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민중신학회 소식지인 《숨》(1998 봄)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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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원리를 찾아
INF 체제 하에서 민중신학적 실천 담론의 모색
매주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직업의 사람에겐 아마도 소재 찾기처럼 힘든 일은 없을 게다. 절기는 막연히 바다 속을 헤집어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지만, 그것도 몇 년 반복되면 마찬가지다. 그러나 올핸, 아무 걱정 없이(?) 신정 연휴와 설 연휴를 보냈다. 할 말이 넘쳐서 자제해야 할 지경이니 말이다. 이른바 ‘IMF 관리체제의 개막’이라는 현실 탓이다.
‘국민소득 천불 시대’니 OECD 가입이니 하면서, 얼마간 흥청대도 괜찮을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3윌(1997년) 금융대란설 같은 ‘유언비어’에 괘념치 않아도 되는 여유를 가진 줄 알았다. 민의 저항이 심화될 때마다 상습적으로 유포됐던 ‘경제 위기론’도 점점 고답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실제로 1980년대 말 이후 하락세를 보이던 한국경제가 1992년 이후 회복세로 돌아선다는 거시지표상의 낙관적 추이에 우리 모두는 퍽 고무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어이, 안이한 얼굴로 잠든 우리를 깨우기 위해 하늘은 회초리가 아닌 쇠방망이를 사용했다. 갑작스레 덮쳐온 재난의 폭풍을 아무런 준비 없이 맞았다. 다소 들떠 있던 우리 모두의 어깨는 곧 축 늘어져버렸다. 또한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는 어두운 표정이 우리의 자화상이 되어버렸다.
이럴 때 신학자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 시대의 하늘 뜻인 ‘희망의 원리’를 찾아, 그 신탁을 선포하는 것이다. 신앙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희망은 어떤 함의를 갖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과거를 반성하는 어떤 논거를 제시해 주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비전을 지향하게 하는가? 또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실천과 사고를 조직하게 하는가?
나의 사고의 출발점은 ‘분노’다. 이 정서를 가장 적절하게 묘사해 주는 것으로,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대중의 강간’이라는 어구 이상을 얘기할 수는 없을 게다. 이것은 그의 불후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후기’에 등장하는 표현인데(벤야민, 229 참조), 파시즘의 ‘정치의 미학화’를 비판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다. 그는 자신이 ‘기계복제시대’라고 명명한 현대 과학 문명의 불가피한 변화를 (특히 영화 같은 매체를 경유한) ‘대중문화의 등장’에서 본다. 비로소 (귀족이나 부르조아지가 아니라) ‘대중’이 문화의 주체가 된 것이다. 그는 이런 대중 문화의 매체를 ‘영화’에서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이제 ‘영화’라는 문화 매체는 (작가의 예술혼〈=아우라〉의 표현의 장이 아니라) ‘대중 정치’를 야기시키는 공간이 되었다. 이른바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가 대중의 정치에 의해 도래하리라는 믿음에 그는 고무된다. 그러나 그가 설정한 이러한 희망의 가능성은 역사에서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만다. 그가 본 것은 파시즘의 매체 조작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중의 욕망을 조작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왜곡된 욕망의 분출자로 만들고, 결국 대중을 역사의 위선적인 진보, 즉 ‘진보라는 이름의 질곡’에 공범자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벤야민은 바로 이것을 ‘대중의 강간’이라는 노기어린 표현으로 적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3~5공’까지의 정부는 대중을 정치로부터 배제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압적 권력 형태를 띠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폭발적으로 등장한 ‘대중의 정치’는 이런 유형의 권력이 한국에서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음을 입증했다. 이제 대중의 정치는 공식적인 활동무대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온갖 자극적인 매체 조작에 의해 규범을 상실한 대중의 무분별한 욕망 표출이 난무하는 시대의 서막이었다. 이것은 욕망 표현이 다양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된 것은 욕망이 ‘왜곡된 자아 중심주의’로 온통 물들어버렸다는 데 있다. 대중은 물욕에 찌든 투기꾼이 되어버렸고, 배타적인 집단주의(학연・지연・혈연 등)의 투사가 되어버렸다. 권력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매체조작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대중을, 대중의 욕망을 조작한 것이다(대중매체 연구자들에 의하면 한국 사회에서 ‘대중조작’이라는 권력 행위 유형이 계기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6공화국을 기점으로 한다; 이효성, 210 참조). 대중의 조작된 욕망의 무분별한 표출은 심각한 이기주의를 조장했다. 자신의 욕구 표출의 자유만이 신성하다고 여겨졌고, 자신의 집단주의가 보호되는 것만이 민주주의의 요체인 양 생각되었다.
대중은 권력에 의해, 권력의 욕망에 의해 ‘강간’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통 분균등 분배 체제’의 재등장이었다. 그 동안 최악의 복지제도를 가지고도 실업의 위기를 심각하게 체험하지 않았던 고성장 사회 신화는 한갓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수백만의 사람을 막막한 생존 위기의 나락에 던져버리려는 결정을 보면서도 그 선택의 불가피성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체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치 공동묘지에 세워진 팻말 같은 대중 사회의 슬픈 현실을 함축하는 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우리의 1998년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바로 ‘대중의 강간’에 대한 분노에서 말이다. 분노는 ‘비판’을 수반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희망의 원리를 찾고자 한다면, 비판은 그 주소를 잘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종종 비판은 대중을 강간한 자를 재강간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눈에는 눈’이라는 동태복수법적 강령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강령은 모순의 원흉에게 보복하기 위해 바로 그들의 논리를 모방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원수사랑 논변(〈마태복음〉 5,43~44)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를 짓부르는 지난 시대의 암울한 유산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자아 중심주의적인 배타주의적 욕망의 체제에 바로 우리가 공범이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받은 배제주의라는 세례는, 우리가 인식하든 않든, 이미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희망의 원리를 향한 비판을 수행하려면, 비판 주체인 ‘우리’에 대한 ‘단절’이 필요하다.
(벤야민의 동료이자 프랑크푸르트 학파 제1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아도르노(Th. W. Adorno)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 ‘개인의 말살’을 주장한다(아도르노, 92~94). 또 안병무는 ‘단’(斷)이라고 표현한다(안병무 1981, 184). 예수님은 이것을 ‘원수 사랑’이라는 명제로서 제시한다. 너희는 “......라고 들었지만, 나는 ......라고 말한다”라는 표현은 바로 청중을 지배하는 배제주의적 사고로부터의 ‘단’하라는 요청인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폭력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체제의 논리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그리고 이 단절의 대상은 원흉인 ‘아무게’만이 아니라 그것의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를 포함한다.
‘희망의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도대체 희망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는지를 탐문하겠다고 했다. 벤야민은 이 단절을 ‘메시아 사건적 종말’에서 찾았다. 이것은 탈배제주의가 실현될 그 결정적 사건이 일어날 궁극의 지점에 대한 소망이 바로 희망의 원리라는 주장이다. 안병무는 “당신이 가장 그리운 얼굴이 누구입니까?”라는 박성준의 질문에 뜸금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폭동’을 그리워해요. ‘민중봉기를!’ 이 그리움, 오래됐어요. … 내게는 제일 보고 싶고 그리운 게 그거예요. 종말론적인 환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이 완전히 한 번 바뀌는 그런 개벽이 그립지, 개인의 얼굴 따위 뭐 그리 그립겠소”(안병무・박성준). 벤야민과 안병무, 이 두 사람은 모두 종말을 갈망하는 현재의 소망, 그 소망을 갖고 사는 현재의 삶 속에, 바로 그러한 실천 속에서 ‘희망의 원리’를 찾고 있다. 아도르노는 비록 종말론을 명시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지만, 현실에서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는 배제주의에 대해 ‘끝없이 부정’하는 비판을 말하면서, 거기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다(아도르노, 279). 이 세 분들은 모두,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심지어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는 배제주의에 결코 타협하지 않는 비판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류하고 있다. 그리고 안병무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이 비판의 자세를 ‘공’(公)이라고 말한다(안병무 1986).
이제까지 나는 배제주의에 대한 끝없는 비판의 자세 속에서 희망의 원리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결코 안착지를 쉽게 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탈배제주의적인 실천의 성과물을 역사 속에, 그리고 우리 삶 속에 구체화해야 한다. 바로 화해/평화의 제도, 화해의 품성을 잠정적으로라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민족적인 실업의 위기를 맞으면서 나는 ‘복지사회’라는 문제를 떠올렸다. 필시 1998년의 민중신학의 탈배제주의적 실천 담론은, 적어도 그 일부는, 여기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배제당한 자에 대한 단순한 구휼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우리 사회 속에 재통합하는, 냉혹한 세계 체제의 배제주의의 희생양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는 정신이 담긴 잠정적인 역사적 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재통합 프로그램으로서의 ‘사회복지’관은, 날로 지구화되어 가는 세계경제(Global Economy) 속에서 자칫 냉혹한 기술 중심주의적 사고에만 몰입되어 불균등 세계경제 메커니즘에 여과장치 없이 투항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적 국가관의 비인간성을 비판하는 해방적 세계관과 연관된다. 어느 정도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른바 세계 사회의 정보화 추세에 대응하는 국가정책 논리를 폈던 김영삼 정부 식의 성장모델도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적 정책론에 불과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정부론의 딜레마인 ‘정부의 규제력 약화’를 김영삼 정부는 현저히 초래하여, 몇몇 재벌의 이해관계에 의해 정책이 좌지우지되는 ‘천민자본주의’로 귀결하고 말았다(백종국 참조). 그러한 체제의 최악의 배설물을 지금 우리는 씹고 있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주도세력인 재벌은 무분별한 차입경영를 통해 그 천민성을 최대한 발휘했고, 한국 정부의 막대한 인적 제도적 자원은 한갓 이들의 후견인 노릇을 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정부의 역할에 다시 주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부 규제력의 해체가 세계 자본주의 추세에 대응하는 적응력을 향상시킨다’는 신자유주의적 신화가 적어도 한국에선 실패했다면,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대안, 즉 정부 규제력의 (철폐가 아니라 그) 성격은 어떠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초점을 두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민중신학자들의 문제제기에서 시사된 바, 이른바 정부의 ‘공공성 신장’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복지민주주의가 세계 자본주의 추이에 대응하는 적절한 한국적 대응 전략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부의 정책은 (기술 중심주의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인적 자원의 관리 재생산 프로그램 속에 적극적으로 복지민주주의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송호근 참조).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와 같이 복지민주주의를 민중신학적 실천담론으로 포섭하는 데 있어, ‘잠정적’이라는 표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비판을 현상적 과제에 안주시키지 말라는 얘기다. 이런 제도를 위한 우리의 실천은 결코 그 제도의 확고한 진리성 때문이 아니라, 한시적이나마 그것이 탈배제주의를 실천하는 역사적 구상체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바로 이런 신앙, 이런 사상 속에서 다시금 피어오를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백종국, 1992, 〈민주화시대에 있어서 한국자본주의의 선택〉, 구범모 엮음, 《2000년대와 한국의 선택》 (성남: 정신문화연구원).
송호근, 1995, 〈세계화와 한국의 사회발전. ‘성장’에서 ‘인적 자원의 개발’로〉, 《계간 사상》 95 (봄).
안병무, 1982, 〈마가에서 본 역사의 주체〉, 《민중과 한국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 1986,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신학사상》 53 (여름).
안병무・박성준(대담), 1989, 〈예수의 매력에 붙잡힌 민중신학자 안병무〉, 《생활성서》 (10월호).
이효성, 1993, 〈정치권력과 대중조작〉, 《사회비평》 9 (서울: 나남).
벤야민, W., 1983, 《발테 벤야민의 문예이론》 (서울: 민음사).
아도르노, Th. W., 1996, 《한줌의 도덕》 (서울: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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