의와 맞닿아 있다. 왜냐면 신은 물론 정의의 편일 것이기 때문이며, 또 필연적으로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패배하는 신이란 생각할 수 없는 불경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라고 물었던 나다나엘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참된 이스라엘 사람”, 율법에 충실히 사는 경건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의 생각이 가장 유대인다운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는 유대인의 모범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결코 메시아일 수 없는 자였다. 그래서 아비의 피가 섞이지 않은 자식이라고 하면서도 애써 다윗의 족보 속에 그를 넣으려 했던 넌센스가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메시아다운 명예 없이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신의 패배의 전조였다. 한편 복음서들의 예수의 마지막에 관한 묘사를 보면 그는 신의 철저한 침묵 속에 죽어갔다. 그가 그토록 축복을 베풀었던 대중도 외면했고, 목숨을 다해 함께 하겠다던 제자들도 외면했다. 그리고 신마저도 그를 위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 흔하디흔한 미래의 약속조차도 없이 그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악과의 전쟁에서 신은 무력했고 결국 패배했다. 부활은 신의 패배라는 소재를 반전시키지 않는다. 예수가 부활했음에도 여전히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있고, 모든 것이 악에 물들어 있다. 요컨대 부활은 승리의 노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패배 때문에 신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간직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 예수의 예루살렘을 향한 도정을 떠올려보자. 마가복음은 예수의 예루살렘으로의 행보에 제자들이 한편으로는 기대에 부푼 모습과 다른 한편으로 두려워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것을 설파하고 다녔던 그동안의 활동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제자들은 이제 뭔가 결정적인 일이 벌어질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예수가 진정 메시아였다면 그들은 더 이상 그 비루하기 짝이 없는 어부나 세리 따위가 아니라 한 순간에 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주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겐 더 없이 처절한 저주만이 돌아올 터... 이런 갈등은 제자들이 유대인인 한 어렸을 적부터 체득해왔던 메시아 인식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이며, 그렇기에 예수를 따라다니는 동안 줄곧 그들의 뇌리 속에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동요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명명백백 판명되는 순간은 기대되면서도 두려운 것이었다. 한데 이제 그것이 더 이상 유보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그런 제자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어린 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느님의 나라는 보잘것없는 이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인 아이들의 것이다’, ‘우리 조직의 일원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모두 우리의 동료다’, ‘첫째가 되려는 이는 꼴찌가 되어 모든 이를 섬겨야 한다등등의 말이 이 대목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 승자의 기대감에 부픈 이들에게 패자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평화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예수는 승리-정의, 패배-이라는 인식론적 논리틀이 무너지는 곳에서 평화의 도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떤 예수 연구자가 말한 역설적 반항이라는 말은 그것을 더 없이 잘 묘사하는 개념이다. ‘승리-정의, 패배-이라는 논리틀이 옳음 대(vs) 그름의 이항대립적 틀 속에서 그름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전쟁을 이야기하고, 그름을 상징하는 세력이 패배하고 배제되는 곳에서 평화를 이야기한다면, 예수는 옳고 그름의 틀 자체가 해체되는 곳을 염원하면서 평화를 말하고 있다. 옳고 그름의 인식틀은 무수한 죄인을 만들어내고 죄인에게 가혹한 세계의 질서를 구축하였다. 혁명은 그러한 질서를 전도시키는 사건이다. 즉 그름이 옳음이 되고 옳음이 그름이 되는 세상이 혁명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다른 것 같지만 또한 같은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한 편은 옳고 다른 한 편은 그르다는 것이다. 한 편은 많은 것을 얻고 다른 편은 많은 것을 잃는 체제다. 그런데 예수는 마땅히 얻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잃은 자들의 심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즉 옳고 그름, 빼앗고 빼앗기는 것이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평화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이후 교회가 배제의 대상이던 시절에서 제국의 새로운 주체로 부상하던 시절, 그 이행의 시대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한때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추종자라는 사실 때문에 가진 것을 다 몰수당하는 처지에 있었다. 한데 제국의 새로운 주체로 부상했을 때 주류 교회는 배제의 대상에게서 몰수한 갖가지 재화를 황제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좀더 후에는 빼앗는 주체가 되었다. 가장 비루한 데서 가장 숭고한 것을 보여준 예수의 미덕은 주류 교회의 이런 모습에서 은폐되고 왜곡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옳고 그름의 새로운 인식틀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은폐와 왜곡을 정당화했다.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가 보자. 예수는 악은 우리 밖의 아무개에게 부여된 저주의 징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의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정의의 사도라는 인식을 해체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정의를 위한 전쟁이란 아무런 명분이 없어진다. 악을 징벌한다는 평화관, 아니 그 전쟁관은 일상 속에서 증오심을 양산했으며 전쟁이라는 비일상의 상황에서 잔인무도한 학살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것은 우리 밖의 악을 제거하겠다는 주장 자체가 우리 내면의 악을 보여주는 것, 즉 악의 진부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내면의 악과 우리를 직면하게 함으로써 악의 진부화를 해체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의 평화의 실천은 이러한 내면의 악과의 투쟁을 통해서 선-악의 이분법적 인식틀을 넘어서는 세계를 향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의 평화는 힘 숭배 신앙과의 대결이며, 비루한 데서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인식의 질서에 대한 투쟁이고, 그러한 세계의 제도화를 향한 도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