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0월 7일, 한백교회의 안병무 선생 추모예배 겸 교회 창립일에 한 설교를 수정보완하여 내 책 [예수의 독설]에 수록하고자 수정하였지만, 책에 수록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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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주(反定住)의 신앙
안병무의 민중신학적 예수상의 재발견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태오복음〉 8,19~20
몇 년 전(아마도 1980년대 말 혹은 90년대 초) 안병무 선생이 불쑥 ‘유민(流民)의 신학’이란 말씀을 꺼낸 적이 있다. 갑작스런 주장이기는 했지만, 사실 성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것이 그리 낯설게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귀속할 곳이 없는 떠돌이의 삶을 함축하고 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믿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모두 떠돌이 히브리들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아가 야훼조차 고정된 성전에 사는 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떠도는 삶을 의미하는 장막에 거하는 신이라는 것을 보면, ‘유랑’이라는 것은 ‘야훼 신앙의 뿌리/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유민의 신학’이라는 말이 낯익지 않다고 생각되었던 것은, 아마도 우리의 신앙 맥락이 정착민/정주민의 가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야 나는 ‘유랑’이라는 것이 예사스럽지 않은 신학적/신앙적 뇌관을 가진 민중신학적 통찰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른바 ‘안병무 신학’을 승계한다고 할 때, 바로 이 점이 얼마나 커다란 혜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우리의 시대를 가장 첨예하게 대면하며 비판적 시대 읽기를 부단히 시도해야 하는 민중신학자에 있어서 이 문제가 결정적인 문명비판적 주제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노동자가 되려고 입국한 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엔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랬다. 이웃집 ‘누구’가 노무자로 일본에 갔다거나, 친척 아무개가 간호사로 독일에 갔다는 얘길 종종 들을 수 있었다. 또 최근에는 먹을 것을 찾아 중국으로 탈출하는 북한 동포들의 관한 가슴 아픈 소식도 듣게 된다. 그밖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근대화의 부작용으로 인한 기근 등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국제적 유랑자가 되었다는 외신을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된다. 또한 IMF 관리체제 아래 놓인 지금, 우리 주변에는 정착할 곳 없이 유랑하며 노숙하는 무수한 ‘홈리스’(Homeless)들이 있다. 더욱이 구조조정 국면을 맞이하여, 우리는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일터를 잃어버린 수많은 무적(無籍)의 사람들의 허탈감과 상실감 사이를 누비며 다녀야 한다. 그러나 유민화 현상은 국가 안팎을 오가는 사회경제적 난민들에 한정된 현상만은 아니다. 근대화는 전 세계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결코 정착지를 찾지 못한 채 헤매는 정신적 유랑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대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유민화 현상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특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현대적 유민들은 대체로 도시로 몰려든다. 현대의 도시는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무수한 유민들로 들끓고 있는 것이다. 아니 도시 자체가 유랑하고 있다. 도시는 시민에게 안주(安住)할 수 없는 공간을 제공해줄 뿐 아니라, 도시 자체가 비정주(非定住)의 공간인 것이다. 사람들은 도시 속에서 끊임없이 이방인이 되어 유랑하며, 도시는 바로 이런 유랑자의 공간이 된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현대의 도시사회 체제 자체를 가리켜, ‘안주할 수 없는 인간을 생산해내는 일종의 거대한 기계’라고 하였다.
얼마 전 상영됐던 SF 영화 〈맨인블랙〉(Man in Black)은 누가 진짜 인간인지를 분리할 수 없이 인간 사회 한 가운데로 끼어들어온 ‘외계인’을 분리 제거해내려는 특수경찰 ‘맨인블랙’의 영웅담이다. ‘외계인’을 분리 제거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악의 화신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가 전제하는 세계관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외계인’의 영어 표기인 ‘에얼리언’(alien)은 ‘미지의 우주 생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인에게 이 단어는 우리를 포함한 동양인, 흑인, 남미인 등을 뜻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맨인블랙’의 본부로 나오는 건물은 실제로 미국 ‘이민국’ 건물이라고 한다. ‘미지의 우주 생물’에 대한 혐오감이, 백인이 아닌 사람에 대한 미국인의 혐오감과 교차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외부인’(타자)을 배제하고자 하는, 나아가 외부인을 공격하여 제거하는 것이 ‘선’(善)이라는, 이 세계에 만연한 배제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하나의 담론이다. 외부인, 이방인을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그래서 그들을 배척하는 실천을 삶 속에 각인하고 있는 사람들의 언어다. 이 담론이 소통되는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을, 이것이 담고 있는 실천을 자명한 이치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가 이방인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도시 체제는 우리를 끊임없이 이방인으로, 유랑자로 몰아내는데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하며 그렇게 되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직장에서 열과 성을 다해 일하는 것은 이방인이 되지 않으려는 욕망의 표현일 수 있다. 가정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모든 노력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배제되지 않으려는, 그러한 공포로부터 해방되려는 욕망 말이다.
그러나 직장은 물론이거니와 가정까지도 이러한 공포로부터 해방받는 안주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아니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에게 안정감을 주는 데 너무 인색하다. 현대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정주의 불안의 공포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마치 게릴라처럼, 일시적으로 일상을 전복시키는 공간을 추구한다. 사회주의 언어학자 바흐친은, ‘웃음’에서 인간 내면에 쌓인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는 혁명적인 힘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러한 웃음을 좀처럼 얻을 수 없다. 대개는, 게릴라처럼 일상을 빗겨가서 잠시 기습적으로 덮쳤다가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웃음을, 즉 TV의 ‘코미디’ 같은 데서 얻을 수 있는 그러한 가벼운 웃음을 누릴 뿐이다. 혹은 주말이나 휴가 때 일상에서 잠시 도피함으로써 불안, 즉 비정주성의 공포로부터 탈출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다시 자신을 기다리는 비정주의 공간, 도시로 회귀해야 한다.
예수 당대도 무수한 사람들이 유랑자로 내몰리던 시대였다. 식민지 상황 아래서 수많은 대중은 삶의 뿌리인 토지 상실의 위기감 속에 살아야 했다. 가뭄 지진 병충해 전염병 등의 재난만으로도 살아가는 것이 버거운데, 군대의, 지주의, 통치자의 가혹한 착취는 대중의 삶을 바닥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집안의 얼이 깃든 땅에서 쫓겨난다면 조상들과의 교감이 더 이상 불가능해질 뿐 아니라, 조상에게 땅을 위탁한 하느님과의 관계 또한 단절되고 만다. 게다가 회당 안에서 바리사이들이 거품을 토하며 부르짖는 정결율법은 대중에게 구원을 향한 희망의 전조이기보다는,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심판의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수 주변엔 많은 떠돌이들이 나온다. 예수의 비유 속에는 떠돌이들의 삶이, 그 애환이 깊이 배어있다. 예수의 기적은 떠돌이들에게 특별히 베풀어진다. 예수운동은 떠돌이로 전락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복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선포가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삶의 뿌리로부터 근절시키려는 사회적 위협 아래 적나라하게 노출된 사람들, 유민으로 내몰린, 혹은 그러한 위협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의 해방 운동이 바로 예수운동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 자신도 유랑자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 대부분도 그러한 사람들이다. 곧 예수운동은 유민들에 ‘의한’ 유민‘의’ 신학/신앙 운동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안병무 선생의 민중신학적 통찰이 빛을 발한다. 예수는 자신을 이방인으로 배척하려는 사회적 위협 아래 노출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것은 생계를 이어갈 기회의 박탈을 의미한다. 그것은 조상의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그것은 경제적 정신적 삶의 일체의 뿌리로부터 근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두렵다. 만약 그리된다면 야훼 하느님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마는 것이다. 만약 그리된다면 이제 저주받은 ‘어둠의 자식’이 될 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다. 자신만은, 자신의 가족만은 이방인이 되게 하지 않으려고 말이다. 정주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체제 속에서 사람들은 정주할 공간을 찾아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예수는, 예수가 시작한 운동은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정주를 박탈하려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 정주를 포기한다. 스스로 유민이 되려 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로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은 이런 적극적인 포기, 아니 유랑을 선택한 삶을 뜻한다. 그러자 유랑자들의 이야기인 히브리의 역사가 비로소 보인다. 정주자의 역사에 의해 각색된 야훼주의가 아닌, 유랑자의 신학/신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삭과 야곱의, 바로 신앙의 조상인 그 분들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 속에 숨겨진 유민의 신학/신앙이 폭로된 것이다. 야훼, 성막 속에 거하시는 분, 어느 지역에 세워진 웅장한 건물 속에 위폐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유랑자의 신, 아니 유랑자이고자 하신 존재! 건물을 장악한 누구의 소유도 아닌, 신상을 가진 누구에게 소유되지도 않은, 바로 모든 이에게, 박탈의 위협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공개하는 유민의 신 야훼! 바로 그분을 예수님은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안병무 선생이 발견한 민중신학적 예수상이다. 위대한 신의 관한 담론, 신을 기리는 웅장한 축제, 이런 것들 속에 안주하지 않는 예수가 발견한 것이다. 정주를 박탈하려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 안주하기를 포기한, 유랑을 택한 신의 이미지임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모방하는 삶, 바로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이요, 참 신앙의 자세임을 생전에 선생은 역설하였던 것이다.
유랑의 신앙은 정주자의 세계관을 교란시키는 삶으로 발현한다. 그것은 정주자가 은폐한 배제의 체제를, 그것의 가학성을 폭로하는 삶 속에서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다. 현대의 도시 체제가 나에게 위협을 가할 때, 자신의 ‘율법’에 따르지 않으면 이방인으로 내몰겠다고 협박할 때, “인자는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선언하는 유민적 신앙 고백을 통해 예수의 진리는 드러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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